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삼하 24:25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시 115:11
‘다시’ 국가적 재앙이 임하였다. 다윗이 통치하면서 3년 연속 기근이 임하였고,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21:1).” 오늘은 전염병이 창궐하였다. 이를 보면 그것이 다 죄악 때문이다. 그에 따른 동기를 오늘 본문은 먼저 앞세워 설명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24:1).”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신 까닭이라 한다. 즉 다윗의 인구 조사가 범죄 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적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우선적으로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자’ 이에 ‘다윗으로 하여금 그릇된 행위를 하도록 부추기셨다.’ 이는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 21:1).” 하는 말씀으로 전후 전개가 어떠한가를 알게 한다.
무엇이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한 것일까? 본문에서 감추시고 있는 ‘숨은 죄’가 있는데, 여기서 단서는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이스라엘의 범죄는 지난번 압살롬의 난(15:7-12)과 세바의 난(20:1-2)에서 보여 주었던 저들의 반역적인 행동이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수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다윗을 반역하고, 그를 대적하여 압살롬과 세바를 좇았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죄이다. 결국 민족의 죄로 지도자가 격동하였고 인구조사를 명하였다.
이는 다윗의 범죄 행위(인구 조사)가 하나님의 섭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지 않으시고 모든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데 있어 우리의 의지, 바로 그 자유의지를 통하여 ‘악한 의도’까지 허용하셨다. 분명히 역대상 21장에서도 “사탄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데 있어 “다윗을 충동하여” 그리 한 것으로,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였다고 명시하고 있다(1).
다시 말해서 사탄이 일으킨 일이다. 이를 바울은 깨달았고 이에 절규하면서 외치길,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즉 우리의 한계로써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2-23).” 이와 같이 이율배반적인 속성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끝이 없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고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아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도 그리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분해하였다. 이와 같은 근심과 분냄은 성도로서 성령 안에서 자기 안의 또 다른 자기와의 싸움으로 드러나는데,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이와 같은 절규와 간절함이 오늘 다윗의 마음에서도 일었다.
이 상호 모순되는 마음으로 우리는 산다. 살면서 더욱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넓은 의미로 다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탄을 이용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이를 문맥으로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가운데서도,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20-22).” 이 놀라운 신앙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하는 신앙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게 하시기까지,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삼상 26:19).” 하고 다윗은 당시 ‘사울의 충동’의 근원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 ‘다윗의 인구 조사’는 범죄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허용하셨고, 사탄이 격동시킴으로 일시적으로 그 마음이 교만하여 다윗은 이와 같이 그의 통치의 말기에 인구조사를 감행하였다. 이에 그 걸린 시간이 거의 10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24:8-9).”
당시는 태평성대였고 군대 장관 요압은 수도를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정벌과 반란이 완료되었고, 통치 말기의 안이함이 이와 같은 충동으로 하나님의 관여를 가져왔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북쪽 ‘단에서부터 브엘세바’ 곧 유다의 남쪽 경계까지 온 이스라엘에 적용되었다. 분명히 다윗의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에 내린 재앙의 원인이다. 그러나 인구 조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정 하에 여러 번 인구를 계수한 바 있다(출 30:12, 38:26, 민 1:44-46, 26:51).
문제는 다윗의 인구 조사가 군사적인 목적이나 왕권 강화를 위해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본래 합법적인 인구 조사는 제사장들이 그 일을 감당하였다.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민 1:3).” 그리하여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26:1-2).” 이에 반해 오늘 다윗은 요압을 불러 인구 조사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또한 합법적인 인구 조사는 조사받은 각 사람에게 생명의 속전(贖錢)을 내게 하였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출 30:13).” 그리고 이 ‘생명의 속전’은 성소에 봉헌됨으로 여호와께 속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사함과 동시에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고백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은 이에 따라 제사장도 아니고, 생명의 속전도 없이 인구 조사를 시행함으로, 요압 장군에 의한 군사적인 목적과 왕권 강화를 위한 인구 조사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하여 저들이 계수할 때도,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24:9).”
즉 이와 같은 다윗의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강화된 군사력과 왕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 그러므로 오늘 이 일은 표면적으로 다윗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나 내면적으로는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에 섭리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하셨다.
이는, 후일에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고 생명을 15년 연장하게 된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의 사신들 앞에 이스라엘의 국고를 다 내보여, 보물 창고와 무기고를 보여 줌으로 스스로의 재력과 군사력을 자랑하였던 교만의 성질과 같다. 이처럼 다윗은 인구 조사를 통해 자신의 세력과 영광스러운 번영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군사력을 파악하여 강국으로서의 건재함을 과신하고 싶었던 것이다(9).
곧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때는 대부분이 살만하고 적당할 때이다. 스스로를 자신하고 태평할 때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다. 이는 지혜의 말에 따라,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하는 정의와 같이 간단하고 당연한 우리의 속성이다.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시 94:2-3).
이를 통해 우리는 깨닫는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1).
하여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찬가에서,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49-50).” 하고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51-53).”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도식적인 이해와 판단으로는 가늠하기 어렵다는 것,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처음과 끝을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엄연하게 죄가 원인이어서,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2-13).”
하여,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106:43).
이에,
“여러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혀 갔던 줄을 알지라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고 그들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겨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 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었었느니라(겔 39:23-24).”
오늘 이 모든 일의 전개가 복선으로 깔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죄성이다. 참된 헌신은 결코 이해타산이나 인색함이 없이 온전하고도 자발적이어야 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그런데 우린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안다. 형편과 사정에 따른 것이라 해도 자신의 이해타산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 우선하는 게 문제다.
결코 자기희생은 ‘값싼 제사’로 드려질 수 없다.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신 16:17).” 그런데도 당장 어려우면 우선하여 주께 드려지는 물질과 시간과 마음을 덜어서 자기들 살 궁리에 우선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온전한 헌신과 순수한 희생의 마음 자세로 하려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하심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2).” 그저 형식적으로 다만 종교적인 행위로 따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3).” 하시며 하나님이 경멸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14).”
이에,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16-17).”
그러므로 오늘 말씀으로,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하나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주가 기뻐하심은 겸손이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115:1).
하고 이 모든 것에 대해 주를 인정함으로, 우리들 저마다의 우상숭배를 버려야 한다. 하여,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3).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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