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10 주일
이사야 51장
너는 내 백성이라
사 51:1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사 51:15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휘저어서 그 물결을 뒤흔들게 하는 자이니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사 51:16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들어가는 말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1).”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가 누구인가? 성경은 모든 만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곧 이 땅에 살면서 주의 뜻으로 산다는 것은 ‘포로 생활’과 같이 고통의 연속일 수 있다. 다들 사느라 고생이 많다. 나름 다 애쓰며 수고하며 산다. 갓난 애기도 젖 먹는 힘으로 산다.
이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본향으로의 귀환을 소망하는 자’로 우리는 세상에서 ‘떠내고, 파낸’ 자리가 뚜렷하다. 곧 우리의 아집과 교만과 완고함의 흔적이다. 동시에 그만큼 세상이 나를 꽉, 쥐고 서로 엉겨 붙었던 자리이다. 이를 파내어 오늘의 주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의지에 따른 것이다. 우리가 먼저 주를 사랑한 게 아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그리하여 오늘 본문은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5).” 하고 일갈한다. 일체 여지가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예정하셨고, 창세전에 택하신 바, 이를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는 바울로서는 서두에서 밝혔다.
“①곧 창세 전에 ②그리스도 안에서 ③우리를 택하사 ④우리로 사랑 안에서 ⑤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⑥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⑦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⑧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⑨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당시 에베소는 상업적으로 소아시아에서 제일 부유한 도시였다. 유프라테스에서 라오디게아를 경유하여 에베소까지 이르러 동방에서 모든 산물이 종착하는 곳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여신상’이 있어 미신이 성행하였고, ‘황제 숭배’가 행해지던 부도덕한 곳이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아 독자적 행정관이 있었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 기관으로 민회관과 순회 재판소가 있는 곳으로 당시 가장 선진화되었다. 이처럼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에 세워진 에베소 교회다.
에베소에 처음 기독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서이다. 저들은 귀족들로 바울에 의해 복음에 가르침을 받았다.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2년 간 머무르며 목회하였다. 후에 디모데가 바울의 열심을 본받아 목회 활동을 함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 이어 에베소 교회는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곧 오늘 본문에 앞서 에베소 교회와 저들이 받은 <예정론과 택정하심의 진리>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이처럼 정의한다.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사 51:5).” 여기서 ‘팔’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가 영원할 것이라는 것은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6).” 하는 말씀으로 근거한다.
이를 통하여 [너는 내 백성이라]하는 확증을 얻는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16).”
본문이해
첫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시기 위해 ‘과거에서 미래로’ 그리고 ‘미래에서 현재’를 보도록 하신다(1-3).
둘째, 종당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게 인도하신다(4-6). 이는 ‘과거의 은혜’에 근거하여 ‘장래의 은혜’에 대한 소망으로 현재를 살게 하심이다(7-8).
셋째, 이사야는 이를 전하면서 자신도 감동하여 기도하였다(9-11). “하나님, 깨어 일어나셔서 그 일을, 그 큰 구원을 행하시옵소서”
넷째, 하나님은 그러한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하신다(12-16). 바로 내가 지금 느끼는 기쁨, 장래의 은혜에 근거하는 것을 가지고 두려움도 이긴다.
다섯째,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각성해야 하고 깨어나야 한다(17-23). 비록 지금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아 비틀거려도 하나님은 결국 유다에서 진노의 잔을 빼앗아 바벨론에게 쏟으실 것이다. 이에 오늘 본문을 다시 두 단락으로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신다(1-12).
1)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회복시키신다. 오늘날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의와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예수는 이로써 대속 사역을 이루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2)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경건하고 거룩하여 의롭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를 멀리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다. 하여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3)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으로 산다. 성도들의 기쁨은 의무이다. 좋으면 숨길 수 없다.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받은 성도라면 구원의 기쁨으로 이 땅의 무엇으로도 굴하지 않는다. 이는 성령의 도우심이 실제 우리로 ‘항상 기뻐하라’하신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사랑의 징계이다(12-23).
1)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분노의 잔’일 수 있다. 곧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 비웠도다…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도다…(17, 20).” 그런 가운데 회복이 이루어진다.
2) 우리에게 임하는 고난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마치 병원 치료와 같이 고통이 주어지나 견딜 수 있는 진통과 동시에 고침도 일어나는 것과 같다.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22).”
3) 우리가 자초한 일에 대해 당하는 고난은 감수하고 인내해야 한다. 우리의 인내로 참된 회복도 가능하다. 마침 우리나라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특검’은 그동안의 ‘국정농단’에 따른 것으로 잘못된 민주주의를 복원하려는 노력이다. 그렇게 하여 억울하다고 하는 경우도 그의 잘못의 대가를 치른다. 이때 세상에서 우리가 학대를 당하기도 한다.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13).” 이렇듯 결박을 당하고 궁핍함으로 힘들어 한다(14). 그때는 인도자도 없었다(18). 성들은 황폐하여 기근과 칼로 죽어갔다(19). 곤비하다(20). 그러나 이 모든 게 우리의 죄악을 벗겨낸다. 죄사함을 받아서 구원은 받았으나 사는 동안 죄악은 여전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한다.
4) 선지자 예레미야의 슬픔의 노래 애가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애 1:5).” 저마다의 각박한 삶의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인정하면 곧 ‘그 성의 거민들의 죄’ 때문이다.
5) 계시록에서 요한 일곱 교회를 향한 서신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경고한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앞서 저들의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3).” ‘그러나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 여기서 우리가 붙들 것이 회개다. 곧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한다.
① <행위>는 포괄적인 삶의 태도이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그러므로 삶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야 한다.
② <수고>는 고통스런 가운데서도 최선의 삶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의 연약함으로 수고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③ <인내>는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고 극복해 가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나오는 말
오늘 우리를 어렵게 하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지나간다. 다만 이러한 어려움, 고난으로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12-13).”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우리를 위로할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12). 그는 영원하시고 자존하신 분이다(13, 15, 22).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사람을 창조하신 자이시다(13). 우리의 이 ‘결박된 포로’에서 해방시킬 자이시다(14). 바다를 흉용케 하시는 자이시며(15),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는 자이다(16). 곧 오늘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자이시다. 결국 우리에게서 ‘분노의 잔’을 거두실 자이시다(22). 이 잔을 우리에게서 거두어서 ‘우리의 원수’에게 주실 것이다(23).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45:22).” 하면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오직 그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6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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