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시편 54:1
삶의 허망함에 대하여 권력만큼 그 쇠락이 확연한 게 또 있을까? 천년만년 그 행사가 영원할 것 같더니만, 모든 것이 드러나 서로를 부끄럽게 한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설마, 하는 우리의 안이함에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러므로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나라와 민족의 의미를 되새긴다. 내게 두신 육체와 마찬가지로 내게 허락하신 나라다.
왕 앞에서 슬픈 얼굴을 짓지 말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느 2:2).” 본래 충성된 신하는 마음의 근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사로이 얼굴빛을 하지 않는다. 내 감정을 함부로 발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전 8:1).”
모든 상황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할 때이다. 아내 앞에서 툴툴거리듯 작금의 현실을 뭐라 하다가 그 또한 썩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누굴 욕하고 누굴 두둔하는 일에는 자칫 그 모든 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겨냥하는 말이 될 수 있다. 생각을 다 뱉으면 정작 설 자리를 잃는 게 된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벧전 2:13-14).”
저를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이번처럼 일을 드러내어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무엇에 대해 정죄하는 것은 잘 모를 때 하는 일이다. 일이 되어지는 것을 살피되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목도하는 게 중요하겠다. 결국 악에 대해서 담대할 필요가 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그리하여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오늘 드러나는 상황은 결국 우리의 악함이 어떠한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끝 간 데 없는 죄의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할 일이 아니라 믿는 자로서 주 앞에 바로 서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내버려두심’이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마주하게 하신다. 원하는 대로 하게 하시는, 하나님 없는 그 자리는 참담하고 황망스러울 뿐이다.
오히려 여기서 우린 찬송의 주체가 누구이신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4-25).” 우리의 추하고 더러움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발견하게 한다.
공연히 마음은 심란하여 자꾸 먼 산을 보게 했다. 모든 우연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자. 그 안에 필연이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때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지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주한다.
아들 녀석이 여자 친구가 생겼다며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려니 하고 생각을 밀어냈다. 느낌이 이상했다. 언제나 보면 당연한 것에 서툴다. 오후께 글 쓰러 온 아이를 얼레고 달래다가도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생각이 가로막았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잠 27:23).” 늘 이 말씀이 울리는 듯하다. 세심함과 예민함은 그래서 차이가 크다. 세심하다는 것은 저를 살펴 그 헤아림으로 마음을 더하는 것이고, 예민하다는 것은 나의 감정에 우선하여 나를 우선하려는 데 있다.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내 아이라 해도 저의 인생을 두셨다. 가르치는 아이 역시 내가 더는 어쩔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돌을 고르고 고랑을 내는 일에서부터 개간하여 새로 뜰을 내는 일에까지, 주께서 ‘우연처럼’ 두시는 데서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을 하면 될 것이다.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 열권을 읽었다. 몇 권을 더 주문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다는 건 있는 책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은총이 되기도 하였다. 2011년도와 그 전해에 읽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참 힘들게 늦은 신대원을 하고 있는 때였다. 그때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였던 부분이 새삼스러웠다. 더 깊은 감동과 이해가 있었다. 내친김에 폴투르니에의 책들도 한편으로 끄집어냈다. 먼저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 겨울이 깊어지는 동안 나의 동무이며 스승이고 선배가 되어줄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가. 가끔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내 곁에 계시는 게 감사하다.
오늘 잠언의 말씀도 어수선한 오늘 이 나라에 들려주는 말씀이면서 나를 불러 세우시는 말씀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이러저러하니 앞으로 어쩔 것이다, 하는 식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교회가 또는 사역이 언제부턴가 일로 여겨지는 데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어찌 안단 말인가. 그리스도인의 자세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결국 우리에게 두신 가장 크고 복된 사역은 영생이었다. 영생은 언제나 오늘을 기반으로 한다. 하나님께는 오늘만 있지 어제나 내일이 없으시다. 온전한 한 날일 뿐이지 부분적이지 않으시다.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하는 잠언의 가르침은 당연하였다. 알려고 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자의 오만한 태도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뒤이어 다윗의 기도를 읊조리는 것은 복되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늘 성경의 키는 ‘주의 이름으로’와 ‘주의 힘으로’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시 143:11).” 곧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23:3).” 이는 오늘 여기에 나를 두신 이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마땅히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와 같은 확신은 막연한 게 아니라 성경의 보증이었다. 그러므로 영생보다 귀한 은사는 없다.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하는 사역은 영생을 소망하며 맛보고 그 누림을 사모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종일 혼자 있으면서 ‘저들’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져있던 이의 묵상을 함께 음미하는 일은 복되다.
때론 지겹고 때론 무료하여 거의 실신할 정도가 되기도 하지만, 번번이 그래서 더 주를 사모함으로 혼자인 게 감사한 것이다. 다들 사느라 여념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이제 왜 사느냐고 묻지 않는다. 수백억의 재산을 은닉하고 부와 권세를 누리며 떵떵거리고 사는 저들의 삶이 부럽지가 않다. 그래서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억울하고 분해서 더욱 악랄해지는 그 심보다 불쌍할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아, 이와 같은 말씀 한 구절만 있어도 수천억의 재산보다 넉넉하였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오늘 여기에 두신 이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 일. 묵묵히 창가에 서서 그 푸름을 다하고 있는 작은 나무 한 그루에서 나는 주의 영광을 본다. 생명을 주신 이에게 그 생명을 다하는 것보다 더 큰 찬송은 없다. 책상 위에서 혹은 침침한 복도 한 구석에서 주신 바 그 생명을 무던히 지켜가는 화분들이 되레 큰 교훈이 되는 것이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전 12:3-5).”
한나절의 생(生)일 뿐이다. 어느덧 머리가 희끗하고 성겨, 아이는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고, 저만치 두고 온 나의 유년시절은 아련하기만 한 것이어서. 다시 갈 수 없는 것들의 아우성이 오늘이었다. 어느 훗날 오늘이 아련하였을 테니, 오래된 나의 미래여. 내게 두시는 오늘의 이 모든 우연함이 주의 숨길이었다. ‘이게 뭔가’ 싶다가도 ‘저건 아니지’ 싶은 게 인생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만고의 진리다.
주신 날, 허락하신 시간을 감사함으로 흘려보내는 게 복이었다. ‘그런 날’은 올 것이다. 여기가 전부인 줄 알고, 끝이 드러나지 않을 것처럼 사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 영생은 우리에게 맡기시는 총체적인 은사다. 어찌 살 것인가. 이는 엄청난 값으로 주신 것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질 2:8).” 아,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3-4).” 오늘 일련의 사회 사건이 이 말씀 안에 담겨있었다.
그리하여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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