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잠언 29: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시편 56:9
말씀 묵상을 권하였다. 묵상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던 말과 생각을 멈추고 마음을 모아드리는 시간이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 혹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올 때, 시장 어귀에서 골목길 후미진 곳에서도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며 찾는 것이다. 느닷없는 조카아이의 방문은 그러했다. 학교를 휴학할까, 뭘 해야 하나 싶은 거였다. 갈 바를 알지 못할 때도 묵묵히 걸어가면서 주께 묻는 것이 옳을 거였다. 대체로 문제의식이란 단회적인 경우가 많아서 모퉁이를 돌아서면 별 거 아닌 게 될 수 있다. 혹은 다른 길로 들어선들 길 위에서 묻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기-승-전- 하나님이네요. 아이의 지적에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주일을 다시 권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를 말해주었다. 어지러운 시국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들고 살 것인가. 성경공부를 위해 아이가 와서 우리는 같이 식사를 하였다. 의도적인 침묵의 시간. 묵상이란 지금처럼 정해진 시간에 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만은 아니다.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문득!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이 하시던 일을 멈추시는 게 아니라 내가 가던 길에서 멈추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온통 나의 영혼에 대한 관심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득 혹은 작은 소리를 기울여 ‘주님!’ 하고 부를 때에도 나의 모든 영적인 세포는 일제히 주를 향해 깨어난다. 가만히 마음을 기울이시는 시간이 분주하게 여러 사역을 감당하는 일 이상으로 은혜롭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요 8:18).”
실은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잠을 잘못 잔 것인지, 기온이 떨어져서 그런 것인지,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아이들이 오고 이런저런 얘길 나누고 같이 식사를 하고 당구도 치고 하면서 모처럼(?) 고된 하루가 되었다. 오후께 아이가 수업을 와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전화는 꺼져있고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데, 그게 또 고맙기도 하였다. 기-승-전- 하나님이라! 내 말이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구나. 소파에 누워 ‘그랬었구나!’ 하는 데 새삼 낯선 것 같기도 하고, 몸에 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마음이 싫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의 영혼은 자라고 무르익어 달달한 맛을 내기도 하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 같은데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끙, 하고 돌아눕다 일찍 잠에서 깨서 일어나 앉았다. 아무 때나 ‘주님’ 하고 부르면 나의 온 신경은 주를 향해 뻗어난다. 창가에 놓아둔 화분이 신기하게도 늘 보면 햇빛을 향해 돌아앉은 것처럼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것 같은데, 내가 자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곧 나의 영혼에 영양분을 공급하신다.
사명이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곧 저를 생각하는 일이 기도가 된다. 마음에 두실 때는 감당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나라가 온통 어지러운 때에 그 왁자한 소란 가운데서도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 결국 이 싸움은 죽어야 끝이 난다. 죽어야 나을 병이다.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니 엎어져야 할밖에.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잠 29:9).”
연일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고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정황을 놓고 설전을 벌이는 위정자들의 말씨름이 한심하다. 이제 느끼는 것이지만, 뭐라 한들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하는 게 있는 것이다. 화인 맞은 양심이란 작동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엉뚱한 데서 열심인 것이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도 저들은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신의란 그런 게 아니라 불러 세울 수 있는 강직한 말일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참 두려워할 대상이 없을 때는 사는 게 가장 무서운 법이다. 살기위해 기를 쓰는 데는 사람이 두려운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올무가 된다. 신의를 빙자한 족쇄인 것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안 됐고 불쌍하고 딱하다. 내가 그렇게 여기는 게 무슨 대수이겠나만, 그것으로 나를 돌아보며 나의 나 된 것을 주께 아뢰는 일. 묵상이란 사뭇 주 앞에서 머무는 일이다. 눈을 마주치고 가만히 있는데 좋아 죽겠는 것. 입가에 머금는 웃음 같은 것.
학문으로써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아이의 말에 풉, 웃음이 번졌다. 하나님은 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러시는 것일까? 전에도 언제 ‘목사가 될 아이’로 느꼈었는데, 글쎄. 나는 말을 아끼느라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성경공부든, 글쓰기든, 내가 오란다고 해서 여기까지 올 리는 만무하고. 주께서 어찌 이루어 가시려는가, 생각을 기울이는 일. 묵상이란 이처럼 수시로 아무 때나 느닷없는 것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불쑥 떠오르고, 떠오르는 생각만으로 벌써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생활도 어렵고, 몸도 힘들고, 되는 일은 답보 상태인 것 같고, 친구도 없고, 늘 한심하고 처량한 시간인 것 같은데, 요 며칠 드는 묵상의 줄기는 이게 결코 허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하기도한데 말이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막 14:5).” 이와 같은 논리는 내 안에서도 들끓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괴감으로 밀려오기도 한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아이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나는 순간 괘씸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이런 버르장머릴 다 봤나! 대체 이런 애한테 내가 뭘 하자고 이러는 것일까? 전에 친구가 비아냥거리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돈이 나와 밥이 나와? 이런 젠장. 이 아까운 시간을 마음을 공연한 기대를 이 애한테 허비할 필요가 있나?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 14:4).”
쓸데없이 교회 월세만 허비하는 것 같고, 그 안에 들어앉아 내 인생만 허비하는 것 같고, 돼도 않는 생각으로 공연히 내 마음만 허비하는 것 같고. 그러는 동안 나이는 들어 겉 사람은 낡고 쇠하여지는데 이게 뭔가 싶은 것이다. 아! 이에 또 바울 사도는 이를 일깨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어째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4-15).” 궁극적으로는 예수와 함께 나의 영혼을 바로 서게 하시는 일. 감사로 은혜가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 고로 이 땅에 쌓아두는 보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그러므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이처럼 새벽에 잠을 깨서 말씀을 끌어당겨 그 앞에 나를 놓아두는 일. 마음을 생각을 나의 시선과 몸짓을 주 앞에 가만히 내려두는 것. 묵상이란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시 56:9).” 내 안에 숱한 원수가 물러간다.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신 것을 안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10).”
이에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11).” 오늘 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모든 사건과 사고가 결국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혹은 ‘다 그런 거여서’ 덩달아 쩔쩔매는 것들에 대하여,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9:20).” 그러므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18).”
주께 아뢴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그러므로 주의 은혜와 은총이 나와 함께 하시기를. 하여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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