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서 바라보는 풍경
(1)
"어쩔 거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태식이가 다시 물었다. 양호선생은 못들은 척
책상 위에 널린 아이들의 건강기록부만 뒤적인다. 경호는 팔짱을
끼고 서 있다. 휠체어에 앉은 상준이는 무심하니 무릎 위에 놓인
교과서만 뒤적인다.
어쩌다 마지막 결정이 민우 손에 달리게 되었는지…, 민우는 자꾸
답답하기만 하다.
태식이와 경호는 반대, 양호선생과 상준이는 찬성이다. 원래
양호선생은 빠져야한다. 교실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양호선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숫자가
짝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벌써 일주일째 양호실 신세를
지고 있는 터라, 태식이와 경호도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민우는 양지바른 창가에 서서 창 밖에 쌓인 장작더미만 내다보고
있다.
"응?"
태식이가 다시 우악스런 표정으로 다그친다. 얼른 대답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한 대 치겠다는 기세다. 민우는 절로
움찔하면서도 뭐라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찬성을 하자니
그렇고, 그렇다고 양호실에 더 있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얼른 찬성이든 반대든 먼저 대답을 해 버릴 걸
그랬다. 불곰선생은 내일까지만 봐 준다고 아예 못을 박았다. 마침
토요일이기도 하고, 그러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무조건 교실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네 명 다 퇴학을
시켜버리겠다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고 갔다.
"야…!"
태식이가 민우의 어깨를 툭 치며 다시 소리친다. 그제야 양호선생도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참견이다.
"얘, 태식아! 그러지 말고 내일 다시 하자. 민우는 아직 결정을 못한
거 같은데, 그렇게 윽박지르면 공평하지 않잖아, 안 그래?"
흰 가운을 입고 단정하게 서 있는 양호선생은 참 곱다. 생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갸름하니 목이 긴 선생은 언제나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그러니 선생의 의견은 늘 절로 힘을 얻는다.
처음 아이 넷이 양호실에 들어설 때도, 무턱대고 교실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도 양호선생은 뭐라 대대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 기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고 해야 옳다. 스스로 아이들 편이
되려고 했다. 그런 선생의 마음을 아이들도 익히 안다. 슬그머니 나가
군것질거리를 사오기도 하고, 무료한 오후를 달래주기 위해 양호실
구석에 놓인 도구들을 늘어놓고 새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체중을
재는 저울시계, 앉은키를 재는 의자 그리고 시력 검사표와 매트리스
두 장, 색맹을 알아보는 카드와 자질구레한 집기들까지…. 선생이
그걸 늘어놓고 같이 정리하자고 했을 때, 경호는 괜히 일만 시킨다고
투덜대기도 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양호실의 협소한 공간을 조금
넓히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상준이가 휠체어를 탄 채 들어와 있어야
하고, 어른 덩치 만한 아이 셋이 복작대듯 양호실을 점령하고 있는
판국이니, 선생의 배려는 이처럼 단아하다. 드러내어 표하는 바 없고,
설명하여 강조함이 없다. 먼저 움직이다 아이들이 절로 눈치채게
하는 것이 선생의 수법이다.
태식이가 그런 선생을 쳐다보며 변명처럼 한 마디 한다.
"윽박지르는 게 아니고요… 이 자식이 자꾸 뭉그적대잖아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냥 말하면 될 것을…."
이처럼 태식이도 양호선생 앞에서는 고분고분 쩔쩔맨다.
"어머? 이 자식이 뭐니? 친구한테!"
어쩔 때마다 선생의 말투는 애같이 귀엽다.
"그리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꾸 결정을 강요하면 안 되는 거야.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게 해야지. 안 그래?"
토라진 투로 말은 하지만, 아이들은 선생의 마음씀을 모르는 바
아니다. 선생님이 자꾸 아이들을 감싸고도니까 얘들이 이러는 거
아닙니까, 하고 조금 전 불곰선생은 괜히 양호선생까지 나무라고
갔다. 그때도 선생은 돌아서는 불곰선생 뒤에 대고 혀를 빼며 '메롱'
하는 시늉을 하곤 아이들보다 먼저 소리 죽여 웃었다.
"치, 또 잔소리! 어휴…."
태식이 곁에 섰던 경호가 저 혼자 중얼댄다. 선생도 그 소리는
들었는지 얼른 경호를 보며 말한다.
"어머? 경호, 너. 내가 무슨 잔소리를 했다 그러니? 너, 또…
노처녀라고 놀리려고 그러지?"
휠체어에 앉아 있던 상준이까지 고개를 들고 저 둘을 보며 웃는다.
경호는 금세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잔뜩 골이 난 사람처럼 민우만
채근하던 태식이도 소리 없이 웃는다. 민우는 멀뚱하다.
양호선생은 정말 시집 못간 이모 같다.
"내가 언제요?"
쭈뼛대면서도 선생의 장난이 싫지 않은 경호, 그런 경호의 마음을
아는지 한층 더 과장되게 장난을 거는 양호선생…. 이와 같은 소란은
일주일 동안 양호실에 있는 아이들을 편하게 했다.
이 주 전에 아이 하나가 계단에서 굴렀다. 목발을 짚는 사 학년
계집아이였는데, 쉬는 시간에 다른 아이들한테 밀렸던 모양이다. 그
아이는 응급실에 실려가고, 부모는 교육청에 진정서를 냈다는
소문이다. 그 일 이후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선생들은 종례시간마다
닦달을 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교육청에서 감사가 나왔네 어쩌네
하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더니 기껏 한다는 게 장애아들은 모두
일층으로 교실을 옮기라는 거였다.
한 달에 한번씩 정립회관에서 차가 온다. 그럼 다른 아이들은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그 애들을 쳐다본다. 나도 다리 아픈데, 하면서
쩔뚝거리는 시늉을 하며 따라오는 아이도 있을 정도다. 민우는 사실
그럴 때마다 창피하다. 차라리 운동장 밖으로 모이라고 하면 좋을
텐데…. 대형버스는 늘 다른 학교 아이 몇을 먼저 싣고 운동장
한복판에 서 있다. 마치 누가 좀 보라고 위세부리는 꼴이다. 그게
때로 쉬는 시간이기나 하면 전교생은 복도창문에 매달려 아우성을
치며 구경이다.
서울 학교는 참 별 걸 다 한다. 민우는 그게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수업을 하루 빼먹어도 결석으로 치지 않는 게 좋다. 정립회관에
가면 수영도 하고 사격도 할 수 있어 더 좋다. 아이들과는 거기서
안면을 텄다. 한 반에 한 명씩 마치 교실 지킴이로 나누어 놓았다가,
그런 날이면 한데 모아 같이 놀게 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터지고는 학교에서도 별 수 없었나 보다.
한꺼번에 같은 반으로 몰아넣으려고 한다. 그것도 하필 여자 반으로!
다른 학년은 어떤지 몰라도 육 학년은 일 층에 여자 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남자애 네 명 때문에 새로 반을 만들 수도 없는 일이라고
선생들은 해명이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도 벌써 한 달이 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긴 한 일이다.
민우를 비롯한 아이들은 그래서 양호실에 모였다. 정립회관에 가는
날이면 양호실에 모여 인원점검을 하고 떠난다. 그리고 다음 날은
견학기록문 비슷한 걸 써서 내야 하기 때문에 또 양호실에 모인다.
그럴 때면 각자 눈 도장을 찍듯 아는 체 하는 게 전부였던
아이들이다.
"얘들아, 배 안 고프니? 우리 뭐 맛있는 거 사다 먹을까?"
양호선생은 얼른 딴청이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모양이다.
아이들은 금세 얼굴이 환해진다. 오늘도 선생이 한 턱 쏘려나 보다.
"벌써…, 송별회 하시게요?"
얌전하기만 한 상준이가 툭 하고 뼈 있는 소리를 한다.
"뭐?"
화들짝 놀라며 양호선생은 서운한 기색이다. 상준이는 더 말이 없다.
다른 아이들도 서로 눈치만 본다. 겨우 일주일이었는데, 꽤 정이
들었다.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얘, 우리가 뭐 헤어지기나 하니? 송별회는 무슨 송별회? 치…. 그리고
뭐, 너희들 십 오 반에 들어가면, 여긴 이제 안 올 거야? 어머! 정말 나랑
안 볼 생각들이구나? 그지?"
선생의 호들갑은 알아줘야 한다.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내며
너스레니 아이들이 크게 웃는다.
"아, 아니에요. 상준이 저 놈은 원래 저래요. 선생님, 저는 튀김 먹고
싶어요, 히히."
경호가 얼른 참견이다.
"됐네, 이 사람아! 일 없어."
토라진 척 하며 도로 털 푸덕 의자에 앉는 선생이 귀엽다. 상준이만
괜히 무안하게 됐다. 그런데 짐짓 골난 체 하던 태식이가 불쑥
껴든다.
"오늘은 제가 쏠게요. 선생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말만해요."
아까 일을 만회라도 하려는지 한껏 의기양양이다. 민우는 그런
태식이의 참견이 꼴불견이다. 분명히 저 돈도 자기형이 줬거나,
아니면 아이들한테 뺏은 것일 게 분명하다. 민우도 태식이한테 돈을
몇 번 빼앗겨봐서 안다. 태식이 형은 종암동 짱이다. 중학교도 퇴학
맞고 당구장에서 일한다고 언제 경호한테 들었다. 가끔씩 태식이네
형이 학교 앞으로 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몸이 불편하다고 누가
동생을 놀렸거나 하면, 태식이네 형은 그 날 아주 학교를 발칵
뒤집어놓고 간다. 그러니 학교에서는 축구부 다음으로 태식이가 세다.
축구부 애들도 태식이한테는 꼼짝을 못한다. 그렇다고 같이 붙어
싸웠었다는 게 아니라, 다 걔네 형 때문이다. 태식이는 형 빽만 믿고
학교에서 짱 행세를 한다. 다리를 조금 절기는 하지만 태식이는
달리기도 빠르다. 태권도도 했다고 하고, 유도장에도 다녔었다고
한다. 그러든 어쩌든, 민우는 태식이가 가소롭다. 건들대는 꼴도
우습고, 욕을 너무 잘하는 것도 마땅찮다. 아버지만 아니면 한판
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와! 그럼, 난… 튀김하고 떡 꼬치."
먼저 경호가 또 참견이다. 양호선생도 빙그레 웃으며 난 그럼
우유하고 곰보빵, 한다. 참, 눈치도 없다. 태식이는 상준이를 보며 넌,
하고 묻는다. 상준이는 힘없이 김밥, 한다. 그리곤 다다. 드르륵 문을
열고 태식이는 벌써 양호실 뒤쪽으로 돌아간다. 담벼락에 있는
조그만 개구멍으로 갔을 게 분명하다. 장작더미가 쌓여 있어 언뜻
보면 모르지만, 아는 애들은 다 안다. 다른 애들은 삼 교시 수업중일
테니, 걸릴 염려는 없다.
양호선생이 민우를 본다. 태식이는 민우만 쏙 뺐다. 이래저래 불편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셈이다. 하지만 민우는 상관하지 않는다.
태식이가 무섭지 않다. 다른 애들은 은근히 태식이 눈치를 보지만,
민우는 태식이가 하나도 겁나지 않다. 정말 제대로 걸리면 한판 붙어
볼 생각도 있다. 이길 자신은 없지만, 한번만 걸리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한다.
민우는 슬그머니 양호실을 나왔다. 그리고 태식이가 빠져나갔을
개구멍 반대편 장작더미에 가서 앉는다. 겨우내 때던 것이 아직도
반이 넘게 남았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올 때까지 다 때지도 못할
걸, 선생들은 그렇게 잔소리를 했다. 심지어 허연 입김이 호호 나올
때도 난로를 못 피우게 했을 정도다. 민우는 바닥에 떨어진 장작을
툭 걷어차며 장작더미 위에 앉는다. 괜히 슬프다. 도로 평택에 갔으면
좋겠다. 지금쯤이면 개울물도 다 풀렸을 테고, 뒷산에서 애들이랑
자치기도 할 수 있을 텐데…. 닭장 집 순국이한테 껌 종이와 구슬을
다 주고 온 게 아쉽다. 서울에는 껌 종이 따먹기가 없어서 소용이
없지만, 구슬치기는 한다. 그러니 왕 구슬 몇 개라도 그냥 가져올
걸….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까 민우는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한다.
작년, 여름방학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것도 순
엉터리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서울로 이사한 건 그렇다 쳐도,
남의 집 옥상이 또 뭐야! 교회가 없으면 이사를 하지 말던가, 교회가
있으면 집도 좀 있던가…. 민우는 자꾸 심통이 난다. 엄마하고 약속을
했지만, 생각할수록 자꾸 분하고 화딱지가 난다. 아버지가 목사인 게
싫다. 그것도 가난뱅이 목사인 게 너무 싫다. 평택에는 그래도
단칸짜리지만 집도 있었다. 비록 예배당 마당이지만 마당도 있었다.
볏단도 있고, 개울도 있었다. 과수원도 있고, 양계장도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는 없는 것 천지다. 교회가 세든 건물도 맘에 안 들지만,
학교까지 오는 길은 더 싫다. 꼬불꼬불 골목길도 답답하고, 쉴새없이
차들이 댕기는 도로도 싫다.
무엇보다 민우는 전학 올 때 느낀 창피함을 잊을 수가 없다.
이 학기가 시작되고도 일주일이 넘게 전학수속이 안되었다. 그리고
기껏 엄마 손을 잡고 학교에 왔을 때, 지금의 불곰선생인 오 학년
학년주임은 민우를 받을 수 없다고 억지를 썼다. 민우는 복도에 서
있었다. 하지만 교무실에서 엄마와 나누는 선생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보다 더 시끄러웠다. 그게 말이나 되는
건지 어쩐 건지는 모르지만, 공부를 못하네 어쩌네 하고 둘러대는
선생의 목소리를 전교생이 다 들을 것만 같아 민우는 자꾸
두리번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봤을 때도 엄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선생은 자꾸 문 밖을 기웃대며 더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공부를 썩 잘한 것은 아니지만, 평택에선 그래도 제법 한다는
소릴 듣기도 하였는데…. 자꾸 얼굴이 화끈거려 민우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뒤 민우는 불곰선생만 보면 가슴이
콩콩 뛴다. 담임이 아닌데도 시험 때만 되면 불곰선생이 먼저
떠오른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엄마에게 그리 수모를 줄 수
있을까? 민우는 불곰선생이 꼴 보기 싫어서라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렇다고 전교를 주름잡네 어쩌네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담임선생이
정하는 반 평균은 훨씬 넘고도 남는다.
에라, 모르겠다. 민우는 팔베개를 하고 장작더미 위에 벌러덩
눕는다.
뭔가 뜻이 계셔서 하나님은 이렇게 만드신 거라 했다. 그 뜻이 뭔지
누가 알겠나만, 민우는 엄마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안다. 밖에서
놀다 누가 놀리기라도 해서 울고 들어오면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등을 다독이며 한참씩 기도를 하다, 민우보다 서럽게 또 울곤
하였다.
어릴 때야 그랬지만, 이제 민우는 울지 않는다. 그래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또한 그래서 엄마가 더 우는 게 싫다.
평택에 사는 삼 년은 그래서 더 기를 쓰고 내색을 안 했다. 오히려
억척스럽게 친구들을 좇아 다녔고, 저들이 하는 거면 그게 뭐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민우네 마루 밑은 온통 민우의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겨울철의 외발썰매에서부터 팽이, (자치기에 필요한
곧은)막대기, 병(뚜껑을 펴서 만든)딱지, 껌 종이, 구슬… 등등. 말
그대로 없는 게 없었다. 구슬이 깨진다고 애들이 안 시켜서 그렇지
민우한테는 쇠 구슬도 세 개나 있었다. 무슨 베어링인가 하는
거라는데, 설날에 포항제철소에 있는 삼촌이 선물로 주고 간 것이다.
생각할수록 아깝고, 아깝다. 다 주지말고 한 개만 가져올 걸….
서울은 별 것도 아니면서 괜히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것 같다.
민우는 그게 화난다. 태식이 녀석도 생각 같아선 한방이면 끝날 것
같은데, 저 혼자 까분다. 평택에서 같으면 그냥 저걸….
"여기 있었구나?"
저 혼자 생각에 빠져 나른한 볕에 졸고 있던 민우는 화들짝 놀라
앉는다. 양호선생이다. 일부러 자기를 찾았나 생각하니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린다. 선생의 손에 우유와 빵이 들렸다.
"왜 여기 혼자 나와 있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양호선생은 민우 옆 장작더미에 걸터앉으며
묻는다. 민우는 자꾸 쿵쿵 가슴이 뛴다. 그래 그게 들킬까봐 괜히
안절부절못한다.
"넌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니?"
선생은 바른손으로 치맛자락을 여미며 묻는다. 민우는 가만히
선생의 신발 코를 내려다본다. 슬리퍼 밖으로 엄지발가락이 나왔다.
민우가 전학 와서 처음 정립회관에 갈 때도 양호선생은 새로 보는
아이라며 이것저것 자꾸 물었다. 집은 어디냐, 형제는 어떻게 되느냐,
아빠는 뭐하시느냐…, 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그러다 아버지가
목사라는 말을 듣고는 더없이 반가운 투로 교회가 어디냐, 교인들은
많으냐… 하는, 정말 쓸데없는 것들을 묻고 또 물었다.
정립회관에서 어디 견학을 가거나 할 때면 양호선생이 꼭 동승을
하였다. 시립과학관이니 경복궁 같은 델 가자면 그럭저럭 손이 많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상준이 빼고는 거의 혼자 움직일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휠체어를 밀어주는 일이나 보행이 불편한 아이를
돌보는 건 곁에서 보기에도 버거운 일이다. 일일이 손을 잡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적잖이 많았던 것이다.
선생은 그렇듯 버스에 오르면 스스럼없이 민우 곁에 앉았다.
그래봐야 자꾸 쓸데없는 걸 물어서 민우는 적잖이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선생에게서 나는 향기가 싫지는 않았다. 라일락향기
같기도 하고,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향기 같기도 하고…. 그럴
때면 민우는 정신이 아찔아찔 하다. 언제 기회가 되면 한 번
물어봤으면 좋겠다. 선생한테 그럴 순 없지만, 엄마 가슴에 흠뻑
뿌려주고 실컷 안겨봤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민우야! 이거 먹어."
깜빡 잊었다는 듯 선생은 손에 든 우유와 빵을 민우에게 내민다.
선생의 손이 참 곱다.
"아뇨, 저…. 이따 도시락 먹을래요. 그리고 우유는…, 먹으면…."
행여 선생의 손과 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생각만 했는데도 또
아찔하다.
"호호, 너도 우유가 받지 않는 모양이구나. 그래도 이걸 자꾸 먹어야
뼈가 튼튼한데…. 그럼 이 빵이라도 먹어. 아니 그럼, 나랑 반씩
나눠먹자."
내밀던 빵을 거둬 봉투를 뜯고 빵을 구긴다. 선생의 가지런한
손톱이 움푹 들어가면서 빵이 잘라진다.
"야, 이거. 그리고…, 태식이가 그래도 네가 참아. 태식이가 못된
애는 아닌데, 괜히 골이 나서 저래…."
선생은 하려던 말을 감추고 빵을 베어 문다. 민우도 선생이 건넨
빵을 입에 가져가며, 태식이에 대해 선생님이 너무 모른다고
생각한다.
정립회관에 갈 때마다 태식이는 자꾸 돈을 꿔 달라고 한다. 갚지도
않을 거면서, 언제부터는 꿔달란 소리도 않고 다짜고짜 돈 있냐고
물을 때도 있다. 몇 번은 없다고 하다가 결국에는 주고 말면서,
민우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안 준다고 해서 때리거나 못살게 구는
건 아닌데도 민우는 불편한 게 싫다. 말을 않는 건 둘째치고 표나게
경계를 한다거나 뻔히 민우 차례에 끼어 들어 딴청을 부리기
일쑤다…. 생각 같으면 먼저 한 대 올려붙이고 싶지만, 그랬다간
아버지한테서 불벼락이 떨어질 거다. 밖에 나가서 절대 싸우지 말고,
행여 싸움이 나더라도 절대 때리지 말라고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한번은 평택에 있을 때, 생각지도 않게 싸움을 한 적이 있다.
친구들과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자꾸 금을 지우면서
훼방이다. 몇 번 그러지 말라고 하고 금을 새로 긋는데, 그러면
녀석이 저 혼자 서 있다 민우의 엉덩이에 부딪혀 넘어진다. 그리고는
민우가 밀었다고 우기는 거다. 같은 편인 남자아이는 덩치가
민우보다 더 작았고, 다른 두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그러니 녀석이
민우를 얕잡아 본 모양이다. 관둬, 하고 돌아서려는데 녀석이 민우의
어깨를 잡는다. 그때 민우가 녀석의 손을 뿌리치다 그의 뺨을 스친
모양이다. 오냐 잘 걸렸다는 듯이 녀석은 민우의 멱살을 잡았다.
민우는 얼결에 녀석을 밀친다는 것이 그만, 저만치 나가떨어지게
했다. 애들이 키득대고 웃었다. 다들 봤느냐는 시늉으로 아이들을
한번씩 노려보더니, 녀석은 급기야 민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니
힘없이 벌렁 자빠진 민우 위에 녀석이 올라앉아서는 사정없이 얼굴을
갈긴다. 민우는 몇 대 맞다가 그만 하라는 식으로 녀석의 어깨를
친다는 게 그만 그 애의 얼굴을 정면으로 때린 격이 되었다. 갑자기
녀석이 죽겠다고 나뒹구는데,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동네가 난리가 났다. 목사 아들이 사람 쳤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나, 코뼈가 부러졌다며 변상을 하라지
않나…. 그 애 엄마는 참 목청도 좋다. 삽시간에 동네 사람을 다 불러
세웠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한테 혼쭐나면서도 민우는 자신의 괴력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냥, 그것도 한 방 치려고 한 게 아니라 살짝 휘든
것뿐인데, 아이 얼굴이 곤죽이 되다니…. 그 날 이후 민우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주먹을 써서는 안되겠다고 저 혼자 다짐했다. 그
일 때문에 아버지가 굽실대야 했고, 교회에서 받는 한 달치 사례비가
날아갔지만, 그거보다 더 무서운 건 잘못하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니 태식이 같은 녀석은 걸려도 반 주먹도 안될 텐데… 형만
믿고 까부는 꼴이 영 마땅치 않다.
"넌 어쩔 생각이니?"
금방 우유를 마신 선생의 입가에 하얀 우유가 맺혔다.
"뭐를요?"
민우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선생은 얼른 입가를 훔치며 다시 말한다.
"교실에 들어가야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됐잖아. 그러다 정말
학년주임 선생님이 너희들 퇴학이라도 시키면 어쩌려고 그래?"
뻔히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민우도 안다. 경호도 상준이도 안다.
태식이가 씩씩거리며 퇴학? 웃기고 있네, 하면서 일장 연설을 안
했더라도 아이들은 다 눈치로 안다. 그건 절대 아이들 잘못이 아니다.
아이가 굴러 떨어졌어도 그건 지가 잘못한 거지, 누가 일부러 민
것도 아니고…. 설령 누가 밀어서 그렇게 됐다 해도 그건 그 애
일이지 왜 우리까지 이 난리야, 하는 태식이의 말이 옳다. 민우도
그게 억울하다. 그것도 남자 반이면 모를까, 왜 하필 여자
반이라니…!
"알아, 너희들 기분이 어떨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니. 선생님도
화가 좀 나지만, 일주일 정도 수업거부도 하고 그래봤으니까, 이제
너희들이 양보해야지 어쩌겠니, 안 그래? 이러다 정말 일이 커질
수도 있어…."
다 먹은 빵 봉지를 길쭉하게 접어 쪽지편지 말 듯 만지작거리며,
선생은 말을 고른다. 그런 선생의 마음씀이 고맙다. 더 말을 안 해도
알 것 같다. 민우는 그런 선생의 가지런한 손가락을 쳐다보고 있다.
"난, 사실…. 이러다 정말 너희들 상처받을까봐…. 그게 걱정이야,
민우야."
결국 선생은 안 해도 될 말을 한다. 민우는 눈길을 거두고, 거만치
발치께 기어가는 개미를 본다. 꽁지가 통통하다. 민우는 가만히
녀석을 밟는다. 발바닥 밑으로 툭 터지는 느낌이 들자 소름이 돋는다.
"상준이는 벌써부터 그냥 들어가자고 했으니까, 너만 그렇게
결정하면 될 거 같은데…. 태식이도 우리가 결정하면 따르겠다고
했으니까, 경호도 그렇게 할거야. 내가, 무슨 말하려는지 알지? 다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 괜히 그러는 거 알아. 난, 너희들 편이야.
알지?"
민우는 자꾸 웃음이 나려고 한다. 굳이 설득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 별 것도 아닌 걸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야
어른들 자유라지만,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어떻게든 설득하고
강요하는 건 참 이상하다. 자상한 척 하다 못내 윽박지르고 심지어
때려서라도 말을 듣게 하는 어른들이라니…!
마침 육 학년 십 오 반이 일층에 있으니까 너희 넷은 그리 들어가,
라며 불곰선생이 말할 때도 민우는 육 학년이 십 오 반까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게 여자 반인 건 더더욱 몰랐다. 태식이가 대뜸
싫어요, 하며 쪽팔려서 학굘 어떻게 다녀요? 하고 벌떡 일어설 때도
민우는 태식이가 왜 그러는지 몰랐다. 불곰선생도 따라 일어서서
태식이를 억지로 앉히고는 그때부터 얼레고 달래고 야단도 아니었다.
마치 태식이는 육 학년 아이들을 대신하기나 하는 것처럼 선생한테
대들었고, 선생은 조러조러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또 했다. 으르고
달래면 쉽게 끝날 줄 알았는지, 불곰선생은 더 듣기 싫다는 시늉으로
내일부터 십 오 반으로 들어가, 알았어? 하고는 저 먼저 교무실을
나가버렸다.
교무실에서 나온 아이들은 주춤주춤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데,
태식이는 또 나서서 말을 꺼낸 것이다. 우선 양호실에 가서 얘기를
하자, 이렇게 그냥 학교에 다닐 순 없다, 정 그러면 다른 학교로 모두
전학을 가자…, 고 해대면서. 그게 어느새 일주일을 다 채우고
있으니,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양호선생도 입장이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일 거다.
머쓱해서 뭐라 말을 못하고 있는 민우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선생이 먼저 일어선다. 곧 있으면 쉬는 시간이다. 물 끓는 주전자
뚜껑 마냥 달그락대듯 왁자할 게 뻔한 터라, 민우도 얼른 소변을
보고 양호실로 들어갔다.
(2)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학교를 안 갔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했다간 또 지레 눈물부터 흘릴 게
뻔하다. 민우는 옥상 난간에 기대서서 키 작은 집들 너머 저만치
우뚝 선 학교 건물을 건너다본다. 차라리 아프다고 할까?
지붕 위의 너풀대는 비닐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지붕과 서로 키가 맞지 않은 벽면은 긴 그늘로 위태롭게
누웠다. 베니어판으로 얼기설기 덧댄 아버지의 작품이다. 민우는 자꾸
눈물이 날 것 같다. 개척교회가 처음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참 바보
같다. 가족이 살 수 있는 변변한 집이라도 마련했어야 옳다.
예배당에서 새우잠을 자며 겨울을 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인댁의
묵인 하에 가건물로 지은 것이다. 비록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려야
간신히 잠들 수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매일 밤 감사 기도를 한다.
민우는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데, 감사하다고 하는 아버지가
거짓말쟁이 같다.
민우는 종 탑 아래에 오줌을 눈다. 저만치 배수구멍이 있지만, 괜히
심통이다. 옥상에는 또 변소가 없다. 아래층 주인댁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니면 참았다가 학교에 가서 볼일을 보던가…. 그래서
아버지는 변소도 만들었다. 커다란 욕조 통을 어디서 주워 왔는지, 그
위에 널빤지를 두 개 올렸다. 그리고 네 귀퉁이에 나무를 세워
커다란 포대자루를 씌웠다. 그게 다다. 똥통이 절반쯤 차면 길 건너
공터에 내다 비운다. 교인들은 알까? 엄마는 새벽에 몰래 아버지와
그것을 비우고 온다. 민우는 몇 번 그런 엄마의 모습을 훔쳐봤다. 될
수 있으면 오줌은 배수구멍에 싸야 한다. 똥보다 오줌이 무겁다.
출렁대며 쏟아지기 일쑤다. 꽁꽁 언 똥을 일일이 깨서 버리기도 한다.
누나와 동생, 엄마와 아버지는 그래서 학교까지 뛰곤 한다.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버지가 일어난 모양이다. 새벽 예배를
마치고 한 시간 더 눈을 붙였다가 민우가 학교에 갈 때쯤 일어난다.
오늘은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다.
민우는 얼른 계단을 내려온다. 골목이 휑하다. 학교에서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그래도 급할 거 없다. 개구멍으로 해서
양호실로 들어가면 된다. 오늘까지다. 오늘까지만 봐 준다고
불곰선생이 말했다. 월요일부터는 정상적으로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아니면 태식이 말대로 전학을 가던가…, 퇴학이다.
양호실에 들어서자 모두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민우를 쳐다본다.
민우는 양호선생께 꾸벅 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가 앉는다. 태식이는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경호와 함께 만화책을 보고 있다. 애써 눈길을
피하는 상준이. 모두 못 본 체다.
민우도 모르는 척, 건성으로 교과서를 꺼낸다. 다들 민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다. 어차피 저들은 자기 의견을 이미 낸 상태니까,
민우만 답을 하면 된다. 하지만 민우는 어제랑 똑같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늦었네?"
양호선생이 아는 체다.
"……."
"이따가 너희들 다 교무실로 오래."
괜히 미안한 듯, 선생의 목소리가 어줍다.
"불곰이요?"
태식이는 또, 어흥이다. 선생은 못 들은 척 도로 고개를 숙여 제
일을 한다. 아이들이 민우를 쳐다본다. 뭔가 이제 결정을 내리라는
거다. 민우도 고개를 숙이며 딴청이다. 들어간다 그럴까? 아니면 진짜
좀더 버텨볼까?
엄마는 아직 모른다. 학교에서도 이 일은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는
눈치다. 처음엔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야단이더니, 아이들이
따라주기만 하면 그냥 통보만 하려는가 보다. 민우는 자꾸 조바심이
난다. 행여 엄마가 알까봐, 수업 안 들어가고 일주일째 양호실에
있었던 걸 알까봐… 민우는 걱정이다.
그렇듯 어쩌지 못하고 또 주춤대고 있는데, 양호실 문이 삐쭉
열린다.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문가 쪽을 돌아본다. 십 오 반
담임선생이다. 단정하니 검은색투피스 양장을 받쳐입고 서 있다.
들어오진 않고, 문가에 서서 양호선생을 부르는 눈치다. 양호선생이
얼른 일어나 문가로 간다. 둘은 단짝이다. 교실도 가깝고, 나이도
비슷하다. 더욱이, 둘 다 노처녀다. 문을 닫고는 저들끼리 속닥인다.
경호가 날름 창가에 매달려 엿듣는다. 태식이도 어슬렁어슬렁 창가
쪽으로 간다. 민우도 궁금하다. 얼마동안을 그러고 있다. 문이 열리고
십 오 반 선생이 들어온다. 양호선생은 보이지 않는다. 선생은
양호선생 자리에서 의자를 끌어다 아이들 앞에 앉는다. 그리고,
치맛단을 곱게 정리하며 고개를 든다.
"너도 똑바로 앉아 봐."
선생은 태식이를 향해 힘없이 말하곤 잠시 망설이는 눈치다.
태식이는 괜히 삐딱하게 군다. 엉덩이만 들썩일 뿐,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너희들 내 말 잘 들어."
선생은 표나지 않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오늘 아침 회의 때… 너희들 문제로 전체회의가 있었어. 어떻게
됐냐고 교장선생님이 물으셨고, 그리곤 막 역정을 내셨어. 여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너희들도 알겠지만, 학교 입장도 난처해. 그
아이가… 어젯밤에 죽었대. 뇌출혈이었는데……."
선생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민우는 가슴이
벌렁거려 숨이 다 막힐 것 같다. 죽다니…! 죽음을 이처럼 코앞에서
느끼기는 처음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그 계집아이 얼굴이 선명한데,
정립회관에 갈 땐 뭘 그리 바리바리 싸와 저 혼자 주전부리하더니,
한 번도 말은 안 해 봤지만, 한쪽 목발을 짚으며 뒤뚱대고 걷는 꼴이
어찌나 보기 싫던지……. 그런 애가, 죽다니!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며 선생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너희들… 기분은 알아. 나도 처음에 너희들이 우리 반으로 온다
그랬을 때, 조금 당황했으니까. 다 여자 애들인데, 그런 델 너희 넷만
들어온다니까… 그 기분이 어떨까, 이해는 돼. 하지만 얘들아…."
선생의 눈가에 자꾸 눈물이 맺힌다. 그러다 또 주르르 흐를 것만
같아 민우는 불안하다. 눈물은 괜히 슬프다. 엄마의 것은
물론이지만……. 모든 눈물은 다 슬프다.
"교장선생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 너희들 때문은 아니지만, 너희들이
자꾸 이러면 안될 거 같아. 당장 부모님들한테 알려서라도 어떤
조치를 내리라고 야단이셔."
쿵, 하고 민우는 가슴이 철렁한다.
"응? 그러니까, 같이 들어가자. 솔직히 우리 반 애들도 처음엔
싫다고 난리였는데, 내가 알아듣게 다 얘기했어. 오늘 아침에도
너희들 들어오게 한다니까, 애들도 다들 좋다고 했어. 그러니까
너희들도 못 이기는 척 하고, 응? 내 말대로 하자, 응?"
선생은 자꾸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흘린다. 민우는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잘 됐다. 그런데 태식이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대뜸 뚱하니
말을 받는다.
"싫어요. 난, 그럼… 전학 갈 거예요. 어떻게 여자 애들만 있는 델,
거길 들어가요? 우리만 어떻게 그래요? 창피하게……."
선생은 난감한 얼굴로 아이들을 돌아본다. 태식이 말이 틀리지는
않다. 그래서 선생도 이리 간곡하다. 윽박지르지 않고 이해를 구하고
있는 거다.
"알아. 너희들 마음, 아는데… 그럼 어쩌겠니? 정말 전학 갈
생각이니? 그럴 수도 없는 일이잖아? 응?"
선생이 또 울 것 같다.
"그럼, 퇴학시켜요. 난 죽어도 여자 반엔 들어가지 않을 테니깐!"
태식이는 자꾸 엇나간다. 경호도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연신
태식이 눈치를 살필 뿐 별다른 대꾸가 없다.
"얘들아……."
선생은 그만 눈물을 흘린다. 주르르 타고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두고 띄엄띄엄 말을 흘린다.
"너희가… 어른들을 이해해 줘… 이럴 수밖에 없는… 학교를 이해해
줘… 학교 입장에서도…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응?"
아이들을 대신해서 선생이 운다. 민우는 안다. 엄마도 늘 그랬다.
"치, 그럼 따로 남자 반을 하나 만들어 줘요. 그럼 그 반으로 들어갈
테니까. 왜 우리더러만 이해하라 그러는 거예요? 다들. 먼저 우리를
좀 이해하면 안돼요? 그 애가 죽은 건 안됐지만, 그게 우리
잘못이에요?"
"……."
눈물을 훔치고 있는 선생에게 태식이는 참 잔인하다.
"아니면, 우리를 그냥 도로 전에처럼 각자 자기 반으로 들어가게 해
주던가요. 저기… 상준이만 십 오 반에 들어가라 그래요, 그럼. 쟨
일층이 편할 테니까."
태식이는 저 혼자 잘난 줄 안다. 민우는 얼른 상준이를 본다. 상준이
얼굴이 빨개졌다. 금세 울 것 같다. 민우는 화가 난다. 저 혼자
떠드는 태식이가 밉다. 그런 녀석한테 쩔쩔매는 선생도 바보 같다.
민우도 뭔가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은데, 부들부들 떨리기만 한다.
목구멍으로 말이 나오질 않는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눈가를 훔치며 태식이를 본다. 할 말을 찾는 모양이다.
태식이는 저 혼자 또 떠든다.
"우리끼린 안 들어가기로 결정했어요. 도로 원래 반으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전학을 가든, 퇴학을 당하든, 여자 반으로는 안 들어가기로
결정했어요."
선생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벌써 그러기로 했다는데, 뭐라 더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선생이 거든다.
"그건 안 돼. 너희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정 그러면, 부모님
모시고 와야 해."
민우는 또 가슴이 뛴다. 엄마는 모르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요, 그럼. 우리 엄마도 이런 경우는 없대요. 학교가 뭐
이러냐고, 막 뭐라 그랬어요. 치."
태식이 자식, 자꾸 또 저 혼자 나선다. 경호도 가만있고, 상준이도
가만있는데, 자꾸 저 혼자 설친다. 선생은 더 난감한 표정이다. 마른
눈가를 한번 더 훔치고는 손수건을 접는 선생의 손길을 보다, 민우는
마음이 조급해진다. 선생이 그냥 일어설 것 같아 얼른 말을 한다.
"난… 아냐. 난, 그냥… 들어갈래."
얼결에 말을 하고도, 자기 말이 비굴해 민우는 저 혼자 목이 멘다.
선생은 민우를 본다. 아이들도 민우를 본다. 민우도 태식이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싶다. 그런데 자꾸 울먹이기만 할 뿐,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뭐야?"
태식이 목소리가 곱지 않다. 민우는 가만히 고개를 들고 떠듬떠듬
말을 한다.
"난, 십 오 반에, 들어가겠어. 너나, 전학을 가든, 퇴학을 맞든,
맘대로 해."
침대에서 벌떡 일어선 태식이가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얼굴이
험상궂다. 선생이 얼른 껴든다.
"얘, 넌 앉아. 왜 그러니? 너 혼자 생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다른 애들 의견도 묻고……."
"어제 다 끝난 얘기란 말예요, 뭘!"
태식이가 얼른 선생의 말을 자르며 다시 대들 듯 말한다. 민우는
화가 난다.
"웃기지 마. 이 대 이였어. 난 이야기 안 했어. 상준이도 들어간다
그랬고, 양호선생님도 그렇게 하자 그랬어."
"지랄하고 있네, 양호선생님은 빼야지? 양호선생이 십 오 반에
들어가냐?"
태식이는 또 억지다. 선생이 있는 자리에서 막 말까지 한다.
"그건 아니지. 우리가 다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 넷이 투표하면
짝수이니까, 양호선생님도 껴주자 그랬잖아?"
늘 말없이 가만있던 상준이가 거든다.
"그건……."
그러니 태식이도 할 말이 없다. 잠시 두리번거리다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 도로 앉는다. 경호는 가만히 있다. 태식이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얘들아, 그러지 말고, 응? 내 말대로 하자. 지금 나랑 같이 교실로
들어가자, 응? 너희들 책상도 벌써 다 갖다놨어. 애들도 너희들
기다리고 있고. 안 그러면 정말, 너희들 교장실에 가야 해. 아니면,
당장 부모님을 부를지도 몰라, 응? 선생님도 마음이 너무 아파, 응?
얘들아!"
응? 응? 자꾸 묻는 선생이 고맙다.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선생
앞에서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본다. 민우도 괜히 어색하다.
"자, 얼른, 응? 가방 싸, 응?"
선생은 휠체어 옆에 놓인 상준이의 가방을 집어주며, 서둔다.
내친김에 눈물도 닦지 않고 서둔다. 민우도 그런 선생을 보다 꺼냈던
책을 도로 가방에 넣는다. 곁에 앉았던 경호도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다. 태식이만 뚱하다. 선생은 상준이 가방을 무릎에 올려주고,
태식이 것도 대신 싼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린 만화책 몇 권을
태식이의 가방에 넣는다. 태식이는 못 본 척 하며 삐딱하게 앉아
있다.
"자, 자, 어른 가자, 응?"
선생은 상준이의 휠체어를 밀며 양호실을 먼저 나선다. 아이 셋은
잠시 망설인다. 민우가 얼른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경호도 주저하다
따라한다. 태식이만 뚱하니 서 있다.
일 교시가 다 끝나지 않아 복도는 조용하다. 자료실 옆으로 십 오
반 문패가 보인다. 선생이 똑똑 하고 노크를 한다. 양호선생이 문을
연다. 여자아이들이 웅성대다 박수를 친다. 정말 창피하다. 민우는
벌써 얼굴이 화끈댄다. 경호도 엉거주춤하다. 태식이는 저만치
따라오다 우뚝 선다.
"어휴, 어서 와. 내가 담임은 아니지만, 환영한다 얘들아!"
양호선생이 장난 섞인 목소리로 호들갑이다. 여자아이들은 까르르
웃는다. 계속 박수를 치며 웃는다. 이러다 전교생 애들이 다 눈치
채겠다. 절로 창피해 죽겠다. 담임선생이 상준이를 밀고 교탁으로 가
서자, 양호선생이 얼른 민우와 경호의 손을 잡아끈다. 경호가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 한다. 태식이는 아직 문 밖에 있다. 담임선생이
얼른 달려가 태식이 손을 잡는다. 태식이는 몇 번 뒷걸음질이더니,
깔깔대며 웃는 여자 애들 웃음소리에 뒤뚱거리며 들어온다. 모두 다
들어오자 아이들 박수소리가 더 커졌다. 양호선생은 담임선생에게
뭔가 눈짓을 하더니, 배시시 웃고 나간다. 참 쑥스럽다.
"자, 조용…! 드디어 네 명의 왕자들이 입장했네? 다들, 잘 지낼 수
있지?"
"하하, 호호. 네에."
여자 애들 목청도 좋다. 아주 전교생이 다 알아야 한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육십 삼 명의 여자아이들이 웃고 있다.
"자, 왕자님들이 너무 쑥스러워하니까, 서로 소개하는 건 이따 파티
때 하기로 하고… 우선, 자리에 앉자."
파티? 갈수록 태산이다. 또 자리는 이게 뭐야? 교탁을 중심으로
창가 쪽으로 선생 책상이 있다면, 그 앞에 길쭉하니 책상이 놓였다.
그것을 마주하고 들어오던 문가 쪽에 또 하나가 놓였다. 그러니까
다른 여자아이들 책상은 나란히 교탁과 칠판을 향해 있다면, 두
책상은 그렇듯 서로 마주보며 떨어져 있다. 교실 안을 모두 볼 수
있는 자리다.
상준이와 민우가 선생 앞의 책상에 앉고, 경호와 태식이가 문가
쪽의 책상에 앉았다. 여자 애들이 자꾸 키득대며 웃는다. 선생은
앞으로 어떻게 어떻게 지내라고 하면서, 또 한 차례 당부다. 들어와도
다음 주 월요일에나 들어올 줄 알았는데, 너무 얼결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이 없다. 선생의 눈물은 이처럼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엄마처럼, 눈물은 흘리는 것만으로 모든 갈등을 평정한다.
조금 있자니 쉬는 시간이다. 여자아이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애써
외면이다. 민우와 상준이는 자리에서 꼼짝 않는다. 언제 알았는지,
남자아이들이 기웃댄다. 태식이와 경호가 밖으로 나갔다. 뭐라고
뭐라고 저들끼리 소곤댄다. 태식이가 경호 뒤통수를 한 대 때리는 것
같다. 열린 문틈으로 다 보인다. 가끔씩 태식이가 민우를 노려본다.
민우는 움찔한다. 창피하고, 서럽고, 화가 나서 못 살겠다. 걸리기만
해, 민우는 저 혼자 주먹을 쥔다. 상준이는 다음 시간 교과서가
없다며 투덜댄다.
수업종이 울리자,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태식이와 경호도
쭈뼛대다 들어와 앉는다.
사회시간이다. 책이 없다. 그저 빈 공책만 꺼내놓고 멀뚱하니 앉아
있다. 담임선생이 늦는다. 덩치 큰 여자 애가 다른 애들한테 사회
책을 빌려 민우 앞으로 온다. 그리고 민우와 상준이 책상에 두 권,
태식이와 경호 책상에 두 권씩 놓고 간다. 저들은 같이 볼 생각인가
보다. 여기저기서 쑤군대며 떠들자 아까 그 여자아이가 조용히
하라고 소리친다. 반장인가 보다. 꽤 오랜 시간을 그냥 그러고 있다.
소곤소곤 여자아이들이 떠든다.
반장 아이가 나갔다 들어오더니, 자기가 교탁에 선다. 그리고 몇
쪽을 펴라 하고는 한 명씩 읽게 한다. 겨우 일주일이었는데 교과서가
새삼 낯설다. 민우는 여자아이가 읽는 부분을 눈으로 따라 읽다
태식이를 건너다본다. 교과서는 펴지도 않고 양호실에서 읽던
만화책을 보고 있다. 경호도 마찬가지다. 괜히 심통인 거 안다.
민우도 어줍긴 마찬가지다. 양호실에 도로 갔으면 좋겠다. 그럼 너희
넷만 내가 담임할까? 하고 언제 양호선생이 우스갯소리를 한 것처럼,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민우는 자꾸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엄마가 모르고 넘어가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러고 일 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정말 까마득하다.
옆에 앉은 상준이는 열심이다. 결코 한눈을 팔지 않는다.
결국 이 교시는 자습만 했다. 담임은 삼 교시도 반이나 넘긴
다음에야 들어왔다. 회의가 길어졌고, 교장선생님과 그 아이 병원에
갔었다고 한다. 눈이 많이 부었다. 아이들은 모두 침울하다. 까불 듯
삐딱하던 태식이도 얌전하다. 선생이 또 운다.
"우리 모두, 삼 학년 혜정이를 위해 잠시 기도하자. 하느님께,
혜정이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우리 다 같이
기도하자."
그 애 이름이 혜정이인가 보다. 선생은 천주교신자인가 보다. 뭔가를
만지작거리는데, 그게 묵주라는 걸 알 수 있다. 민우는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창피해 죽겠다고, 이게 뭐냐고
따진다. 그 애를 위한 기도는 한 마디도 안 나온다. 괜히 서럽고,
야속하다. 그래서 절 위해서만 기도한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아이 몇이 운다. 선생은 아까부터 울고 있다. 민우도
눈물이 나지만, 그 애 때문이 아니다.
선생은 또 자습을 하라고 하고 책상에 앉는다.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선생에게서 비누냄새가 난다. 상준이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민우는 선생한테서 나는 냄새 때문에 기분이 이상하다.
슬픔에 젖은 눈빛으로 쪽 성경을 읽는 선생을 힐끔거리며, 선생의
냄새를 맡는다. 민우는 그런 자신이 한 몇 개는 있어야 할 것 같다.
슬퍼해야 할 것 같은 자신과 창피해 미칠 것 같은 자신, 선생의
향기를 맡으며 이상한 느낌이 드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났는데도 선생은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있다. 상준이가 몸을 뒤채더니, 화장실에 가고 싶단다. 민우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상준이의 휠체어를 끌어온다. 저 혼자
책상을 짚고 일어서는 상준이의 팔이 부들부들 떤다. 그제야 선생도
고개를 들고 뭐 거들 게 없나 살핀다. 상준이는 몸을 비틀 듯
휠체어에 앉아 힘없는 다리를 추스른다. 여자아이 몇이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 민우는 상준이를 끌고 화장실에 간다. 남자 화장실은
또 니은 자로 된 복도 저 끝을 돌아야 한다. 양호실 곁에 화장실이
있긴 한데, 그건 여자 화장실이다.
"넌, 어때?"
괜히 어색한지 상준이가 묻는다.
"뭐가?"
민우는 괜히 골난 사람 같다.
"십 오 반에 들어간 거 말야."
상준이가 다시 묻는다.
"뭐가, 어때. 어쩔 수 없지."
그런 거 아닌데, 민우는 자꾸 화난 사람처럼 말한다.
"괜찮을까? 태식이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난, 너도 들어가자 그럴
줄 알았어."
화장실까지 가는 게 괜히 미안한지 평소에 말이 없는 상준이가 자꾸
말을 한다.
"무섭지 않아. 태식이가 뭐라 그러던 상관없어."
민우는 어쨌든 선생 앞에서 저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말한 게 내내
비굴한 것 같아 걸린다. 이렇다 저렇다 제대로 의견도 못 내던
주제에 마치 알랑방귀 뀌듯 들어가겠다고 나섰던 게 걸린다.
화장실은 만원이다. 애들로 와글대는 통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상준이는 요령 좋게 휠체어를 세우더니, 부들부들 떨며
변기를 붙들고 선다. 흐느적거리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다.
민우가 곁에 가 선다. 한 팔로는 민우의 목을 감듯 기대고 서서 다른
손으로 자크를 내리고 오줌을 눈다. 비틀비틀 위태롭다. 아닌 게 아니라
민우의 발등에 오줌이 튄다. 하지만 민우는 움직일 수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휘청거려 둘 다 털 푸덕 주저앉을 것 같다. 부르르
몸을 떨며 자크를 올리고, 다시 부들부들 떨며 휠체어에 앉는 상준이.
아이 몇이 구경하고 섰다.
"뭘 봐?"
민우는 괜히 화가 난다. 상준이를 도로 휠체어에 앉히고 수도꼭지를
틀어 발등에 튄 오줌을 씻어낸다. 금세 양말이 젖었다. 상준이는 그런
민우를 가만히 보고 있다. 민우는 손을 마저 씻고 상준이 휠체어를
밀고 나온다.
"미안해."
"됐어."
"……."
"……."
"원기소 통에 봐도 되는데……."
상준이는 미안해서 자꾸 말을 한다. 민우는 그런 상준이 마음을
안다. 알 것 같다.
"원기소 통?"
그래서 조금 씩씩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이건 상준이 잘못이 아니다.
"응."
"그게 뭐야?"
"아니… 그냥… 남자 반이면, 원기소 통에다 봐도 되거든.
그런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원기소 통은 뭐고, 뭘 본다는 건지……. 괜히
자기가 심통 난 목소리로 말해 상준이가 저런다고 생각하자, 민우는
미안하다.
"원기소? 그거 영양제 아냐?"
"응."
"근데…?"
"아니… 남자애들만 있으면, 거기다 봐도 되는데…."
"아…."
민우는 그제야 상준이 말을 알아듣겠다.
"앞으론 그냥 봐, 뭐 어때."
"에이, 어떻게 그래……. 창피하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학교나 어른들이 이런 걸 알까? 태식이 말처럼, 어른들이나
학교에서 어떻게 이런 걸 이해할 수 있을까? 민우는 가슴이
답답하다.
저만치, 헐레벌떡 뛰어들어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복도가 참 길다.
민우는 니은 자로 꺾이는 복도를 돌아서다, 문득 햇살 고운
운동장을 바라본다. 금세 눈부시다. 야, 너, 어디 가? 하며 상준이가
놀라 소리친다. 하얗게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운동장으로 민우는
상준이를 밀고 나간다. 운동장에는 네 줄이 선명하게 그어지고, 그
사이로 한 아이의 발자국이 찍힌다.
끝.
출처 : 비공개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0) | 2016.10.27 |
---|---|
[스크랩] 모두 잠들면 나무는 거꾸로 서서 걷는다 (0) | 2006.08.06 |
[스크랩] [소설] 하얀거짓말 (0) | 2006.08.06 |
[스크랩] 가을 앞에서 (0) | 2006.08.06 |
[스크랩] 산책 (0) | 2006.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