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전봉석 2016. 10. 30. 07:31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잠언 30:15-16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족한 줄 알고 산다는 건 값진 복이다. 값으로 산 자가 된 삶은 이미 충분한 것이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그러므로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데 은혜가 있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19).” 이 말이 전에는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데’ 답답하였더니, 이제는 ‘성령의 전, 곧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서 깊은 안도가 나온다. 곧 족한 줄 안다는 것은 ‘이만하면 됐어’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하였다’는 넉넉한 감사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와 문제의 연결점은 ‘족하다 하지 못하는, 허기’ 때문이었다. 에덴동산이라는 가장 좋은 환경을 조성하셨는데도 사람은 더 나은 무엇을 바랐던 것이다. 늘 우리 마음에 들끓는 감정은 그것이었다. ‘더 나은 무엇.’ 이는 호기심이고, 혹시나 하는 기대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바람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내가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저마다 옳다고 여기는 그 무엇의 정체는 모두 같다.

 

어느 보도를 읽다 최씨 모녀의 헌금봉투에 적힌 기도제목이 낯 뜨거웠다. 어쩌면 평소 우리가 바라고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뚜렷하게 하나님의 이름이 불릴 때, 나는 민망하고 송구하여 가슴이 철렁하였다.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고 있었다. 세간의 우스갯소리로 회자되는 데 화가 났다. 현실에서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야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 서로 공통된 것일 수는 있겠으나, 문득 ‘그 정도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 같아 참담하였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믿는다고 하는 삶이 너무 지나치게 작위적인 행위가 된 것은 아닐까? 그와 같은 기도를 들어주셔도, 들어주지 않으셔도 욕을 먹는, 우리는 너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게 아닐까? 저마다 손가락질을 하지만 저들이 나였다. 나는 안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나의 기도가 저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참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 것일까?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기도가 온통 내 것을 구할 때 나는 모두를 잃는 것이다. 그런데 주와 그 복음의 말씀을 위한 것이라면 전부를 얻는다. 아, 이 혼탁한 혼합주의와 세속주의적인 국면을 어쩌면 좋을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렘 7:30-31).”

 

아내는 친정 쪽 동대문 집에 페인트칠을 해주기 위해 갔다. 아이는 못 올 것 같다더니 제멋대로 두어 시간이나 앞서서 왔다. 아이의 산만함에 고개를 저었다. 뭘 어찌해야 할지. 아이의 유아적인 행동은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었다. 봉사점수를 받아주는 엄마의 사랑은 왜곡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다 그래요!’ 하는 아이의 반응은 간단하였다. 어떤 문제의식도 없었다. 뭐라 이르면 커다란 벽에 부딪치는 것인데 그게 바로 ‘다 그래요’였다.

 

다 그렇다는 건 거기에 있어서다. 네가 그래서 네 곁에 그런 사람만 모이고 보이고 다행이라 여기는 거다. 다 그래도 분명히 안 그런 사람도 있다. 설령 다 그래도 넌 안 그랬으면 좋겠다. 하며 어떤 말을 해보려 해도 아이가 가지고 있는 ‘다 그래요’는 철옹성 같았다. 가끔은 왜 하나님이 내버려두심을 강구하였는지 알 것 같다. 기어이 해봐야 안다면 해보게 하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었다. 정말 어려운 게, 자기아집이었다. 아이엄마에게 말하기를 멈춘 것도 그래서이다. 나는 그저 마음에 담아 기도할 뿐이다. 이 아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그게 또 나였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이 늘 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당신이 그라!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그 앞에서 변명으로 일관하며 ‘다 그래요.’할 것인가, 아니면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13).”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온 나라가 어지러운 까닭도 변명과 은폐와 거짓된 옹호와 잘못된 신의 때문이 아닐까? 아니 내 안에 늘 들끓는 어지러운 마음의 근원도 결국 그와 다르지 않았다.

 

이 뱀이! 이 여자가! 이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이! 하는 식으로 우리의 변명은 기어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총구를 밖으로 겨누든 안으로 겨누든 이 모두는 결국 자기 죄를 은닉하려는 사탄의 성질을 닮았다. ‘다 그래요.’ 하는 것도 결국은 ‘너 때문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엄마가요, 아이가요, 하는 식의 저울질도 말이다. “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냐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렘 5:19).”

 

두려운 것은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이 힘을 얻고, 나약한 자만이 신을 찾는다는 철학적인 관점이 설득력을 갖는다. 결국 안 믿는 자는 자신이 무신론인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나는 속상한 것이 그로 인해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믿는 자의 눈으로도 민망한데 안 믿는 자의 눈에는 얼마나 같잖아 보일까? 이는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9:14).” 곧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13:10).”

 

속상하고 답답하다가도 이 모든 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새 희망을 본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 하는 따위의 감상적인 생각은 안 믿는 자들의 구호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5-16).”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는 수밖에. 어떤 기준과 잣대로 누구를 나쁘다 하고 누구를 덜 나쁘다 할 것인가.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 주의 긍휼하심이 우리의 어리석은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곧 우리의 행위로가 아닌 부르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11).” 고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다.

 

하나님이 어찌 하시려는가, 그 되어지는 과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하는 기도가 드려지기를. 이에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8).” 그것은 이제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그러므로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32).”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물으시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 곧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2).”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7).” 하여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8).”

 

이에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