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잠언 1:31-33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
시편 58:1-2
참으로 가관이다. 알았다면 방조요 묵인이며, 몰랐다면 무능이요 무책임한 게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사람이니까, 본래 사람이란 악을 도모하는 법이니까, 싶은 마음에 치를 떨며 나를 돌아보게 된다. 뭐라 설왕설래하며 말을 거들 생각은 없지만 무서운 일이다.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잠 1:27-28).”
결국은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는다. 자기 꾀에 배부를 것이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인다.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오직 주의 말씀을 듣는 이는 평안히 산다. 저에게는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다.’ 오늘 잠언의 말씀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 땅의 원리를 짐작하게 하신다. 그 끝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데 두려움이 가중되는 것이다.
이에 다윗의 진언을 들어보자.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시 58:1-2).” 이는 잠시 잠깐 있을 이 땅에서의 복락을 쫓기 때문이겠다. 자기가 어찌 해보려는 동안은 별 수 없는 일이다. 이를 통찰하게 하는 것이 말씀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이것은 우리의 한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이기도 하다. ‘다 잘 될 거야’ 하는 싸구려 낙관론자로 살든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는 안일한 운명론자가 되든지, ‘한 날의 수고로 족하다’는 평이한 현실론자로 머물든지, 어차피 내일은 주의 것이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10).” 어지러운 세상에서 주의 주관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이 우선이겠다.
아무리 어떠어떠해도 우리의 삶은 보장되어 있다는 것.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삼하 23:5).” 그러므로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결코 주의 손에서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이보다 더 값진 사실이 있을까? 나의 한 날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는 점점 줄어들고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확장되어가기를. 여러 모양의 힘든 현실이 도리어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는 데 있어 원동력이 되어준다는 사실.
이런저런 내 속엣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묵상을 글로 써오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행여 나의 이야기가 말씀을 능가하지 않기를, 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데 있어 말씀을 인용하고 있지 않기를. 설교에서도 가급적 예화를 빼고, 어디 말을 해야 할 때도 내 이야기에는 입을 다물고 말씀을 증거하는 데는 열심을 다하기를. 말과 마음은 참으로 간사한 것이어서 또르르 흘린 눈물이 금세 말라서 빳빳하게 피부를 당기듯이 말이 되어질 때는 주의해야 한다. 마음이 동요될 때도 멈춰야 한다. 주의하고 멈출 수 있는 길은 말씀 위에 앉는 것이다.
묵상 글이 구구절절 나의 푸념이 되지 않을까 조심한다.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나의 신조가 앞설까 두렵다. 기도가 중언부언될까 돌아본다. 그것으로 누구에게 평가되는 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동조하고 동의하고 감동한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다. 늘어놓은 나의 말이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물론 남을 걸려 넘어뜨리는 게 될 수 있다. 행여 나의 신조가 하나님을 가리는 데 사용될 것이 뻔하다.
내가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으로 주어진 구원이다. 행여 간증에만 집중되어 말씀보다 감동적일 수 있어 주의한다. 좀 이상한 논리 같지만 요즘은 책을 고를 때 말씀이 많이 붙들고 있는 책을 찾는다. 늘어놓은 누구의 설교나 간증에서 감동하는 게 아니라 이로써 말씀을 더욱 깊이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이 잘 쓴 글이 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는 주를 바라는 데 우선하고, 읽혀질 때는 말씀만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의 설교면 족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삶이다. 삶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내주 임재하심이 이야기 되었으면 좋겠다.
신기한 건 서로가 닮았다. 물에 비치듯 서로가 마주친다.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잠 27:19).”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데 놀랍다. 동일한 내적체험을 가지고 있어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기뻐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이 땅의 삶으로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온전히 주를 바람이다. 한데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별 수 없는 것이기도 하여,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은 맥을 못 추고, 연일 터져 나오는 비리와 추문에 말문이 막힐 따름이지만,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 12:25).”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 앞에 설 수 있기를. 누구를 두둔하고 또는 비난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로써 나를 돌아보며 저들과 다르지 않은 데서 주의 용서하심을 구한다.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아니고는 어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나는 내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주목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하는 말씀에서 기인한다. 요즘 늘 붙들고 서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말씀처럼. 오직 주만이 나의 의가 되시기를. 나의 체험을 우선하지 않고, 나의 느낌이 앞서지 않으며, 행여 감정에 이끌려 주의 이름을 도모하는 일이 없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공연히 나를 주목하게 할까봐. 내 말이 더 크게 들릴까봐. 그래서 얻는 부흥이란 게 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으로 불리까봐.
오늘 이 땅을 어지럽히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마치 남의 일로 끝날까봐. 그래서 두렵다. 유야무야 하나님의 정의는 상관도 없이 또 다른 은폐와 방조와 묵인으로 도로 ‘카펫 밑에 밀어두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여서 말이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 유일하게 모세의 시로 수록되어 있는 저의 기도를 묵상하였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2).” 이 모든 일들 이전부터 하나님이셨다.
거듭되는 죄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3-4).” 그 화려했던 날도 고작 제 생을 다하기 전에 들춰졌을 뿐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5).” 이와 같이 덧없음에 대하여,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6).” 곧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7).”
방자하여 그릇행하나,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8-9).” 순식간이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아!
어찌 나의 이해로 알까.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1-12).”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사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구할 수 있는 마음이 복되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13).” 그리하여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14).”
아멘. 주가 아니시면 이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15).” 주어진 날에 주 앞에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평화였다. 주의 일을 바로 알고 온전히 살펴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16).” 또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7).”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기도를 되뇌며...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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