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잠언 4:6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편 91:1-3
어떤 어려움이 느닷없이 닥쳤을 때에야 비로소 안다. 좋을 때야, 평안할 때야 구분할 수 없었으나, 고난은 불순물을 제거한다. 우리 안에 이는 나름의 정당성을 뜯어낸다. 들러붙은 이론과 상식을 긁어낸다. 신념과 아집이 깨진다. 당위성의 소용돌이에서 잠잠해진다. 아이에게 아침에 썼던 묵상글을 보냈다. 긴 내용의 아이 글에 한참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다음 내용을 다시 보냈다.
- 나는 내가 많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령 몸이 너무 아프거나, 어떤 문제로 너무 힘들 때) 이를 시간 단위로 이해하니까 더 더디고 억울하고 힘들다는 걸 알았어. 시간은 ‘영원’ 앞에서 7년이나 70년이나 7만년이나 별로 다를 게 없거든. 그저 ‘잠시’일 뿐이잖아. 순간 그럴 거 없다는 거지. 이를 공간 단위로 이해하면 어떠하든,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세계고, 궁극적으로 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거할 거라는 거야. 돌아보면 ‘그 때, 그 일들’이 모두 시간의 단위보다 공간의 의미로 다가오면서 더 가벼워지는 것과 같아.
-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한 것을 그런 의미로 이해해. 그럼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통해 영원이란 공간이 더 도드라지고 확장되는 것이구나.’ 하는 데 집중하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바울 사도도,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곧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 5:3-4).”고 했던 것이고.
병든 사람에게 뭐라 일러 말씀으로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전에도 죽음을 목전에 둔 누군가와 카톡을 하고 대화를 할 때, 그만큼 조심스러우면서도 어려웠던 일이다. 행여 내 말이 건성으로 들리지 않을까 하여. 자칫 말씀이 빤한 내용으로 읽혀지지나 않을까 하여. 아니, 나의 마음과 말 한 마디가 공연히 위로를 더한답시고 어설프면 어쩌나 하고.
오전 열한 시에 오기로 했던 아이는 열두 시를 훌쩍 넘겨서야 문자를 했다. 오후에라도 갈까, 하는 것인데 수업이 있어 주일에 보자고 하였다. 오후에 수업을 와야 할 아이는 또 아무 연락도 주지 않아서 뒤늦게 전화를 했더니 못 간다고 제 엄마에게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두 시 반에 아내를 다시 불러 성경공부를 하였다. 요즘은 무책임함과 무기력함이 마치 전염병 같다. 약속이란 게 별 소용이 없다. 갈게요, 한 게 와야 오는 게 되었고. 할 게요, 한 게 해야 하는가보다 하는 일이 되었다. 누구만이 아니라 죄다 그러니 이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정도이다.
덕분에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느라 새삼 고통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었다. 고난은 우리의 찌꺼기를 제거한다. 생각보다 엄청난 일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고난을 통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바울 사도는 이를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것이 환경에 의한 게 아니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일은 곧 은혜가 들어가는 일이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고난이 우리로 도달하게 하는 경지는 소망이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미 충만하였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곧 우리가 어떤 자격이나 조건에 의한 게 아니었음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바로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살았다. 살아서 누릴 영생의 소망을 알게 하기 위하여, 오늘의 고난은 우리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난을 두시는가, 하는 데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곧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앎이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그러니까 인내함으로 고난이 헐거워지는 게 아니라 고난이 가해지면서 우리 안에 인내를 생성하는 것이고, 이로써 까맣게 잊고 살았던 영생의 기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실 천국이 우리에게 얼마나 관념적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좋다니까 그저 좋은가보다 하지 실제로 그 좋음을 누리지 못하는 게 우리의 이상 때문이다. 단순하고 조급하여서 우리는 그저 이 땅에서의 누림에만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를 바로 교정하는 게 고통이다. 고난은 우리의 조급함을 느긋함으로 바꾸고, 복잡하던 일상을 단순하게 하며, 회피하고 부정하던 인생의 끝을 마주하게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마음에 지조를 갖게 한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이끄는 것이 환난이다.
앞서 아이에게 보낸 내용도, 이를 시간 단위로 두면 끝이 없게 어렵다. 이제 겨우 몇 살인데, 혹은 이 고통이 벌써 얼마나 지속됐는데, 이런 꽃다운 나이에, 하는 따위의 푸념과 원망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서른여덟 해 동안 누워있던 환자에게 낫기를 원하냐? 하고 물어보셨을까?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5-6).” 이보다 우문이 또 있나? 낫고자 원하다니. 무려 서른여덟 해 동안이었다. 한데도 예수님의 질문은 태연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 단위는 우리의 일상이 갖는 함정일 뿐이다. 한데 돌이켜 보면 삶은 공간 단위로 저장된다. 몇 시간 동안, 얼마나 오래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는 게 아니다. 시간은 다만 그때 그랬었지? 하는 정도의 단위면 족한 것이다. 가령 신대원을 다녔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땐 참 하루하루가 힘에 부치고 고통스러웠다. 몸의 고통은 물론이고 나의 예민함도 지독하게 병적이었다. 한데 지금은 그저 그 시간은 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땐 그랬지, 하는 정도인 것이다. 그 시간 가운데 누구와 보낸 어떤 공간의 흐름이 저장되었을 뿐이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다. 영생에는 시간의 단위가 무색하다. 아이에게 보낸 말도 그게 7년이든 70년이든 7만년이든 영원이란 단위(?) 안에서는 그저 잠시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원이란 개념은 시간의 단위가 아니라 공간의 의미인 것이다.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만 있다. 예수님이 저에게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은 저의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은 바로 그 자리 그 공간에서의 문제였다. ‘그 공간’은 낫고자 하고 바라는 사람들의 숱한 시간이 깔려있는 자리였다.
저는 예수님이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시는데 엉뚱하게도 지난 시간동안 자신이 얼마나 낫고자 했었는지를 늘어놓았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 우리의 고통은 시간으로 매겨지는 게 아니다. 지금이다. 여기. 이 자리, 이 공간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게 성경의 주요핵심이다. 아이가 보내온 문자에는, 내가 나으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주의 일을 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래? 좋아. 어디 두고 보자.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성경의 시간은 현재다. 그 공간은 여기다. 오늘 하루의 고난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아이를 생각하고, 이를 기도하며 묵상하는 일은 새로웠다. 그럼 내가 만일 그런 극적인 두려움 앞에서 의연할 수 있나? 하고 생각하면 어림없다. 두렵다. 떨린다. 피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피하길 원한다. 그런 자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아이에게 무슨 위로를 할까?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그러기 위해 오늘을 우리에게 두신다. 이 고통을 허락하신다. 말씀뿐이다. 나는 아이에게 기도도 좋고 찬송도 좋지만, 부디 끝까지 말씀 붙들자고 말하였다. 기도는 자꾸 나의 바람을 모색하며 자신의 요구에만 갈급하게 할 수 있다. 찬송은 멜로디에 빠져 감정만 동요시킬 수 있다. 말씀 없는 기도와 말씀 없는 찬송은 때로 너무 얇아서 위태롭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오늘 나는 그리 읽는다. “그가(말씀이)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말씀을) 사랑하라. 그가(말씀이) 너를 지키리라.”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지키신다. 말씀이 붙드신다. 내가 말씀을 붙들려는 이 마음도 말씀이 말씀으로 말씀을 찾고 사랑하고 붙들게 하신다. 누구, 용한, 기도에 능력이 있는, 뭐에 좋은, 어떤… 온갖 좋다는 게 다 소용없다. 말씀뿐이다. 암송하는 말씀을 되뇌고, 들었던 말씀을 되새김질하며, 말씀으로 견대내기를.
이는 아이에게 주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오늘에 있는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아직 젊을 때, 건강할 때, 살만할 때, 말씀을 비축해둘 수 있기를. 끝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든든한 것은 말씀뿐이다. 구슬픈 가락의 찬송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절절한 고백이다. 화려한 언변의 기도가 아니라 가슴을 쥐고 부르는 주의 이름이면 되었다.
아, 나는 누구인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나의 고백은,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하실 것이다. 말씀이 하신다.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말씀이 곧 약속이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15-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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