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
잠언 5:22-23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편 92:12-13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 이가 있다. 저는 믿음이 있는 자이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벧전 1:5).” 일컬어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이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모처럼 아이들이 꽉 찼다. 이상하지만 나는 그럴 때면 왜 안 나온 아이들로 마음이 먼저 어려운지 모르겠다. 수능이 끝나고 두 아이가 같이 와서 예배를 드렸다. 아직 실기가 남았다지만 수고했다, 애썼다,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반주는 서툴고, 서로는 서먹하고, 각자의 주관은 뚜렷하여 어찌 융화가 어려운가 싶지만 그럼에도 괜찮다, 괜찮다. 주의 인도하심이 또한 이루어 가실 것을 믿는다. 다만 병석에 누워있을 아이와 영화제니 뭐니 바쁘게 돌아치는 아이와 마음이 들떠 나오지 못하고 있는 아이에 대하여는, 내 안에 두시는 복잡한 심경은 그러므로 기도하게 하시는 거였다.
복음은 나로 인내하게 하신다. 환난은 인내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 나의 수고와는 무관하다. 빨리 성급하게 생각하였던 것들로부터 놓여나게 한다. 마음의 어려움이란 오히려 사람을 느긋하게 만든다. 그것으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로 나아가게 한다. 어떤, 역설이다. 왜 내가 마음이 어려운가?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데는 ‘각별한 소외감’이 드는 법이다. 큰 아이는 주일을 끼고 어디 여행을 갈 거라 말했다. 두 아이는 수능 끝나고 인사하러 온 것을 강조했다. 오겠다던 아이는 신춘문예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한 녀석은 도대체 같이 어울리지 못하고 일찍 갔다.
그처럼 우리는 자아를 놓지 못한다. 잠들어서도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는 아이 같다. 불안한 것이다. 나는 이를 각별한 소외감이라 생각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죄와 죄 사이에 낀 영혼의 비명이다. 그러니 어쩐다? 오게 하신 이가 또한 그 마음을 여셔야 한다. 마음을 여신 이가 또한 채우셔야 하고, 채우신 이가 건사하고 다스리셔야 한다. 가끔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소외감을 느낀다. 나에게 이 소외감은 각별하다. 그것으로 아이를 더 사랑한다.
서로의 저,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서 말이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재련하신다. 이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주어질 것이다. 이런 복음을 증거 하는 이가 베드로라는 게 참 값지다. 누구보다 자아가 강했던 그였다. 자기 신념과 확신이 분명했던, 그래서 늘 걸려 넘어지고 끝내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정하던 이가 아니던가?
그가 우리에게 증언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8-9).” 바로 그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위하여, 그 결국은 아직 아니었다. 내 안에 드는 안타까움과 실망과 조급함까지도 한 데 집어던져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의 확실함’으로 이끄는 것이다. 괜찮다, 하고 아이 등을 툭툭 친 것도 성령께서 하실 것을 확신함이었다.
오늘 성경은 악인의 뚜렷한 현상과 결과를 알게 한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는 것이다. 놓지 못하는, 기어이 붙들고 고집하는 자아로 인해,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 이유는 분명하였다.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이다. 이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 결국 패망에 이르는 것은 미련함 때문이었다. 미련함이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1:7). 지식을 미워하는 것이다(22). 결국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킨다(32).
그런데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 두렵다. 두려움으로 주를 경외하고 내 안에 드는 여러 생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의인일 수 있는 길을 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마음은 항상 송구하다. 내가 한 게 아니어서 이로써 자랑할 게 못되기 때문이다. 그저 다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이를 앎으로 더욱 주만 바란다. 잠시 있다 없어지는 안개일 뿐인데, 나의 좌충수는 언제나 앞선 염려였다.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건 어쩌면 안일한 평강보다 조바심치는 안타까움일지도 모른다. 무른 열매보다 이도 안 들어가는 설익은 열매가 더 오래 가는 것처럼 말이다. 내 안의 근심은 더욱 주의 영광을 사모하게 한다. 아이들을 대하면서 드는 ‘알 수 없는 마음’에 대하여 나는 그것으로 주가 심으시는 기도이겠구나, 생각하였다. 염려가 되고 불안해하는 마음이 저를 더 생각하게 만든다. 그냥 왔어요, 하는 아이 앞에서! 그게 참… 내가 어찌할 수 없음을 느낄 때의 그 모진 냉랭함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얼레고 달래고 추스르며, 또 와. 다음 주에도 보자. 하고 인사를 건네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휑하니, 아직 복도에 남은 나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함이여,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척박함과 무관한 풍성함이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그렇구나. 나의 마음이 그 뿌리가 주의 집에 심겼음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어떤 서운함과 아쉬움과 알 수 없는 절박함에 이르기까지, 내가 왜 구걸하듯 애한테 이러고 있나 싶다가도 그게 곧 내게 두신 마음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주의 집에 뿌리를 내리고 그의 뜰에서 번성하여지기를. 우리 교회가 아이들이 한 영혼이 내 자신이,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기준으로가 아니라 주의 뜰 안에서 더 풍성하고 의롭게 성장하여지기를.
그리하여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시 92: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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