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언 6:23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5
‘날마다 주님을 더 알아가는 기쁨’은 성도에게 있어 특별한 권리이겠다. 이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하시는 말씀으로 함축되었다(사 40:8). 몸은 찌뿌둥하였고 날씨는 을씨년스런 월요일 날이었다. 사무실들이 비어 텅 빈 공간에서 나는 서성이듯 창가에 서서 이사야서를 읽었다. 새삼,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알 수 있었다. 시돈과 두로에 경고하시고, 두마에 이어 아라비아에도, 바벨론이며 애굽, 모압과 앗수르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돌아올지어다(21:12).’ 하는 주님의 구애가 구슬펐다. 화있을진저.
그러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그럼에도 주님은 약속하신다. 주께서 회복하실 것이다(1:26).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29-31).”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경고등이 켜졌다.
경고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는 세상에서,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22:12-13).” 하였으니 여전하다, 여전하였다. 이를 오늘 잠언의 말씀은 다른 더 좋은 수가 없음을 알게 한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이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과 만져서 느낄 수 있는 삶을 사는 자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였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를 확신하여서 오늘 시편의 말씀이 굳건하게 들리는 데 감사한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시 93:5).” 이를 우리가 아멘으로 받고, ‘등불로 삼고 주의 법을 빛으로 따라가는 훈계의 책망이 있어 생명 길이다.’ 이와 같은 ‘주의 증거들이 내 삶에 확실하고 그의 거룩하심이 주의 집에 합당하시니 주는 영원무궁하시다.’
아이가 수필 두 편을 보내왔다. 모 신문 신춘문예에 보낼 거였다. 그럴 정도는 아닌데, 새삼 아이의 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으로 고민하고 어째서 힘든가, 하는 것에. 그것으로 무엇을 따라가는가? 하는 데. 그럼에도 여전하여 아이를 쥐고 흔드는 게 무엇인지. 수필로써는 너무 날것들이어서 민망하지만 그게 또 새로운 시도가 되기도 하겠다 싶어 ‘경험삼아’ 출품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어느덧 스물셋. 그러게, 한참 부대끼고 흔들려야 할 나이였다. 드세고 고집불통이지만 그래서 연하고 여린 아이였다.
가끔은, 내가 살았던 그 나이 때를 살아와야 하는 아이들을 볼 때 마음이 서늘해진다. 안 그랬으면 하는 길로 들어서고, 가지 말았으면 하는 데서 기웃거리며 힘겨워하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돌아보면 그 모든 게 헛된 것인데. 그처럼 사람을 그리워하고 인정받고 싶어 저마다의 수고와 애씀을 다하느라 소진하는…. 한 아이의 카톡에서는 3년 사귄 아이와의 이별로 ‘죽을 것 같다’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그러게, 그럴 때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좀 더 일찍 주를 마주하고 말씀 안에 거주하였으면 좋으련만, 그게 또 어디 되나? 나의 고약했던 죄의 뿌리에 대하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이를 알게 하시려고 주님은 참고 또 기다리신다. 이사야서를 읽으며 나는 주님의 구애가 참으로 혹독하였다는 것을 느꼈다.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가! 오늘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시다. 곧 영광의 소망이시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비로소 그 풍성하신 은혜를 회복할 수 있다니. 그리스도인의 특권 중 제일은 환난으로 주의 사랑을, 만족을 배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이와 같은 공부가 환난이라는 학교에서 이루어진다. 세상은 우리로 이를 알게 한다. 그 일체의 비결은 그리스도시라. 내 안에 ‘영광의 소망’이었다.
앉아 있으면 얼마 못돼 엉덩이와 허리가 아프고 누우면 곧 목이 아파서, 창가에 서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다 문득 떠오르는 이름을 적어붙이고…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충분하다는 어떤 만족함이 나를 다스리시는 것이다. 이를 어찌 설명하고 설득시킬 수 있을까! 아이에게 나는 뭐라 말해주어야 하나님이 저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셨음을 알게 할 수 있을까? 몇 마디 카톡이 오갈 때, ‘그녀’의 주인공인 여친이 ‘교회 다니는 애’라는 걸 은근히 강조하고 있었다. 같이 술에 절어 돌아다니는 아이들이지만 어떤 실오라기 같은, 저기 손바닥만 한 구름 한 점을 발견한 듯한 느낌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내겐 그렇다. 어려움이 나를 더 주께 향하게 한다. 내 몸의 고단함이 더욱 주를 의지하게 한다. 곧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나는 미련하여서 이제야 주의 사랑을 누린다. 그러므로 나의 기도는 항상 아이가 너무 멀리 가지 않기를, 먼 길을 도느라 아까운 젊음을 탕진하지 않기를. 성경은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내가 아니다. 그럴 수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그런 거였다. 이 놀라운 사랑은 결코 절망할 게 없다. 아이가 어떠하든, 사귀는 애가 어떤 애든, 지금 무슨 일로 허덕이고 있든, 상태가 어느 정도이든, 이 모든 게 고루 어울려 섞이고 얽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증거는 이것이었다. 결국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끝나야 끝난 것이지 아직은 아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저 보이지 않는 영원함을 사모할 수 있게 하시려고 이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이처럼 연연해하게 두셨는가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유난히 고집스러운 아이는 나의 모습 같아서 더 싫고, 밉고, 안쓰럽다. 문자가 오면 뚱했다가도 스르르 마음이 기우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두 편의 글을 여러 번 다시 읽으며, 그래 주께서 인도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감히 말하지만 모든 게 은혜 위에 은혜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그 충만함에 이르기까지 고난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과목인 것이다. 오늘의 내가 나에게 두시는 이 모든 상황을 ‘은혜 위에 은혜’라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복되었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떠하든지, 나의 남은 생에 대하여 지나온 날들이 붙들고 살았던 것을 놓을 수 있어 다행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이것이 내 것이 되었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안다는 것.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어서 복되다. 이를 보다 일찍 우리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면. 그래서 너무 애쓰지 않기를. 먼 길을 돌아가지 않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아, 부디 빨리 그럴 수 있기를.
대학을 가고 졸업하는 데 너무 많은 수고를 한다. 직장을 얻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고 너무 애들을 쓴다. 사랑에 목을 매고, 돈에 환장하고, 출세와 권세에 영혼을 저당 잡히며 사는 세상에서 부디 주의 음성이 들릴 수 있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8).” 그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대하여,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19:25).”
고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것이다. 곧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오늘 내게 두시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시 93:5).” 나는 다시 되뇌어 고백한다. 곧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1).”
이와 같이 내게 들리는 것을 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나의 남은 사명이겠다. 내가 보는 것을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2).” 나는 더욱 주를 바람으로,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3).” 그러므로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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