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요한일서 5:13-21 /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전봉석 2016. 12. 15. 13:59

20161218 주일

 

요한일서 5:13-21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5: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5: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들어가는 말

 

조지 허버트(159343-163331)의 시를 한 편 나누고 시작하자.

 

사랑이 환영의 말을 건넸으나 내 영혼은 뒤로 물러섰으니

오물과 죄 때문이라

그러나 눈치 빠른 사랑이 꾸물거리는 나를 보고

내가 들어서자

가까이 다가와 내게 부족한 게 있는지

친절하게 묻는구나

 

여기에 합당한 손님이라고 내가 대답했더니

사랑이 말하길, 네가 그 사람이 되리라

고약하고 배은망덕한 내가? 오 내 님이여,

난 당신을 볼 수 없노라

사랑이 내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답하길,

내가 아니면 누가 눈을 만들었느냐?

 

주여, 맞소이다만 제가 눈을 더럽혔나이다. 제 수치가

합당한 곳에 있게 하소서

사랑이 말하길, 그렇다면 너는 수치를 누가 당했는지 모르느냐?

내 님이여, 그러면 내가 섬기겠나이다

사랑이 말하길, 너는 앉아서 내 음식을 맛보아야 하리라 하니

내가 앉아서 먹었노라

 

허버트의 시 [사랑3] 전문이다. 시의 정황은, 나는 오물과 죄 때문에 꾸물거렸다. 사랑은 그런 내게 다가와 부족한 게 없는지 친절하게 물었다. 주인인 사랑이 친절하게 대하자 나는 돌연 배은망덕하게 손님으로서 내가 합당하다고 우쭐댔다. 그러자 사랑은 충분히 내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한다. 내가? 순간 민망하여 나는 당신을 볼 수 없다고 하자, 그 눈을 누가 만들었지 상기시킨다. 그 눈을 더럽혔다며 나는 수치를 드러내자, 그 수치를 누가 대신 당했는지 알게 한다. 결국 나는 그 사랑을 감당할 길이 없어 무엇으로든 섬기겠노라했더니, 가만히 앉아 차려놓은 음식으로 나를 대접한다. 나는 아무 공로 없이 앉아서 먹는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이어가는 데 있어 마치 자신의 수고와 애씀으로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인 양 어려움을 호소할 때가 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대해 상당한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느니 차라리 가격이 잘 매겨진 우상을 섬기는 게 훨씬 더 수월해 보인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자아실현을 삶의 가치로 삼는 게 현명한 것 같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혹은 다른 누구, 어느 교회나 목사 신도와 뜻을 합해 더 나은 취지의 공동체를 이어가는 것도 보람될 것 같다. 때론 다들 그러는데 뭐?’ 하는 명분이 복음의 참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 ‘내 음식을 맛보아야 하리라.’ 하실 때 염치를 내세워, 나의 자존심과 나름의 이상을 붙들고 이를 거절하는 게 너 나은 것 같다.

 

내가 앉아서 먹었노라.’ 할 때 이것이 순수하게 느껴지기보다 염치없어 보인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하시지만, 나의 아집은 겸양을 떨면서 사양한다. 내가 거저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나의 자아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한다. 겸손을 가장한 지독한 자아숭배다. ‘내가 왜?’ 문화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은 그래서 불편하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말씀하시지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사양을 한다.

 

 

그의 뜻대로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14).”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 하는 말씀이 대번에 조건으로 들린다. ‘거봐! 그냥 줄 리 없다니까!’ 그래서 우린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하시는 말씀을 싫어한다. 그 이유는 그의 뜻대로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 싫다. 왜 그럴까?

 

모름지기 모든 소원은 앞서 먼저가 있은 후에 이루어진다. 우선순위의 문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22:37-39).” 오늘 우리가 그의 뜻대로우선순위는, ‘먼저에 해당하는 바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건이 아니라 질서다. 자세히 보자. 우리가 무엇을 소원하는 것은 혼돈에 빠졌을 때다. 이미 있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결핍은 모자람이고 모자람은 혼돈이다. 안정을 찾고 싶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15).” 하고 확신한다. 대체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 쥔 걸 놓기는 싫고, 없는 걸 갖고 싶기는 하고먼저 구해야 할 것은 그의 뜻이다. 그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을 바로잡으셨다. 그는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어린아이일수록 먼저를 못 견뎌한다. 모든 우선이 자신이다. 우리가 쉼 없이 싸우는 건, ‘그의 뜻대로구하기 위해서다. 싸움에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담대함은 이미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건,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견고한 의뢰가 있기에 가능하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17).” 우선 모든 불의는 어쨌든 죄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예외는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3).” 한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 그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영생은 이미 그의 것이다. 이 성경을 쓴 것은 그런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요한은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고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우리에게는 사망이 이르지 않는다. 그런데 여전히 육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죄인이다. 알고 짓든 모르고 짓든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 어떻게 죄를 지으면서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죄책을 느낀다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과는 다르다. 후회와 회개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후회는 그 책임을 자신이 지는 것이고 회개는 그것마저 질 수 없음으로 주 앞에 내어놓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은 시대의 기호와 가치에 따라 갈린다. 전혀 찔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죄책은 절대자 앞에 설 때마다 느끼는 못 견딤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스스로 책임지려는 데 있다.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태도다. 왜 꼭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나름 착한 일 많이 하고 선하게 살면서 누구보다 의로운 자로 인생을 성실하게 살면 될 일이다. 내가 뭘 그렇게 대단한 죄를 지었다고 난리인가? 누가 언제 내 죄를 담당해달라고 했던가? 내 죄는 내가 알아서 한다! 이런 자는 성령이 우리로 죄를 직면하게 할 때 나름의 판단과 기준으로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 예수의 십자가 없이도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를 위해 기도해봐야 소용없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16).” 물론 우리의 중보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다. 그러나 기도가 적용되는 사람이 있고, 전혀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도 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66:18).” 우리는 죄책을 느끼고, 이에 하나님과의 단절을 두려워할 줄 아는 자들이다.

 

곧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않으시는 기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4:3).” 정욕이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우리의 욕구다. 하나님의 도움을 못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내가 주체인 것이고 그러므로 내 소관의 내 몫으로 여기는 것이다. 정욕이란 하나님보다 더 빠른, 강력한,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늘 죄 된 마음으로 사는데? 이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18).” 곧 우리가 종종 불의에 빠지지만, ‘악한 자사탄이 우리를 어쩌지 못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 값을 이미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내 죄의 값, 사망권세를 그가 이기셨다. 예전에 지은 죄는 물론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이미 값을 도말하셨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연약하여서 또 쉽사리 죄에 빠진다. 누굴 미워한다. 시기하고 질투한다. 감사보다 원망이 앞선다. 그런데 신기한 건, 전에는 이런 우리 자신을 옹호하고 은폐하고 거짓으로 두둔하였지만 이제는 못 견디겠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씻은 자는 조금도 더렵혀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씻음을 받은 자는 조금만 더러워져도 못 견디고 다시 씻기를 원한다. 우리의 회개란 그러므로 날마다 거듭되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우리 안에 머물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속하였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20).”

 

먼저는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 그리고 그의 아들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로 있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이심을 비로소 안다. 곧 우리가 영원히 산다는 것은 또 사는 게 아니다.’ 혹은 이 땅에 이어 다시 사는 게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이시다. 곧 하나님과 함께, 같이, 그 좋고 좋은, 어찌 이 땅의 언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그럼에도 느낄 수 있는 기쁨의 충만함으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사는 것이다. 지금은 희미하다. 어떻게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나오는 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 왜 우리는 이 땅에서 연속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하는 것일까? 간헐적으로 어떤 기쁨에 충만하여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정도의 확신에 찰 때도 있는데, 왜 지속적으로 간직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를 끝내면서 우리에게 권면한다.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곧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모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키는 모든 것이다. 이는 끝내 우리를 몰고 가서 사망에 이르게까지 하는 것이다.

 

온갖 이단의 교훈(그래서 요한은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것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멀리하라고 하였다. 곧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4:1, 4, 6)과 하나님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로부터 경계해야 한다. 이는 자아실현이며 자기 의다. 자기 판단과 자기 기준이다. 흔히 말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자기주장이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자녀들아!’ 사도는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 ‘너희 자신을 지켜먼저는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지킨다는 것은 내버려두는 게 아니다. 긴장하는 것이다. 근신하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저는 우리 각자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자존감이 낮다면 가장 안온한 무력감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자존심이 강하다면 가장 큰 성취감을 위해 인정받게 한다. 자아실현을 자기주도적인 방식으로 설정할 것을 제안한다. 나의 주인은 나라는 것을 부각시킨다. ‘내 음식을 맛보아야 하리라사랑이 말할 때, 여러 겸양의 말로 거절하게 만든다. 그냥 앉아서 먹게 하지 않는다.

 

가장 선명하게 오늘 우리의 우상은 자신이다.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는 자신을 따른다. 욕망을 가치 있게 다룬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자는 광신자이거나 종교인이면 족하다. 현대인이란 종교 또한 취향의 문제다. 신에 대한 기분은 선호의 대상일 뿐이지 그게 굳이 하나님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내 죄는 내가 알아서 한다. 굳이 십자가 앞에 서고 싶지 않다. 그런데 신기한 건, 십자가 앞에 서면 설수록 더욱 자신의 죄가 선연하게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 저는 그래서 자신조차도 자신이 어쩔 수 없음을 고백하며 두 손을 든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영생이시다. 오늘 우리의 축복은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