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요한일서 4:19-5:3 /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전봉석 2016. 12. 1. 14:28

20161204 주일

 

요한일서 4:19-5:3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5: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들어가는 말

 

앞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다소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그 증거는 첫째,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안다는 것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고로 그 앎은 내밀하다.

 

둘째,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 1:4).” 이는 모든 것을 이기는 아주 특별한 성품이다. 왜 이 기쁨을 주실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5:13).”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이로써 우리는 주 안에서의 기쁨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자들이다(3:3).

 

- ‘사랑하는 자의 특징

 

1. 분별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곧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위시하여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고, 적그리스도의 영을 경계한다(3).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분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6).”

 

2. 이기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4).” 우리의 이김은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자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5:13).”

 

3. 성령의 열매를 맺어간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왜냐하면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4. 서로 사랑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

 

- ‘사랑하는 자의 특혜

 

1. 심판 때에 담대하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17).”

 

2. 두려움이 없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18).”

 

3. 형제를 사랑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1).”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아멘.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덴 취향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주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곧 주께서 사랑하는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증오는 물론이거니와 덜 사랑하는 정도의 사랑도 포함이 된다. 곧 사랑을 받은 우리로서는 어떤 자격과 기준이 갖춰져서가 아니다.

 

1. 그 사랑은, 우리가 연약하여서 경건하지 않은 자로 살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2. 그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

 

3. 그 사랑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였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

 

- 아무 자격이나 조건은 물론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이미 주께서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이다.

 

4. 그 사랑은, 내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71:6).”

 

5. 그 사랑은, 창세 전 아직 만물이 생겨나기도 전이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4).”

 

6. 그 사랑은, 영원 전에 예정하신 것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9).”

 

- 나와 상관없는, 그러나 나이어야만 하는 바로 그 사랑이다.

  

7. 그 사랑은,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능력이,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8-19).”

 

이를 어찌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요한은 그래서 강조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하는 것이다(1:1). 이걸 우리는(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듣고, 보고, 만져서 안다. 이를 베드로는 더욱 감격스럽게 표현하였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그 증거가 곧 형제를 사랑하는 데서 증명이 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오늘 본문 51절을 보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는 형제다. 그가 낳으셨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물으셨다.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3-16).

 

결국 세상이 뭐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학파나 어느 교단, 어느 신학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내게 물으신다. 그러할 때 베드로와 같이 고백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명해진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5:42).” 우리가 이 자리에 모였다는 것, 말씀을 듣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 어디에 있든 예수를 그리스도라 입을 열어 시인하는 것.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5:2).” 오늘 말씀에서, ‘지킨다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로는 간직한다, 보호하다를 갖고 적극적인 의미로는 마음을 기울여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22:37-39).”

 

우리에게 가장 우선순위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의 인자하심도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그리고 다음 우선순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함이다.

 

나오는 말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힘들다? 교회 다니는 게 어렵다? 믿는 자로 사는 게 고달프다? 과연 그럴까? 길게 말할 것도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비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보다 쉽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자. 누가 손을 긋고 자살을 하려 했다. 저는 배울 만큼 배웠고 나름 가질 만큼 가졌으며 누구보다 누릴 만큼 누렸던 자이다. 가족도 있을 테고, 여태 살아오면서 자신의 신념도 남달랐을 것이다. 저는 누구에게 특혜를 줄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누구는 저를 통해 좀 더 빨리 수월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자 그러는 동안, 어땠을까?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은 물론, 숨겨야 하고, 몰래 일을 처리하느라 은폐하고 위조했어야 한다. 그러는 동안의 그 고달픔은 어땠을까?

 

자기 의로 산다는 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검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다들 사회에서 저명한 자리에 올랐을 때, 그동안의 수고와 애씀을 보상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남들 다 하는 탈세와 불법은 관행으로 치부하고 서로가 끌어주고 댕겨주는 것을 관례라고 여긴다. 떳떳하고 정직한 삶이란 허울뿐이다. 그러느라 숱하게 버려지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로 사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사는 일보다 엄청나게 더 고달프고 힘겹다. 결국은 힘에 부쳐 일순간 목숨을 끊어버리기까지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바울은 이를 더욱 면밀히 진술하였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의 말씀을 준행하며 사는 일이 말씀 없이 사는 일보다 결코 무겁지 않다. 이를 오늘 사도요한은 이렇게 정의하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우리로 할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내가 주를 사랑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결코 실패가 없는 사랑이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4:19).” 때로 우린 사랑 못한다 해도 그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