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31:29-3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18:28-2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그 어떤 덕행보다 뛰어나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주를 경외함으로 칭찬을 받는다. 다른 더 좋은 수를 알지 못한다. 설마 했더니 아이가 일찍 왔다. 공포심은 이유가 없다. 갑자기 흘러나오는 복음송가에 아이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성급히 약을 먹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저 음악을 좀 끄면 안 되냐고 물었다. 전에 사귄 여자애가 종종 흥얼거리던 노래라고 하였다. 곁에선 어처구니없지만 그런 게 공포증이었다. 누군 귤을 보고 극심한 공포를 느낀다. 누군 고양이를 보고 공포를 느낀다. 심지어 어느 특정한 글자, 혹은 단어에도 공포를 느낀다.
열한 시를 조금 넘겨 성경공부를 하는 아이도 왔다. 우리는 같이 노아의 실수, 포도주를 먹고 하체를 드러낸 부끄러운 정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다. 그렇게 성경공부 중에 아이의 반응이어서 나는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저러다 아이가 어찌 될까, 싶어 불안증이 몰려왔다. 우리 사람은 어찌 그리 연약한가? 누구도 완전한 자는 없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그러던 자가 아니었나? 한데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9:20-21).”
그런 것이다. 자기 힘으로 얻은 것에 대한 자아도취는 방자함을 일으킨다. 그 장구한 세월을 준행하였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무력해졌다. 녀석은 기골이 장대하다.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누구 말도 듣지 않았고, 지금도 물론 제멋대로 군다. 센 척 한다. 이 정도야 뭐? 포도주 한 잔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담배 한 대 필 수 있지? 드라마 정도야!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우린 저마다 자신하는 것에 걸려 넘어진다. 아이는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본래 불안정하다. 저는 당대에 완전한 자라 일컬음을 받았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한데 저가 완전한 것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은혜였다. 은혜에는 감사와 겸손이 있을 뿐이지, 자긍할 때 은혜에도 걸려 넘어진다. 마치 자신이 아는 하나님을 자신의 이해와 확신으로 섬기는 것이라 여길 때, 믿음을 신조로 삼을 때, 이로써 누굴 판단하고 가르치려 할 때… 영락없이 넘어진다. 벌거벗는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나는 아이에게 더욱 직설적으로 말하였다. 그게 너다. 나였고, 우리다. 이를 알 때 주 앞에 다시 선다. 바로 서서 주의 도우심만을 구한다. 죄의 속성이란 하나님이 없는 상태다. 이런저런 사연을 들어보면 그게 또 그럴만하였다 싶다. 같이 사는 삼촌이 룸살롱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불교인이요 아빠는 무심한 무교였다. 밑에 여동생이 몇 해 전부터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우선 동생에게 기도를 부탁할 것을 일렀다. 이런저런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저마다 그럴듯한 처방을 더할 것이고 그러다 나으면 오히려 낭패였다.
좋은 기회다. 나는 아이에게 확신을 갖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확실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거절도 허용하신다. 비인격적으로 강제하지 않으신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것인지, [하나님을] 바랄 것인지 바로 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 싶은지, [하나님을] 알고 싶은지 확실히 해야 한다. 가족이 건네는 말과 주변 친구들 혹은 앞서 경험을 했던 자들의 이런저런 교훈이 갈 길을 훼방할 수 있다.
믿음의 눈으로 동생과 네가 네 집의 선구자구나. 믿음으로 동생을 존중하며 널 위해 기도를 부탁하고 같이 문제를 나누도록 해라. 나의 말에 아이는 어이없어했다. 도움이 필요한데 가장 큰 도움이 기도일 거였다. 멀뚱하니 그것도 여동생에게 말문을 열기가 쉽지는 않을 거였다. 네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이다. 부디 안 믿는 친구들을 찾지 말고, 불신앙 가운데 있는 부모의 위로를 바라지 말고, 무엇보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의지하지 마라. 당부하였다. 폴트루니에의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란 책을 권하였다.
죄의 속성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다. 성경을 부인할 때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무질서해진다. 성경을 믿을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사람을 지으셨다는 데 단순명료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진화론에서부터 우주의 어떤 폭발을 운운하고 미생물에서 뭐가 파생하여 인류의 기원이 되고 어쩌고… 지식의 유희에 빠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이 가운데 빠져든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얼마나 단순명료한지,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면 된다. 하나님과 대항하는 이들은 숱한 경우의 수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를 관장하는 게 사탄이다.
성경은 이를 분명히 밝혀준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았다. 아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염려하지 않았다. 나는 전할 뿐 듣게 하시는 이가 들을 수밖에 없게 하셨던 것처럼 이해하게 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오늘 아침, 말씀이 이를 증거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이는 결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어떠하다 해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그러므로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더는 아이에게 내어줄 게 없었다. 내가 가진 게 이것뿐이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나는 아이에게 감사할 것을 권하였다.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금까지 붙들고 살았던 것으로부터의 외면이 공포요 불안이었다. 안간힘을 쓰며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자기 수고가 역류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분출하는 힘의 세기만큼 불안과 공포가 우리를 주장하려 드는 것이다. 새삼 감사한 건, 내가 아이 앞에서 그와 같은 ‘찌질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녀석은 그런 나를 비웃듯 조롱하였었다. 전에 알던 글방 선생이 뜬금없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네 어쩌네 하면서 오히려 빙충맞게 구니, 아이 눈에는 그게 우습고 신기했던 모양이라. 그러면서 오히려 더 편하게(?) 곁을 맴돌더니, 그때 내가 선생님을 비웃어서 벌 받나 봐요. 실없는 소릴 하였다.
믿음의 속성은 고통을 통과한다. 고통을 통과하기 전에는 관념적이다. 그 믿음은 더 화려하고 추상적이며 어떤 각오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막연하면서 실제적이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한 믿음은 비로소 현실적이다. 뜬구름 잡듯 믿음을 운운하지 않는다. 구호로 외치지 않고 낭만적으로 그려보지도 않는다. 되레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고난이 축복인 까닭은 비로소 주의 이름을 주를 향해 부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을, 주의 이름을 교회 부흥을 위해 또는 자신들의 가치와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 열과 성의를 다해 부르는지 모른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나름의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부인은 말하길 저는 주일예배보다 금요기도회가 더 좋습니다. 뜨겁게 찬송 부르고 마음껏 울면서 기도할 수 있는, 어쩌면 금요기도회가 없다면 저는 무너졌을 거예요. 안 믿고 무시하는 신랑과 이제 좀 컸다고 반항하며 교회를 안 가려 하는 아이들과 안 믿는 시댁 어른들로 인해 고달플 때, 그렇게 실컷 찬양하고 기도하고나면 속이 후련하고 새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이런 낭패가 있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의 이름을 주를 향해 부르지 않는지 모른다. 병에 걸려서, 사업에 실패해서, 하던 일이 더욱 꼬여만 갈 때, 문제를 문제로만 여기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작 주님이 꼭 그 주님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출처가 불분명한 다른 주님이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빨리 낫기를 구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게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 좋은, 주의 부르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축복의 순간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부르심은 거절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봉인 된 편지 같다.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아니,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손을 내미신다. 결국 하나님만 보고 갈 것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제시하는 조건을 보고 결정하려 한다. 그러시겠지, 하고 짐작한 뒤 덥석 그 편지를 뜯었을 때 열에 아홉은 난감한 것이다. 이게 아닌데, 싶은! 내가 그래도 신학까지 하고 여태껏 교회에서 헌신하며 산다고 살았는데.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다른 편지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이 있겠지요! 최종 사역지 면접에서 떨어진 동기 전도사가 보내온 문자에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내용의 편지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겠다는 소리로 들려서 말이다. 부인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처럼(금요철야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겠지요! 마치 다들 부당한 청구서에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들 같다. 아, 믿음이란 그래서 신비이구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게 믿음이었다. 다 아는 길이면 굳이 또 믿음까지야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다.
‘만일, 그러나’에 대한 우리의 미련은 참으로 끈질기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 9:57).” 호기롭게 어떤 사람이 자청했다. 그런데 주님의 반응은 의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잔인한 현실을 말씀하신다. 나름 각오가 필요하다고 여겼을까? 다른 사람이 결연하게 말한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그런데 또 예수님의 응대는 의외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60).” 일일이 연연해 할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나름 그 말씀을 순화하여 들은 이가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 그러자 예수님의 부르심은 더욱 황당하기만 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놓지 못하는 걸 그대로 쥐고 엉거주춤 주의 부르심에 동참할 수는 없다. 믿음의 속성은 들어보고, 확신을 얻어, 결과를 보고 가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운명론자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부르신 이만 보고 가는 것, 그의 성품을 신뢰하는 것,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에 대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곧 성령의 인도하심은 오직 그리스도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우리의 인생살이에 유익을 더하시려는 게 아니다. 그리하여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이를 어찌 나의 아둔한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공포심에 눌려 일찍 저녁 약을 먹고 자는 아이는 새벽녘에 눈을 뜬다고 하였다. 나는 성경책을 하나 주고 읽으라고 했다. 두려움이 몰려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이 부르시는구나 생각하고 ‘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라고 했다. 다른 더 좋은 방도를 나는 알지 못한다. 같이 기도하고 점심을 먹고 당구도 치고 아이를 응원하여 돌려보냈다. 하나님은 어찌 인도하실까?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시 118:4).”
이는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5).” 그러므로 나는 자신 있게 말하였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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