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잠언 2:20-2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시편 120:1-2
하나님을 아는, 경외함으로 지혜로울 수 있는 자의 길을 주가 지키신다. 이는 온유한 자의 복으로 땅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오직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모든 행동반경 안에서 ‘그 땅’을 유업으로 주셨다. 결코 모자람이 없다. 자족함으로 감사만이 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주가 더하시는 ‘땅의 축복’이다.
정직한 자와 완전한 자의 땅은 영원하다. 그곳에는 주가 계시기 때문이다. 늘 그 땅에서는 응답이 있다. 때로는 침묵도, 미진함도, 뭔가 불안하고 답답함도 응답이다. 그러므로 주의 뜻을 헤아려 알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더욱 그 땅에 바로 거하게 한다. 아이는 노랗게 질려 늦게 왔다. 무려 세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자신이 통제 할 수 없는 자신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서둘러 약을 털어 넣고 간절함으로 고개를 숙였다. 언제 또 그래보겠나! 안타깝지만 그게 복된 땅이었다.
그런 거 보면 이게 다 영적전쟁이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늘 그만큼씩 늦는 아이에게 모처럼 야단을 쳤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여기는 허용이 골 깊은 죄의 간극이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위로를 얻는 모든 허용은 죄였다. 그만큼 더 먼 길을 돌아서 가는 셈이다. 저는 모두 애굽이라. 갈대지팡이로 손을 찌를 뿐이다.
뜬금없이 가족들 모임이 생기고, 어디가 아파서 예배에 못 온 아이들이 연락을 했다. 그저 우연인 것처럼 우리를 우롱하는 것들이 죄의 본색이었다. 이는 모두 ‘그럴 수 있지!’ 하고 허용하였던 것들의 반격이다. 나는 좀 더 단호하게 강조하였다. 결국 그렇듯 허용하였던 ‘대수롭지 않은 일’이 남용될 때 하나님보다 더 빠르게 위로가 되고, 친숙하여서 거절하기 힘든 습관이 되고 나아가 생의 전부가 될 수 있다. 자식이 그런 관계일 수 있고, 누구는 학식이 또 누구에게는 삶의 영유가 그런 발판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주를 믿고 의지하는 위로가 다짐이 낭만이 되고 소신이 되어 죄의 근원이기도 하다. 나름 주를 믿는다고 여기는 자신의 신조가 성경보다 우월한 권위를 갖게 되면서 말이다.
다시 필리핀에 들어가 생활해야 할 아들을 생각하며 더욱 간곡하게 말씀을 전하였다. 늘 자기 아집이 강해서 이를 누르는 억압 때문에 섭생이 문제가 있는 외조카 아이를 생각하였다. 무던하지만 그만큼 둔하고 게으른 아이를 생각하였고, 자기 고집으로 탈탈 털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도 주의 은총을 구하였다. 나 또한 다를 바 없는 죄인인 것을, 쩔쩔매는 몸뚱이와 늘 허방다리 짚듯 불안에 떠는 나약함을 주께 고하면서 도우심을 바라였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9).” 그 구분을 바로 하는 게 지혜였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20).” 아는 것과 안에 있는 것이 복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다. 영생은 우리가 거하는 땅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당부한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21).”
이 지긋지긋한 우상이여.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지겠고 간사한 자는 땅에서 뽑히리라(잠 2:22).”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고통과 죄와 사망을 걸치고 살고 있지만 이내 땅에서 끊어지고 뽑히리라.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시 120:6).” 이는 하나님을 마다하는 나의 오랜 습성이다. 선호하는 취미고, 가벼이 여기는 오락이고, 그럴 수 있지 뭐? 하던 온갖 허용이다. 주 앞에 설 때,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7).” 귀찮음, 미뤄둠, 놔둠, 방심이 싸우자고 덤빈다.
본래 적은 대놓고 적일 때 오히려 상대하기가 쉽다. 되레 분명이 나의 아군인데 나로 하여금 정의의 길을 성도의 길을 자주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오랜 벗이다. 습관이고 질투다. 성격이고 기질이다. 오래된 외투다. 그것으로 무겁다.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잠 27:3).” 우리 영혼을 침잠하게 하는 것은 외부의 것 때문이기 보다 내 안의 무게 때문이었다. 이를 알게 하는 것이 말씀이다.
절망은 항상 소망을 일깨운다. 겁에 질린 아이를 보며 온전히 주를 바라기를 일렀다. 한데 여전하여서 됐어요, 싫어요, 아니에요 하는 것이 많았다. 담배는 못 끊겠어요, 이 음악을 들어야 해요, 이 정도가 뭐 어때서요? 우리 안에 이는 반문이 주를 외면하게 한다. 먼저 위로가 되는 모든 것이 우상이었다. 손이 먼저 가는 데 구원이 있었다. 누군 친구를, 돈을, 명예와 권세를 우선함으로 하나님은 뒷전이다. 어쩌겠니? 더 깨져야 하고 자빠져야 하고 고꾸라져 외마디 비명조차 부를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닿아야 한다면! 아, 죄가 너무 끈질기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잠 7:24).” 스스로는 어쩔 수 없어서, 더는 어쩔 수 없음을 주 앞에 통회할 때까지 별 수 있나. 자신이 해보는 데까지 해보겠다는데, 부디 주의 긍휼하심이 오랜 기다림으로 함께 하시길.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곧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1).” 참 자유는 나를 놓아버리는 데 있었다. 이 또한 내가 할 수 있겠나?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그러므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전함으로 내가 듣는 것이다. 들음으로 내가 더욱 어쩔 수 없음을 주께 고하게 된다.
오늘 성전에 올라가는 기도 첫 번째 말씀으로 시편 120편의 교훈은 실제적이다. 어려움은 주를 찾게 하는 값진 순간이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1).” 주는 반드시 응답하신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우리 하나님은 결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1:20).” 나는 아이에게 주의 부르심으로 알려주었다.
이로써 기도가 나온다.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시 120:2).” 얼마나 순식간에 일어나는지 모른다. 나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거짓된 입술은 속이는 혀로 나를 변호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늘어놓으며 한탄한다. 누구 탓을 하고, 결국 자신은 잘못이 없음을 변명함으로 전가한다. 결국은 하나님 때문이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그늘에서 말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곧 ‘하나님이 주셔서’ 그렇게 된 것이다!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시 120:3-4).” 꺼지지 않는 숯불과 힘이 넘치는 화살 같이 나의 속이는 혀는 순식간이다. 완고하다. 확신에 차 있다.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5).” 메섹은 야벳의 아들로 장사를 하였다(겔 27:13). 사탄의 땅을 상징하고 그의 권세 아래 있음이다(38:1-6). 곧 이 땅, 악의 권세에 놓인 땅에서 경쟁하는 자로 삶에 머물면서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 같다. 그게 나의 혀다. 참소한다. 변명하고 핑계대고 두둔한다.
그러니 그런 자로 그런 자들과 사는 동안에,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시 120:6).” 저들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미워한다. 싫어한다. 하나님만 아니면 다 괜찮다는 자들이다. 자기 의, 자기 판단, 자기 기준으로 버티고 섰다. 부들부들 두려움에 떨다가도 약이 들어가고 좀 살겠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됐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는 것이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7).” 내 안에 불화가 원망이 서운함과 억울함으로 혼잡하다. 그 특징은 뚜렷하여서 마치 바벨탑을 쌓을 때의 정황과 똑같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3-5).”
자기 수고의 떡을 먹는다. ‘견고히 굽자.’ 주도적인 삶을 큰 의미로 확신한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상식과 이해로 건설된 문명을 터전으로 삼는다.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말한다.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보다 더 진취적이고 발전적인 사고가 또 있을까? 이것이 시대정신이며 기업이 원하는 글로벌한 인물의 상징이 아닌가?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시 120:3).” 당해낼 재간이 없다. 수시로 내 안에 드는 마음도 다르지 않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그러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외에 모든 것은 둘째였다. 그것으로 아이들에게 본이 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3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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