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잠언 24:5-6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142:5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여길 때, 열에 아홉은 자기 의를 구하게 된다. 자기 꾀에 빠지는 것이 그래서다. 아브라함이 그래서 재차 곤경에 처했고 이내 이스마엘까지 두었다. 리브가가 그래서 일을 더욱 복잡하게 하였고, 벧엘에서 브니엘까지 야곱의 길은 험난하였다. ‘하나님을 위하여’ 추구하는 열심이 십중팔구 자기를 이롭게 하는 데 기울기 때문이다. 정작 하나님을 위하여 또는 하나님의 일에 소용되는 자는 자신이 주도하여 그 일을 추진하지 않는다. 주께 맡긴다는 건 주어진 삶에 충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에 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가 저질러놓은 실수와 죄악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 그러는 과정에서의 고통은 각자 선택의 몫이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데 대해 자신들이 못 기다리고 선택한 하갈과 이스마엘이었다. 야곱의 축복을 이미 밝히셨는데 이를 못미더워하여 리브가는 장자 에서를 제치고 야곱을 세우는 음모를 감행했다. 결국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지만 자기 의지에 따라 그리 서둔 것이다. 어차피 그리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기는 순간 끔찍한 꾀를 내는 것이다. 나름 주의 이름으로 말이다.
야곱의 행적을 따라 묵상하다, 월요일은 깊었고 조용하였다. 주의 약속을 모르는 것보다 앎으로 이에 도움이 되려고 하는 섣부른 오만이 더 무서운 죄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지금 당장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관여가 정작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로 허다하겠다. 아, 그래서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 앞에 모여 억울해하겠구나!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경건을 위한 거짓이었겠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는 말씀을 붙든 것이다. 나름 어미 리브가의 선택은 축복의 통로가 된듯하다. 야곱의 순종은 그리하여 주의 일을 이룬 것 같다.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지만, 하나님은 결코 거짓을 원하지 않으신다. 어찌됐든 선만 이루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의 생이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었구나! 결국 자기 꾀였다. 이렇게 해보면 되겠다, 싶은 앞선 마음으로 말씀을 이용했을 뿐이다. 이를 순종이라 혹은 충성이라 착각해서는 안 되겠다.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신 것에 대해 못 참겠다는 자기의지로 일을 벌인 것이다. 그래놓고는 어려움 앞에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거린다.
의인의 길은 형통함뿐이다. 그러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 24:1).” 그런데 못 견디겠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보다 나의 충동이 더 빠르다. 길을 모색하고 더 나은 걸 추구하려는 게 어찌 부당할까? 한데 여기서 자기 생각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존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이를 판단하고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전략을 세워야 한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잠 24:5-6).”
왜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비유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지 알겠다. 저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행했다. 저가 한 일은 거지로 두신 데서, 병자로 머물게 하신 데서, 어느 부자의 대문간에서 ‘나사로라 이름 하는’ 대로 묵묵히 하나님을 바랐다. 그게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저의 처절한 현장을 지켰다. 저의 수고가 리브가의 헌신보다 모자라지 않다. 아브라함의 자기 판단보다 저의 선택이 미련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나 헌신을 축복의 통로로 여길 때 어긋난 충성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랬더니 뭐가 잘 됐고 어떤 일이 풀렸다는 식의 논리는 성경을 오해하게 만든다. 그런 식의 논리는 에서의 판단이었다. 그런 저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바꿀 만큼 소홀히 여겼다. 자신이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여 그저 열심이었다.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니 저의 절규가 가슴에 절절하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 27:3).”
저는 나름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며 아내를 골랐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28:8-9).” 나름의 헌신과 순종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나 리브가에게서 야곱의 축복이 그로 인해 짊어져야 하는 고통은 엄중한 것이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렇지 않으면 대를 이을 후손을 볼 수 없어 하나님의 원대하신 꿈이 무마될까봐….
결론적으로는 나중에 하나님이 다 이를 선으로 바꾸셨다. 그러는 동안 겪었던 숱한 고통과 어려움은 전적으로 우리 몫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신뢰한다고 해서 우리의 문제까지 하나님이 해결해주시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선하시고 인격적인 관계를 위한 것이다. 곧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해도 이를 존중하신다. 주의 선하신 성품에서 어긋나지 않으신다. 행여 나의 어떤 행위가 혹은 마음가짐이 당위적으로, 그래서 축복이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겠다.
기도를 했다고, 선행을 하였다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였다고, 그 업적을 기리며 축복하시는 게 아니었다. 그건 다만 내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임을 입증하는 것일 뿐이지 그게 은혜의 척도는 아닌 것이다. 설마 은혜가 조건에 의한 것이라면 내가 아는 성경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인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 때문이지 저의 의로움이 아니다. 야곱이 야곱일 수 있는 건 하나님이 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이지 저의 수고와 애씀의 결과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가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기도하고 성령의 열매를 갈구하는 것은 결코 의가 될 수 없다. 그렇든 그러지 않든 하나님은 사랑이다.
오스왈즈 챔버스의 <창세기>를 마저 다 읽으면서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께 사장이 와서 전날에 선물 받은 족제비 똥에서 추출한 커피를 대접했다. 옆 사무실이 비어 저에게 온 택배를 받아준 것 외에 하루 종일 혼자였다. 다 늦어서 약사애가 마태복음 9장 5절 말씀을 물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니 어느 게 더 쉽냐는 것이다. 그건 어느 게 더 쉽다는 걸 말씀하시려는 게 아니라, 무엇인들 너희에게 더 쉽겠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아무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데 왜 주의 일에 갸우뚱하냐는 것이다.
가끔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선생인 것과 목사인 것과 아버지인 것이다. 행여 나의 판단과 기준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워의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자살을 선동하였던 철학이 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아갔고, ‘가자 장미여관’ 어쩌고 하며 외쳤던 모 교수의 젊을 때 에로틱한 논조가 에이즈를 확산시킬 정도로 많은 사람을 몰지각한 성욕으로 몰아갔다. 저는 이제 후회하였다. 철학자는 그런 소릴 하고 자신은 아흔을 넘겨서까지 살았다.
성경을 성경으로만 설명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행여 나의 견해나 소신이 성경의 이해를 앞지르지 않도록. 행여 내가 좀 더 풀어서 설명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곁들이는 과장과 허황된 인용이 자칫 말씀을 왜곡하지 않기를! 성령이 하실 일이다. 내가 어찌 잘 다듬어서 광을 내고 정교하게 빚어가는 게 아니었다. 주일 날 설교를 죽 쑤고, 월요일 날 야곱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주께서 내게 주시는 설명이었다. 리브가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도 나름 말씀에 의지해서 자신들의 이해를 실행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에 의한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다. 지혜는 주를 경외함이다. 그러므로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한다. 그러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오늘 잠언의 말씀은 전날에 나의 고민을 한 방에 해결해주는 것 같다.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나는 목격자로, 증인으로, 진술자로 서는 것뿐이다. 내 이해 나의 판단이 결코 중요하지 않다. 어찌됐든 심지어 나의 허물과 죄악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신다. 다만 그 오랜 광야는 내가 자처한 일이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5).” 기어이 다시 돌아오는 자리가 기도였다. 시편은 이를 알게 한다. 다윗의 기도는 오늘의 내 것이었다. 주는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늘 걸려 넘어지는 곳에서 또 주저하고 있는 나의 분깃이십니다. 주가 아니면 살 수가 없음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러므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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