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
잠언 22:17-18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시편 140:12-13
말씀이 비운 자리는 공허만 가득하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 덴 마음이 다른 데로 흐르기 때문이다. 전날 밤에 아래층 아이엄마는 혼자 들기에도 버거운 TV를 떼서 들고 왔다. 이유인즉 딸애 때문에 좀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못 보게 했더니 엄마를 찔러 죽이겠다고 달려들더란다. 고작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이다. 감당이 안 돼 술로 버티고 약으로 지탱하면서 아이엄마는 꾸역꾸역 늙어간다. 예배에 좀 나오시라, 아이라도 보내시라 하면 다른 교회에 다닌다며 일거에 고개를 돌린다. 늘 보면 죽상이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그렇지 않으면 죄의 환멸은 우리 안에 켜켜이 묵은 감정을 들추어대는 것이다. 누군들 사연이 없을까만, 아이엄마의 기구한 삶에 대하여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가련하다. 얽히고설킨 가족사는 그렇다 쳐도, 자신의 생에 얽힌 지독한 무력감은 어쩌면 좋을까? 한글을 읽지 못한다. 하루 이틀이면 읽기는 가능하다고 아내가 아무리 권해도, ‘이제 무슨…’ 하며 고개를 모로 꺾는 것이다. 이제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일 뿐인데 말이다. 아,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잠 22:17, 18).” 그렇지 않은 인생은 한결같이 추하다. 그 생이 비루하고 혐오스럽다.
아내와 성경공부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이었다(롬 4:1-1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2-3).” 저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갈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나 같으면 죽어도 못할 거 같아. 아내의 말에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말씀이 그리 이해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3-4).” 감히 단언하지만 저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아니, 알 수 없는 평안이 있었다. 하나님이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 하실 때, 저는 하나님의 선을 믿었다. 그 증거는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갔다. 곧 자기 방도를 모색하지 않았다. 삼일 길이다. 아브라함은 말이 없었다. 그의 아들 이삭도 말이 없었다. 저들의 침묵은 믿음이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믿었고, 아브라함은 아버지 하나님을 믿었다.
앞서 그는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보냈다. 그때의 심정은 근심이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21:11).” 이에 하나님이 오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12).” 오랜 세월 아브라함은 선하신 하나님을 뵈었다. 그가 약속하신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13).”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떠난 삼일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는 그렇게 감정적으로 이해해왔다. 그러자면 아브라함의 승복이 값지게 여겨진다. 참고 견뎠을 저의 믿음의 의가 돋보이는 것이다. 한데 어제 성경공부를 하면서 드는 확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었다. 만일 저가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 용기와 결단으로 그 일에 순종한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의가 된다. 가깝게는 앞서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훈련이 있었다. 더욱 선명하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체험했다. 이제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 이를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대답에서도 그러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내 생각이 틀렸다 해도, 나의 짐작이 옳지 않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고 묻는다면 아브라함도 또는 여러 믿음의 사람들도 자신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분명하다고 말할 것이다. 만일 저들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그 은혜가 삯으로 여겨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 애써 수고하고 나름 한다고 하여 이를 두고 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라. 믿음도 결국 내 것인가 어디. 내가 결심한다고 생겨나는 게 믿음이 아니다. 결단과 믿음은 다르다. 돌이킴은 기회이지 항구적인 게 아니다. 하긴 돌이키는 것 또한 주가 주관하신다. 어느 것 하나 우리 의지로 되는 게 없다. 다 주신다. 이를 아는 게 믿음이었다. 그러니 아이엄마에게 뭐라 한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만 우리 안에 두시는 측은지심으로 주의 사랑을 보이는 것뿐이다. 너무 어린 게 그 안에 담고 있는 악이 깡이 분노가 서러움이 안쓰럽기만 하다. 아직 젊은데 아이엄마의 실의와 낙심의 무게가 너무 버거워 보인다.
요즘은 내게 믿음 주신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놀랍다. 주를 바라고 구하는 삶으로 살 수 있어서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현실적으로는 저들보다 어렵고 비루한지 몰라도 가만 보면 백 배 천 배 더 낫다. 같이 쓰는 곁의 사무실 사람들은 임대료며 관리비도 못 내고 지내는 모양이었다. 사장이 건너와 무슨 이야기를 하다 그런 말을 했다. 그러니 우리가 제일 가난한 줄 알았는데 우리만 임대료며 관리비를 밀리지 않고 있었다. 다들 보면 속 빈 강정 같다. 이건 뭐 겉만 번드르르하지 속은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상태였다.
외도에 이혼에 술주정이며 서로 간의 반목과 원망과 저주가 아주 극에 달했다. 그러면서 좋은 외제 승용차를 타는 것에 자랑을 삼고, 들고 입고 신는 명품으로 위로를 얻는다. 거짓과 위선과 허풍을 달고 사는 바람에 정작 자기 자신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었다. 누가 진짜인지, 무엇이 정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말씀을 비운 자리에는 공허만이 가득하다. 새로운 모색은 번번이 거짓을 낳는다. 그러나 우린 믿음이라. “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까지로다(시 106:31).”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믿음이 값진 것이었다. 아,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는 자의 복됨이여!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송구하고 면목이 없지만 이게 나이었다. 하는 일도 없고 경건하지도 못한 자를 의롭다 여기시는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하신 이의 은총이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러 가는 그 삼일 길의 결코 짧지 않은 여정에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수 있는 것이 믿음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이를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아버지만 따랐던 이삭의 침묵이 믿음이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내 안에 이는 안달복달은 그러므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수단이었다. 동기전도사와 통화하다, ‘내 옷이 아닌 듯 불편하다’는 표현에 무릎을 쳤다. 왜 하필 나 같은 자에게 목사가 되게 하셨을까? 왜 나를 여기에 두신 것일까? 마치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고 어눌하기만 하여, 이게 내 옷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때!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의 옷이었다. 당연히 내 옷이 아니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옷이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만큼의 거리가 뜬 것이다. 마음이 기운 데로 불편함은 더해진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 29-30).” 그래서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브라함의 삼일 길이다. 저가 만약에 이를 의식하고, 그래서 이를 악 물고 견딘 것이라면 다시 되돌아갔거나 모리아 산에 다다라서 ‘거봐! 내가 맞지?’ 하고 자기 의를 자부했을 것이다. 저가 아들 이삭을 바치러 가는 길은 처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을 때보다 쉬웠다. 그처럼 믿음은 점점 쉬워진다.
왜냐하면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이를 아는 게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시편 140:12, 13).” 거저 주신 바 그 은혜가 내게 족하다.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6).” 그러므로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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