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전봉석 2017. 1. 23. 07:43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언 23:17-18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시편 141:5

 

 

 

다른 데 마음을 두지 않고 온전히 주를 바라며 나아가기를. 거기서 정녕 나의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오직 여호와만 경외함으로 죄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게 하시고 이 또한 주께서 인도하셔야 될 일이었다. 마음이 산만하여 그랬을까? 설교에 집중할 수 없었다. 큰 아이 생각에 마음이 쓰여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배 전에 황급히 누구의 기부금영수증을 만들어주느라 그런 것인지. 뭔 소릴 하는지. 왜 그처럼 시간은 더딘지. 아이들 표정은 왜 저러지? 제멋대로 튀는 생각 때문에 나야말로 엉망이었다.

 

주일이면 뭘 먹는 것도 조심하고 그저 예배에만 집중하기를 마음 기울인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지 않게 조심 또 조심하는데, 아무튼 어젠 너무 민망하고 송구하였다. 너무 춥고 내부는 공사 중이어서 점심을 나가서 먹었다. 큰 애가 오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 한 애는 왜 하필 속이 탈이 나서 음식 먹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하나님과 나의 문제지만, 마음에 두시고 그처럼 신경 쓰이게 하시는 것도 이유가 있을 거였다.

 

누구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기란 참 어렵다. 저는 저렇게 잘 되고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나만 왜 이러나? 싶으면서 조바심이 인다. 이래도 되나? 싶은 안달과 그래서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 것 같은 성급함이 앞서는 것이다. 이를 경계하라는 것. 그 방법은 여호와만 경외하는 것. 강한 신뢰는 다른 데 한눈팔지 않는다. 엄밀하게는 아이가 안 오고 또는 온 아이가 표정이 어떻고 무슨 일이 어떻다 해도, 내가 얼마나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런데도 어떤 답답함이 또는 아쉬움이 후회가 미안함이 설교를 마치고 나면 물밀 듯이 밀려드는 것이다.

 

한 것도 없으면서 아이들이 돌아가고는 녹초가 되었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계속 문자를 확인해보았지만 아이는 연락을 주지 않았다. 별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기다리는 게 나의 일인 것이다. 몸이 아팠다.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장판 온도를 한껏 올렸는데도 추웠다. 엉망으로 죽 쑨 설교와 나의 기분은 상관있었다. 공연히 나 때문에 더 어려워지는가 싶었다.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러기도 민망한 마음이었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5-16).” 내 마음이 딱 그런 식이었다. 아무도 모를 텐데 이를 하나님께도 숨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명절이 다가오고 먼 길을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옥죈다. 어쩌면 좋을까? 마치 변화산에서 내려오기 싫어하는 베드로 같다. 여기가 좋사오니! 빨리 월요일이 됐으면 좋겠는 거다. 혼자 있으면서 말씀도 보고 책도 읽고, 늘 한정된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안정을 바란다. 찬양 들으며 혼자 손을 높이 들고 주를 바라며,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온통 그 모든 게 주일을 위한 것이고 그러느라 온 맘 다한 매일이 주일이어야 할 텐데. 나만 그러고 있고 싶은 것이다. 누구를 신경 쓰고 저에게 간섭하는 일이 지긋지긋하다. 그러든지 말든지 내버려놔두고 싶은 것이다. 오든 말든, 하든 말든 나는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다 초막 셋을 짓고 그냥 있읍시다. 만일 주가 원하시면 나만이라도 이러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이 강한 것이다. 이에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5).”

 

그런데 기어이 그런 나를 데리고 산을 내려오게 하신다. 들들 볶는 마음으로 두신다. 그리고는,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9).”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내가 아이들을 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찌 붙들어 둘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내 맘 같지 않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가장 어려운 게 나인데 누구를 탓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을까? 부활이 아니고는 살아도 죽은 것이다.

 

이처럼, 주님! 하고 앉아 아이를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의자 끝에 걸터앉아 허리가 아픈 현실과 비스듬히 몸을 비틀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는 것. 사는 날 동안 살아서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게 또한 변화산 아래의 실질적인 삶이었다. 지지고 볶고 아우성치며 살아내는 현실이 사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복이 많은 것이, 다시 월요일이다. 공식적으로 혼자 있어도 되는 직장인 것이다. 부대끼지 않아도 되는 하루다. 나에겐 언제든 변화산이 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2).” 이와 같은 시간이 광채가 되어 사람을 마주하고 사건과 사고를 치러야 한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잠 23:19).” 말씀으로 그래서 말씀으로 다시 지혜를 얻어야 한다. 저는 나의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말씀이 인도하실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141:1).” 나의 간절함으로 아이를 생각하고 주변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주를 바람으로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3).” 그러므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4).”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다. 그것으로 내가 산다. 교회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 주가 이 모든 일을 하실 테지만, 그러는 동안 나의 자세는 말씀으로 내 입의 파수꾼을 세우는 것이다. 무엇을 전할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해야 할 걸 전하는 게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의 선하심을, 내가 나에게 허락하시는 변화산에서 만끽하고 그 산을 내려와야 한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게 교회일 거였다. 우리 쌍둥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교회로 오게 할까?

 

아래층 아이엄마는 주말이면 술에 취해 횡설수설 갈지자로 걷는다. 그러는 동안 이제 아홉 살 된 딸애는 어쩌나! 같이 가자하면 부담스러워 하고, 알아서 해라하면 서운해 하고, 내버려두자니 마음이 쓰이고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산 아래에서,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마 17:15-16).” 이런 고소를 당하는 게 마땅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17).” 저의 꾸지람은 온당하다. 아, 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그게 나였다.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19).” 왜 나는 내 곁에 두시는 이들로 감당이 되지 않습니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

 

언제쯤 돼야 나도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갈까? 언제쯤 다윗의 기도에 ‘아멘’할 수 있을까?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시 141:5).” 내게 두시는 불편함이 은혜였다. 저가 나를 치시고 책망하시는 게 복이었다. 이를 내 머리의 기름으로 여겨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마다하지 말고, 싫다고 미뤄두지 말고, 아이로 힘든 마음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것으로 기도해야 한다.

 

겨자씨 한 알 만큼 한 믿음이면 충분하였다. 나는 내가 엄청 믿음이 센 줄 아는데 보면 늘 허당이라. 누구보다 빌빌거리고 처량하니 먼 산만 본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도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은 게 주의 일이었다. 그래서 저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나의 사명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함으로 그에게 기우는 마음으로 주께 아뢰는 일. 그러는 동안 성령이 움직이고 계심을 믿는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으로도 충분하였다. 주가 하신다. 저들 삶에 개입하시고 숱한 우연으로 조성하실 것이다. 주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나의 기도는 다만 내 일이었다.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시 141:8).” 그리하여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9).” 주 앞에 아뢰고 구하는 게 나의 일이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116: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