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전봉석 2017. 1. 25. 07:39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잠언 25:9-10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시편 143:1, 8

 

 

 

만 달란트 빚진 자로서 나는 도저히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을 탕감 받았는데,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자 즉 값으로 계산할 가치도 없는 정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마 18:33).” 주님이 물으신다. 해서 별 것도 아닌 일에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버릇은 교만이다. 기고만장한 태도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그게 그러니까 자신이 옳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남의 허물을 들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결국은 나를 변호하는 게 아니라,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 그러니 그 속을 어쩌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다윗의 기도다. 주께 아뢰는 것이다. 하여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그게 참, 혈기를 부리고 나면 이내 꽉 막히는 건 오히려 내 쪽이다. 미주알고주알 따지고 들어 내 속을 풀겠다고 한 것인데, 말씀 앞에 앉을 수 없는 건 오히려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저 가만히 두고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아! 의뢰함으로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항변하여 일구는 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것은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가만히 말씀을 음미하다보면 평소에 보이지 않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기껏 외면하고 도리질 치던 나로부터 딱 걸렸다. 그래서 그렇구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모두 청함을 받으나 이에 응할 수 있는 것은 택하심이었다. 내가 주 앞에 앉아 주를 의뢰할 수 있는 것은 그리 하게 하신 이의 은총이었다. 긍휼하심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37-39).”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사건건 내 의사가 먼저다. 나를 항변하느라 남을 끌어내린다. 저의 은밀한 일을 누설한다. 그것으로 나의 정당성을 회득하려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선한 게 없다.’ 보면 볼수록 가치가 없다. 그래서 그렇구나! 가장 우울할 때 가장 선명하다. 나의 누추한 몰골을 마주할 때 비로소 가장 선명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는 것이구나. 야곱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이와 같은 말씀이 큰 위로가 된다. 내가 죄인이어서 좋다는 게 아니라 그런 나를 부르러 오신 이가 계시다는 게 좋은 것이다. 나의 하나님은 죄인의 하나님이요 병든 자의 의원이시었다.

 

정말이지 하루가 뚝딱 갔다. 아침에 잠깐 성경을 읽는 것 말고는 종일 하는 것도 없이 분주하였다. 약사애가 ‘약물오남용에 관한 논문’을 봐 달라 그래서 기껏 교정을 봤는데 이게 사라졌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프로그램이었다. 찾다 찾다 결국 다른 컴퓨터로 열어서 다시 봐야 했다. 그러고 나니 아이 둘이 수업을 왔고 잠깐 아이들이 글을 쓰는가 싶더니 오후가 다 갔다. 어디가 아파서 진통제를 먹었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그 핑계로 누웠다가 가정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잠들어버렸다.

 

다시 하루,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살 수가 없다. 전날 읽은 야곱의 사랑에서 사랑의 사랑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랑보다 미련하고 가볍고 심오하며 거짓과 위선을 동시에 지니고 맹랑함과 허무함을 드러내며 질서 있고 고상하고 숭고한 것이 있을까?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 29:20).” 사람이 가진 모든 감정을 망라하는 게 사랑이었다. 사랑 아니면 대체 이 일을 감당이나 할까? 누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 기다리고 또 기다리면서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받아주고 이해하고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사랑 아니고는 설명도 할 수 없다. 곁에서 보면 그저 유치하고 한심하고 때론 처량한 것이다. 사랑은 자격이 아니고 조건에 의한 게 아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자의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저의 능력과 조건이 아니라 저를 통해 보이는 사랑하는 이의 완벽이 깃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데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이상이다. 그 가치 기준은 내가 그만큼을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그리 여기시는 이의 긍휼하심이고 온전하심이었다. 그처럼 마음이 가는 데야 어쩔 것인가? 사랑이란 신비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무한하게 참는다. 영원히 기다린다. 내 안에 주의 영이 계심으로 주는 나를 포기하실 수 없는 것이다. 나의 가치는 내 안에 거하시는 이의 무게다. 내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가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1:10).” 나는 늘 입을 삐쭉거리기 잘하고 누굴 비난하고 그의 허물을 나의 항변으로 삼으려 들지만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5).” 점점 두드러지는 것은 내 안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과 이를 깨달을수록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이다. 주의 사랑이어서 다행이다.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나로서는 도무지 주체할 수 없다. 주의 사랑이 위대하신 것은 그런 나를 아낌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나의 기질은 말씀 앞에 놓일 때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그래서 다행이다. 나는 내가 무익하여서 한심하고 처량해서 안도한다. 이를 느끼면 느낄수록 주의 도우심만 바란다. 육으로나 마음으로나 영혼으로나 나는 이제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 감사하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하게 하소서 주의 영은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시 143:10).” 이럴 수 있어서 말이다. 주가 아니시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데 말이다.

 

곧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붙드신다. 내가 그만한 사랑의 가치가 되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주의 이름을 두신 까닭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내가 아니라 주님이어서, 나는 할 수 없으나 주가 하실 거여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누구를 보고 무엇에 마음을 의지할까? 요지경 세상에서 나 하나 주 앞에 바로 서는 게 큰 은혜였다. 감히 누굴 내가 붙들 것인지. 나는 다만 주만 바란다.

 

후미진 응달에는 여전히 쌓인 눈이 빙판이 되어 걸어 다니기 쉽지 않다. 지팡이를 짚고 조심하여 한 발 한 발 내딛다보면 어느새 길은 끝나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른 길에 올라선다. 느릿느릿 걷는 것 같은데 순간, 벌써 다 왔다. 산다는 일도 그런 것이려니. 어느 순간 나이 듦이 정겹다. 약사애가 자기도 이제 나이 들어 어디가 아프다고 할 때, 나에겐 초등학교 그 어리던 아이로만 기억되어서 신기하였다. 까마득한 옛날 같은데 손에 닿을 듯 가깝다. 어느 훗날 주 앞에 섰을 때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그때도 그럴까? 모든 게 주의 은혜라. 어느 것 하나 주의 자비하심이 아닌 게 없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시 143:11).” 곧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하는 다윗의 마지막 기도가 크게 들린다. 이런저런 일로 마음은 어지럽고 몸은 여의치 않으며 생각은 부산해도 주님, 하고 부를 수 있는 게 나의 은혜라. 하루, 한 걸음, 한 순간씩 또박또박 주만 바라며 살게 하소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118:28).”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119:114).”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 143:1, 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