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전봉석 2017. 2. 3. 07:38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언 3:5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에 가만히 되묻게 된다. 과연 나의 마음이 전심(全心)일까? ‘온 맘 다해’ 주를 신뢰하는 게 내 의지의 문제일까? 이를 의식한다는 건 이미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게 아니다. 전심이란 그게 마음의 전부인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냥 그리 되는, 전부.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을 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거로구나!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다함이 온 맘이다. 자아를 의식하는 순간, 계산이 들어가고 어떤 꿍꿍이가 앞선다. 내가 이만큼 전심으로 주를 바라면 되는 것이구나? 하는 데는 이미 자기 의가 더해진 게 된다.

 

그래서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 뒤따르는 것이겠다. 자아가 죽을 때 자의적인 판단이 서지 않는다.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서 안도하는 것,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그럴 수 있는 건 앞서 그 원리가 제시되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

 

이를 바울은 응수하듯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게 어찌 가능한가? 마음을 다해 주를 신뢰할 때다.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음으로 가능하다. 어떻게 내가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지? 내가 어떻게 구덩이에서 건진 바 되었는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바울이 바울일 수 있는 건 철저하게 사울이었을 때를 애통해함으로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그렇구나! 이처럼 묵상글을 쓰다보면 말씀이 말씀으로 이끄시는 걸 느끼게 된다. 말씀을 전하는 건 천사가 아니다. 죄 없는 천사는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말씀은 예수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 이를 전하는 자는 죄인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죄인의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내 안의 죄를 취하심으로 이를 구원에 사용하신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있다는 말씀을 그리 이해한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말씀 앞에 있으면 나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죄인이다.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끔찍하지 않은 게 없다. 그래서 성령은 종종 내 안의 허물과 죄를 선명하게 보이신다. 나를 그때로 이끄신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했는지, 얼마나 위대하고 신비로운지 마주하게 하신다.

 

그런 자만이 주를 전한다. 나름 깨끗하게 옳다고 여기는 자는 복음 전하는 자로 살 수 없다. 저에겐 은혜가 별로 많지 않아서다. 뭐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에서는 굳이 목숨을 걸만한 위로와 은총도 없었다. 밋밋하여 없어도 그만인 게 된다. 그럴 수 있겠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갈 1:18).” 아라비아에서 3년 만에 돌아와 베드로를 만나러 간 바울이다. 그리고 15일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베드로가 들려주는 생생한 증언이 있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여러 명의 과부들도 있었을 것이고, 실제 저들은 사울에 의해 끌려가 죽임을 당한 남편의 아내들, 그녀의 남은 자식들, 일가친척들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에 말씀을 듣는 바울의 심정은 어땠을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는 미사어구로 쓰는 괜한 말이 아니었다. 철저한 통회와 자복으로 애통해 하며 회개하는 고백이었다. 그러게!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풍성하였다.

 

말씀을 따라오다 보면 그게 역시 나였구나, 싶다. 내게 더하시는 주의 은혜가 참으로 섬세하다. 늘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인사에서 저들 무리에 섞여 나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데 주께서 돌보시고 세우시고 높이시는 걸 느낀다. 송구한 일이다. 가령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고 뭘 먹을까? 궁리하다 들어간 곳에서 인부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있던 주인 사장을 만났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나는 아이와 군 입대 문제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했다. 그런데 사장이 먼저 나가면서 우리 테이블 음식 값을 같이 계산하는 것이다. 그리곤 꾸벅 인사를 하고 갔다. 나도 나지만 아이가 놀랐다. 우리 교회 건물 사장이야, 하고 설명해도 아이는 이해를 못하는 눈치였다.

 

그저 그럴 수 있는 일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실제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하였다. 저를 따르거나 그 앞에서 말씀을 청종한 일도 없다. 추론하여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감시자의 입장에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저는 확실히 들어 알 수 있었다.

 

보면 늘 하는 게 없는 사람인데 나로 하여금 알게 하신다. 마주친 사장 이모는 느닷없이 목사님, 우리 조카 좀 전도하세요.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말이다. 아이와 함께 <가라사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을 다 마치고 당부하기를 부디 주의 뜻에 따라 살자고 하였다. 복수전공을 할 수 있게 됐다면서 현재 공부하고 있는 심리학과 함께 경영도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 글쎄,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그 흐름은 매우 자연스러워서 굳이 내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온전히 주를 신뢰한다면 범사에 주가 주도하심을 알 수 있다.

 

주께서 귀히 사용하는 인재로 자라갈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2년여 동안의 군 생활이 아이의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시기가 되기를 말이다. 중1 때 우연처럼 글짓기를 시작하면서 글방을 오게 된 것이 어느새 대학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다. 늘 한결같아서 나에게도 큰 위로였고 도움이었다. 같이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게 이처럼 든든한 것이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나 역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주일은 물론 꾸준하게 주중에 성경공부를 하였던 것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다 떼기까지 하였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딤전 1:12-14).” 그러게. 나의 전날에 한심하였던 때에도 같이 보낸 아이다. 시작은 여러 명이 했지만 중간에 다 떨어져나가는 데도 아이만 여태 함께 할 수 있었던 게 주의 은혜다.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이 아이에게도 목격되었다.

 

유난히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울적하였지만 주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겉을 맴돌고 있는 아이들까지도 나로 하여금 기억나게 하심으로 기도하게 하신다. 스쳐지나간 아이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곁에 두시는 이에 대하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나의 일이었다. 어리석고 무분별하였던 나의 아픔의 날들을 떠올리게 하시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후회가 아니라 감사를 더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좀 더 일찍 돌이켰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아니라 그러므로 더욱 몸 둘 바 모르겠는 주의 은혜 앞으로 이끄시기 위한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를 위하고 기도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를 위해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시기까지 한 일이다. 우리의 만남은 그런 것이다. 같이 가는 이 길이 그만큼의 가치였다. 다른 아무 것도 중요한 게 없다. 같이 하는 것 자체가 주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왜냐하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15).” 그것이 일상에서 드려지는 예배였다. 복음이었고 감사였다. 마주치는 사람들을 그리 대하고 같이 하는 사람들과 주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 이제는 사람을 대하는 게 육신을 따르는 게 아니었다. 저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 내가 느끼고 누리는 은혜였다. 내가 저들을 어찌할 수는 없으나 저들을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온 맘 다해 신뢰하는 삶, 그것이 나에게 맡기신 일상이고 사명이고 축복이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