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잠언 4:6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시편 3:3
저녁이 다 돼 노구(老軀)를 끌고 장모가 왔다. 설 명절 때 전달되지 않은 잣과 호두를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바로 교회로 올라와 힘겨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곤 그것만 전해주고 바로 가시겠다는 걸 억지로 붙들고 좀 누워 쉬게 하였다. 아내가 나와 같이 순두부로 저녁을 대접하였다. 전철역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며 생각이 많았다. 한 생을 다한다는 것, 낮 동안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데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마음이었다.
누가 군대를 가고 누군 또 2월부터 정식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린 모두가 처음인 것이다. 누구는 여든을 훌쩍 넘겨 힘겨운 노구를 이끌고 살아본 적이 있었나? 그러는 동안, 지혜를 버리지 말라. 말씀을 준비하면서 강하게 붙든 명제였다. 지혜는 결코 철학적인 용어일 수 없다. 철학은 자기 지식으로 인생을 알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지혜는 종교적인 용어이다. 참 신(神)을 아는 것, 나는 이것이 지혜라 여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유대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바, 그 뜻에 합한 사람을 일컫는다. 곧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 이를 버리지 말라. 모든 걸 다 잃는다 해도,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하신 말씀의 의미를 바로 전달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이런 마음을 두시는 데 감사함이 절로 나왔다. 미처 살아드리지 못하는 삶이어서 송구하였다.
하긴 내가 나에게 실망하는 것도 어찌 보면 허상을 꿈꾸는 탓인지도 모른다. 짊어질 수도 없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머리에 이고 어쩌지 못해 목을 가누지 못하는 게 낙심이다. 현실을 딛지 않은 바람은 망상이다. 실은 하기 싫은 걸 핑계로 하지 못하는 나를 밀어붙임으로 현실에 서지 않아도 되게 하는 교묘한 자기합리화가 실망이다. 이를 성경은 마땅히 바랄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음으로 온전하다고 가르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러므로 좌절, 낙심, 자포자기, 무기력, 실의 등 실망에서 파생한 모든 마음은 거짓되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시 73:15).” 특히 나 같은 유형은 남을 부러워함으로 자신을 탓하고, 이에 실망은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두둔하기 일쑤다. 이게 다 내가 사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내 것으로 여기는 한 별 수 없다. 내 인생이고 내 시간이고 내 몸이라고 붙드는 한, 나보다 못한 이가 잘 되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건 고통스럽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참 힘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저를 그냥 두실 수 있지?
그러는 거 보면 실망보다 달콤한 죄도 없다. 뱉기 싫은 사탕 같다. 울면서도 입에 물고 있는 것이다. 충성이란 현실이지 이상이 아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의 서술이 크게 공감이 간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도 실망하지 않기란 정말 어렵다. 남들은 다들 잘만 사는데 왜 나만 이런가, 싶은. 인생에 있어 출세와 성공은 하나님과 어떤 사이냐의 문제는 아니다. 교회 잘 다니고 믿음을 온전히 이뤄가는 게 이 땅에서의 축복의 척도는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느냐가 행복의 결말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행복과 축복의 근원이 아예 다른 것이다. 관점이 다르다.
그래서 나는 아홉 가지 ‘허탄한 자랑’을 부러워하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첫째,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 이는 시기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두 번째는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기를,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사 47:8).”
셋째는 악을 묵인하지 말라.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5:20).” 넷째, 부자 되려고 하지 말라.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다섯째는 술 취하지 말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이는 방종이다. 알아서 위로를 삼겠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거짓을 꾀하지 말기를,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이는 교묘하여서 거짓이 거짓을 덧대 더욱 견고해진다. 일곱 번째, 스스로 긍지를 삼지 말라.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여덟 번째, 자부하지 말자.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술이란 게 그렇듯이 살면서 우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객기를 부린다. 쓸데없이 용감한 것이다. 아홉 번째, 자신보다 못한 이를 능멸하지 말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10:2).” 은연중에 하대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엉덩이가 뜨겁고 허리는 뻐근한데 말씀이 이끄시는 방향은 전혀 새로운 데여서 고단했다. 충성이란 실제 현실에 있다. 나름 각오 가운데 하나는 같은 본문이라 해도 전에 써둔 설교 원고로 대신하지 않는 것. 이는 사실 새로 이끄시는 맛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그리고 동기전도사와 잠깐 카톡을 하면서도 한 말이 이처럼 아침에 일어나 묵상글을 쓰는 것에 올인하였다! 좀 말이 거창하게 들리는데 실은 이것만이라도 잃지 말자는 생각에서다.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너무 하는 게 없어서 말이다. 한데 또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 같아 아침마다 새롭다. 전날에 내 이야기가 오늘 새로 주시는 한 날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아침에 묵상하는 글만큼만 살아도 좋겠다.
늘 죽음을 벗 삼아 인생을 완주하는 게 슬기롭다. 멸망이 온다 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그런 것이다. 오늘이 현실이고 현실을 딛고 서는 게 충성이었다. 점심 먹으러 다녀온 시간을 제하고 꼬박 몇 시간을 앉았다가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 때의 그 아우성은 감사다. 환희다. 알 수 없는 어떤 만족함. 그것이 단지 설교 원고를 끝내서가 아니라 그처럼 말씀으로 말씀에서 겅중거리는 동안에의 고단함이었다. 한껏 온도를 올려 허리를 지졌다. 금세 잠에 빠져 한 30분 잤을까? 곧이어 쌍둥이 아이가 와서 글을 썼다.
그래 맞다. 실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버려진 소망에도 충성하기’이다. 내가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내가 실의에 빠지는데도 그냥 놓아두시는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을 기대하는 게 충성이었다. 쩔뚝거리며 ‘실버카’에 몸을 반은 굽히고 걷는 장모를 뒤를 따르면서, 인생이란 참 가혹한 것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주신 생을 다하는 게 우리의 의무라면 이를 끝까지 지켜보시는 게 하나님의 권리였다. 어떠하든 주어진 현실을 딛고, 버려진 소망에서도 충성하기. 삶이란 그래서 숭고한 것이었다. 그냥 택배로 부치시지! 퉁명스럽게 던진 나의 말이 부끄러웠던 것도 그래서다. 늙어가는 딸은 다 늙은 노모와 보조를 맞춰 걸으며 웃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바른 이해와 분별이 없으면 애착만이 사무친다. 젊음을 더 향유하려는 애착, 내 것으로 여기는 것들에 대한 병적인 애착이 끝내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애착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왜곡한다. 그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와 고집으로 분수에 넘는 것을 바란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나는 종일 이 한 구절을 웅얼거리며 보냈다.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잠 4:6).”
곧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이와 같은 고백이 나의 남은 생에 가득하기를. 나의 수고도 애씀도 어떤 노력도 아니라, 주께서 나의 방패이심을. 나의 영광이심을. 이내 나의 머리를 드는 이심을. 이로써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주만 바라며 살 수 있는,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3).” 그러므로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24-25).”
곧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6).” 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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