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전봉석 2017. 2. 13. 07:30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언 13:4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2:6

 

 

 

든 자리는 표가 안 나도 난 자리는 크다더니, 휑하여 그 마음이 허했다. 늘 꾸준하여서 마음에 큰 위로였는데, 6주 훈련기간은 영락없이 볼 수 없다니 괜히 우울하였다. 하필 큰 애는 피로를 못 이겨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오지 못했다. 예배 전에 혼자 청소를 하면서 마음에 고이는 여러 생각이 있었다. 중등부 아이 둘을 우선 교회로 인도하자, 그럼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쌍둥이 애들도 올 수 있겠고, 그럼 자연스레 어린아이들도 나오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이곳으로 교회를 옮기셨을까?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3).” 내가 이루고 세우는 게 아닐 거였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8).” 그러므로 내게 두시는 생각과 그 실천이 온전히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으면. 누가 오고 안 오고를 연연해하기보다 또는 한 영혼을 붙들고 쩔쩔매는 게 능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시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그게 그저 내 일이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신 것과 ‘자기를 부인하고 좇으라.’ 하신 것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내 안에 이는 감정도 자칫 교만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였다. 내가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말씀을 붙들고 씨름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오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번이라도 더 주를 바라고 구하는 거였다. 걸레질을 하면서 퍼뜩 드는 생각치고는 그 이해가 선명하였다. 저쪽 군포에 있을 때는 이제 그 소용이 다했던 것이다. 올만한 아이면 여기까지도 올 것이니까, 그래서 이곳으로 터를 옮겨 이제 여기 아이들이었구나! 그러는 동안 내 안에 낀 기름을 제하시는 거였다. 마음에 둔 좌표를 다시 설정하신다.

 

결국 기도란 내 안의 그리스도가 하신다. 나에게 필요한 건 아이에 대한, 한 영혼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말씀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모든 게 마치 물 흐르듯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곁에 이웃하고 있는 사무실 사람들과도 그렇고 우리 가족들 간의 역할과 마음의 다짐도 그렇고 서로가 말씀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이 모든 게 주를 더욱 간절히 바라게 하시는 일이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는 순탄한 길보다 뒤엉킨 길에서였다.

 

공연히 마음만 우울하던 게 부끄러웠다. 신기하게 그 자리를 외조카 아이가 채우고 있었다. 앞서 아이가 하던 성경공부 시간을 얘가 하게 됐다. 왔으면 하고 바라던 아이는 기어이 오지 않았다. 다시 또 반복하려는지. 사람 참 끈질기게 미련하다. 죄의 속성이겠으나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모양이다.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동안 별 수 있나?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러한 갈등은 아예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주장이 강한 경우는 그 안에 갈등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 가운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무엇이 하나님과 맞서는지 알게 된다. 왜 주의 법에 굴복하지 못하는지를 알 때 순종을 향해 나아간다. 그럴 때 가장 힘든 시험은 역시 기다림이었다. 때로는 조바심 때문에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건 영적인 도태, 게으름의 원인이 불순종이었다. 자신이 그려놓은 어떤 꿈을 바라면서 그러는 동안 기다림을 빙자해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 오늘 잠언은 분명히 한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어찌 보면 당연한데, 게으른 자의 아집은 참으로 두텁다. 어떻게 할 수 없다. 결국 끝장이 나봐야 한다. 하지만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손에 닿는 걸 무던히 하는 게 부지런함이다. 내가 원하는 큰 일이 아니라 내게 두시는 작은 일들을 말이다.

 

주는 내게 그걸 가르치신다. 소망은 결코 허황되지 않다. 막연하지 않으며 자기 주관으로 꿈꾸지 않는다. 두신 바 ‘그 일’을 할 뿐이다. 기도했고, 내 안에 바람을 두셨고, 나는 생각함으로 구하고, 구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느라 당장 곁에 두신 일을 외면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예화가 그걸 말해주는 것이다. 다들 나름은 바빴다. 쓰러져 강도 만난 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럴 수 있겠다. 너무 바쁘다. 너무 할 일이 많고 너무 분주하여서 실은 곁에 두신 것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구상과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 시간이 없는 것이다. 저의 부산함은 부지런함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 마음에 풍족함이 없이 늘 쫓기듯이 산다. 그렇구나. 그것 역시 자기를 주장하는 일이었고 그러므로 갈등을 충동하는 것이었구나. 다시금 내게 주시는 마음은 한 아이를 품고,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나는 여태 그래야 한다고 스스로 몰아세웠는지도 모른다.

 

나의 열망은 한 영혼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어야 했다.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지 아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게 아니었다. 결국은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아! 그런 고백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가르치려면 공부해야 하고, 공부란 나를 채우는 일이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 그러므로 두신 생각과 마음이 실은 주의 것이었구나. 마치 내가 좀 의로운 사람이라 저들을 품고 씨름하는 게 아니었구나. 아, 하나님은 온통 나에게 대한 관심뿐이신 것이다.

 

일찍 교회에 나와 청소를 한다. 30분쯤 땀이 흥건할 정도로 쓸고 닦고 예배를 준비하다 그게 곧 예배였다. 어릴 적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청소했던 기억이 났다. 투덜거리는 마음이 더 많았지만 그게 다 예배였었구나!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오고 못 오고, 겨우 몇 명이 예배를 드리고, 우리의 형편과 사정이 참으로 별 볼 일 없어도 하나님께는 그런 게 전혀 관심의 기준이 아니셨다. 그래서 너! 바로 나 역시, ‘내 양을 치라’에 해당되는 것이다. 먹이고 치고 먹이는 일이 마치 남을 향한 것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나도 주의 양이었구나! 새삼 그 느낌이 선명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가만히 돌아보면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억지는 언제나 내 안에서 일었지 실제 이루어지는 일은 참으로 순탄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로 하여금 더욱 말씀을 사모하게 하시려고, 혼자 있게도 하시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말씀만 붙들게 하시었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시편의 말씀이 주옥 같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 이 가치를 알게 하시려고 때론 모진 값을 물게도 하시는 거였다. 얼마나 거친 세상인가?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8).”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 때로는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잠 13:12).”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어치를 놓치지 않게 하신다.

 

한 영혼 한 아이가 소중하지만 거기에 열정을 다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주가 하신다. 나는 다만 내 안에 그리스도시라. 저를 향한 열망으로 더 바라고 구하게 하시려고, 내 안에 안달도 복달도 그냥 놓아두시는 거였다.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시려고…. 찬송하고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