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잠언 11:30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10:17-18
가끔은 황홀경을 느끼기도 한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다. 가령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고개를 들었을 때 뽀얀 햇살이 가득 밀려와 글방 안에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을 때, 등짝에는 땀이 배어 창을 열었을 때 날선 추위가 코끝을 찡하게 할 때, 물끄러미 밖을 내려다보다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나와 저 밖의 경계에 대해 모호할 때. 잠깐 점심을 먹고 온 것 말고 종일 들어앉아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오후께 쌍둥이와 그 동생아이가 왔다. 같은 동선을 따라 이어지는 일상은 평온하였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열외를 경험하는 것이다. 교회 월세가 밀려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새로운 아이를 보내신다. 뭐랄까? 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데 저절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격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무엇이 가볍고 무엇이 무거운가를 알겠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그렇구나.
어떤 시달림 혹은 당혹스럽고 불안한 것들이 남다른 게 아니라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제는 저와 다른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그 세상을 마주하는 나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과 그 세상 가운데서 자신이 바뀌려고 하는 사람은 다르다.
아내가 일찍 끝내고 딸애와 같이 교회로 올라왔다. 새로운 아이가 논술 교육비를 묻고, 아마도 문의가 올 거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 교회로 오는 아이들에게는 교육비를 따로 받지 않기로 하였다. 내가 구획하고 가격을 매겨 어찌 수입을 내려고 하는 게 옳지 않은 것 같았다. 법적으로도 비영리로 신고를 하고 교육비를 받으며 아이를 가르친다는 게 덕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무료로 하자. 마음이 어려우면 형편 되는 대로 후원금 혹은 헌금으로 받겠다고 하자. 이 또한 조건은 아니다. 서로 그렇게 마음을 정하였다. 예배를 드리고 올라왔다.
이게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게 너무 단답형 같은 사고라 위험하지만 아내도 이제 그와 같은 원리를 안다. 가령 새로운 아이가 시작하면 그 첫 열매를 바친다. 그만두는 아이였는데 은혜로 다시 보내시면 그 수입은 하나님 것이다. 그때마다 가장 선명하게 적용되는 게 물질이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주께 감사하면 이미 충분하였다. 늘 쫓기듯이 매달 도래하는 공과금과 월세와 카드비와 각종 대출금이자 따위에 분분하여 있지만 그래서 또 그것 때문에 성실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감사를 배운다.
우리는 이제 그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 20:17).”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하신 데는 제반적인 형편과 사정을 책임져 주시는 게 된다. 설령 없다면 못 먹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텐데 이 또한 성경에 이르심을 따르면 된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모든 게 같겠으나 특히 물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들의 백합화를 보라.’ 이 단순한 논리로 성경의 보장이 확보된다. 물론 늘 궁상인 것 같으나 넉넉해 보이는 이들보다 풍족하다. 참 신기한 게 우린 월세를 밀리지 않았다. 보니 옆 사무실도 옆옆 사무실도 보증금을 다 까먹고 있었다. 채 일 년도 안 돼 다른 일을 모색하고 그러느라 또 새로운 집기를 사들인다. 가끔 와 하는 첫 마디가 죽겠습니다, 이다.
그래 맞다. 하나님이 하시게 하는 게 순종이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우니까 복종을 통해 배운다. 때론 억지로라도 구보를 하는 것이다. 행군에 따른 피로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게 어떻게 사람이겠나? 다만 그러는 동안 알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더하시는 것이다. 유치한 적용 하나 더, 그렇게 서로 마음을 정하고 나올 때 뜬금없이 누가 카톡으로 모 피자 할인쿠폰을 보내왔다. 자기 동네에는 없는 것이어서 그랬단다. 덕분에 엄두도 못 내던 값의 최신 피자를 맛보았다는. 하나님이 바로 토닥토닥하시는군, 생각하였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게 자칫 모호하여서 사이비를 조장할 수 있지만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느낀다. 사는 게 사역이다. 사소한 게 헌신이다. 손에 닿는 일을 하는 게 목회다. 뭐 그렇게 대단하게 꿈꿀 게 아니다. 레이몽의 ‘꿈꿀 권리’라는 몽상집이 있지만 그런 유희가 사역이 될 수 없다. 뭔가 원대한 꿈을 그리고 그에 맞춰 주의 일을 감당했던 이는 없다. 오히려 주님은 그런 자를 나무라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성경은 일관되게 가르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러니 가장 성경적이고 현명한 판단은 내게 오늘 더하신 일상을 사는 것이다. 아프면 아픈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부하면 부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마치 우리가 그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썩 바람직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이 땅에 보내신 게 아니다. 엊그제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도 그것이다. 몸의 질병에 종노릇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아프고 힘들다. 때론 낙심하고 실망한다. 좌절도 하여 신음한다. 하지만 이젠 그것으로 주를 붙든다. 아프면 아파서, 낙심이 되면 낙심한 채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더는 환경적인 요인으로 주를 사모하는 마음이 주춤해선 안 된다. 아니, 주춤하면 주춤한 대로 주를 또한 마주하면 될 일이다. 실망은 결국 우리의 실상을 마주하게 해준다. 내가 얼마나 헛된 꿈을 꾸고 있었는지.
늘 부대끼며 힘들어하는, 현실의 전방에 놓여있는 아내는 어찌 받아들였을까? 글방을 교회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이 평안하기를 기도하였다. 의당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음으로 주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우린 늘 당장의 세파에 쩔쩔매니까. 하지만 것도 주 앞에 내려놓으면 될 일이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죽이 되던지 밥이 되던지, 오늘에 두신 이의 크고 놀라운 인자하심을 신뢰하며, 이로써 우리의 열매는 생명나무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나는 다만 쌍둥이 아이를 볼 때마다 또한 우리 초등부 아이를 대할 때면 어떻게 교회로 이어올까? 어떻게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할까? 이 모든 여의치 않음을 주께 아뢰며 기다리는 것이다. 대나무도 싹을 틔우는 데 4년이 걸린다는데!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내가 오늘 취해야 할 마음이고 생활태도였다. 무던함으로 그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이게 나아지면, 저게 개선되면, 이렇게 돼서 저렇게 되면, 하겠다는 식의 바람은 모두 ‘미루는 영’이다. 게으른 자의 특징이다.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한다.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 가을에 밭 갈지 않는다.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한다.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한다. 온통 이유와 변명과 핑계로 덧대는 것이다. 이에 반론을 제기하듯 오늘 시편의 말씀은 교훈이 크다.
먼저는 그 소원이 겸손한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무엇을 바랄 때 대체로 우리의 바람은 겸손에 의한 게 아니라 자만에 따른 것이다. 이 정도는 돼야! 싶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허상을 꿈꾸기 일쑤다. 하나님은 결코 이에 응답하실 리 없다. 하나님은 겸손한 소원을 훈련시키신다.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겸손한 소원은 ‘이만하면 됐다’는 것이다. 이미 충분하여서 이걸로 행할 수 있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주신 바 그 처지와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결국 속이는 저울은 남을 속이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속이고 그 속임으로 하나님도 속이려 든다. 가령 한 달란트 받은 자의 경우다. 저는 남들과 견주어 자신의 마음을 속였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 25:24-25).” 그리고 주인을 왜곡함으로 모두를 속이려 했다.
주께 모든 걸 감사하며.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7-18).” 그러므로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 11: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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