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잠언 12:28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시편 11:1
이상하다. 이상할 정도로 이상하다. 전날 아이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녀석이 다음 주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게 돼서 인사차 들르겠다는 거였다. 누군 한 달 전에 전역을 했고 누군 이제 일병을 달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3 때까지 수업을 했으니 거의 글방과 함께 한 아이들이었다. 정신병원을 퇴원한 아이도 같이 왔어야 하고, 아직 전역을 안 했을까? 싶은 아이도 왔어야 했다. 아무튼 그렇게 그냥 인사를 왔다, 싶었는데 한 녀석의 낯빛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뚱하니 불안해하였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서도 내내 수저들 들지 못했다. 워낙 자아가 강한아이였다. 수업도 거의 내키는 대로 굴던 게 기억났다. 무슨 일이냐? 물어도 말을 안 해서 그냥 두었다. 같이 올라와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책상에 엎드리고 시무룩하니 안절부절못하는 것이다. 다그쳐 묻자 공황장애 약을 깜빡 잊고 안 가져 왔다는 거였다! 거기에 허리디스크로 그 통증이 심하다고 하였다. 제일 건강하고 제일 아집이 센 아이가 말이다. 안정제를 한 알 주고 진통제와 근육이완제를 같이 주었다.
이런저런 사연이야 있었지만, 지난 주에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녀석은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다닌다고 했다. 어제도 술 먹고 새벽 6시에 잠드는 바람에 같이 오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자신도 늘 술추렴인 걸 자랑처럼 뇌까렸다. 답답한 노릇이다. 전적을 들어보면 형이 모 대학에 입학했다고 속여 부모는 외제차를 선물하고 좋아라 했는데 몇 개월 뒤 그게 다 거짓말로 드러났다. 얘도 대충 어떠해서 그런지 짐작이 되었다.
돌아와 아내에게 이 말을 들려주었더니 뭔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중1 올라가는 아이 반편성고사 때문에 보충을 해주었던 모양인데, 엄마가 자신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단다. 어떻게 하면 그 기대에서 벗어날지를 고심하며, 마음은 이를 감당할 수 없으니 자꾸 잠에 빠져들었다. 한편으론 속상하고 한편으론 화가 나서 아내 역시 기진하여 있었다. 그러니 또 아래층 아이에게도 가 봐야 하는 것인지… 아이엄마까지 전화를 받지 않아 공연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참 이상하다. 내일 예배에 꼭 와라! 하고 통화를 하는데 시큰둥하니 대답을 하고 끊는 아이에게 더는 뭘 어쩔 수 있을까? 겁이 없다. 마치 막 살기로 작정한 인생들 같다. 아이엄마는 병적으로 아이에게 집착하고 아이는 그 터무니없는 기대 때문에 시들어간다. 한데 더욱 놀라운 건 아이엄마가 저 먼 동네에 있는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다. 어릴 땐 아이도 따라 갔다가 요즘은 안 다닌다고 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사실에 뭔가 짚이는 것 같았다. 모든 고통은 죄의 결과다. 고통에 대한 납득이 없을 때 이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방식이 분노로, 우울로, 좌절과 실패는 낙심과 원망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열등감으로 몰아세우기엔 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게 있다. 누군 끝내 주를 바라고 누군 기어이 자기 의를 따른다. 결코 고통이 축복은 아니다. 그것으로 온전한 신앙을 만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는 엄연한 죄의 결과다. 하지만 징계의 의미로 사용되는 때도 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믿는 자와 믿지 않는 그 관점의 차이가 아닌 실제의 차이를 드러낸다.
아이에게 주일을 권하고 주 앞에 나올 것을 바라지만 한사코 농담으로 여긴다. 고통으로 더욱 피폐하고 척박한 영혼이 있고 고통으로 비로소 풍성해지는 영혼이 있다. 누군 그럴 수 있고 누군 기어이 그럴 수 없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가령,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와 같은 말씀은 아무도 요구할 수 없다. 하나님도 강제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어떻게 누구는 동의하고 따르는지, 그럴 수 있는 차이를 모르겠다.
또한 표면적인 변화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이어서 거기까지 이르는 동안의 시간과 고통을 어찌 환산할 길이 없다. 휴가 중이니까 내일 예배에 와라, 하고 아이에게 말했을 때 (약 기운이 돌고 조금 살만해졌는지) 아이는 대뜸 ‘모처럼 휴간데 푹 쉬고 오후에 술 먹어야죠!’ 하는 것이다. 내일 예배 시간에 와, 하고 전화 저편의 아이에게 말했을 때 ‘봐서요!’ 하는 것이다. 얘, 주일 날 나와라, 하고 말하니 중학교 아이도,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아이도 그저 피식, 웃고 만다. 애들도 그 부모도 이제 나를 아니까 내가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이와 같은 고백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새삼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처절한 몸부림은 결국 자신들의 몫이다. 저들은 떠났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 안타까움에 물으셨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67).”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주님은 자꾸 ‘이상한 사람들’을 곁에 붙이시는 것일까?
나 역시 쩔쩔매면서 약병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나야말로 왜 불안하고 초조한지 알 수 없었다. 누구보다 자아가 센 아이였는데 저처럼 기운도 못 차리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게 어떤 건지 잘 안다. 참아 봐, 이겨내 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엄마는 아이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착을 하는 일에, 아이는 병들어가며 신음하듯 도망칠 자리를 찾듯 자꾸 잠에 빠져들고, 기껏 엄청난 비용과 시간과 가까운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고서도 퇴원하고 하는 일이 다시 술에 빠져드는 것이라니!
사람이란 결국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고통이 없으면 소망의 실제도 없다. 이 막막한 현실은 장차 우리가 들어갈 저 천국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똑같은 상황에서 누군 절망하고 누군 소망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자기를 부인한다’는 게 얼마나 신비한 일인가?
안 되니까, 그게 안 돼서 서로가 서로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안겨가면서도 자기고집을 꺾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구원에도 고통이 따랐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이는 주께서 대신 짊어지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이를 알 때 우리는 기꺼이 거룩의 고통을 따른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더는 내가 어찌 해보려고 하는 의지를 모두 주께 내어드리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로써 나에 대한 권리를 주께 내드린다. 그게 더 쉽다는 걸 이젠 잘 안다.
아이의 구구한 사연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보면 너무 잘난 게 문제다. 그 부모의 절제할 수 없는 허세에 대해서도 뭐라 할 말이 없다. 그저 좋은 대학을 노래하다 이에 부응하자 갓 스무 살이 된 아이에게 외제차를 사준다. 카드를 건넨다. 마치 다 이룬 것처럼 기뻐하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고 아이는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쳐 망가진 차를 지하주차장에 숨기고 있다가 적발됐다. 악순환이다. 악의 알레고리가 선명한데도 괜찮다 괜찮다고 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유행처럼 번진 워킹홀리데이나, 고작 시간 반 거리를 자취를 하여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일이나, 지독하게 수동적인 아이와 너무 깊은 자기 소외의 늪에 빠진 아이에게 나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후께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쌍둥이 아이들이 글을 쓰러왔다. 다음 화요일에 졸업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짜장면을 사주겠다고 하자 화들짝 놀라며 거절한다. 동생 두 명과 같이 오는 거니까 덜 부끄러울 텐데도 기어이 싫다고 하고 돌아갔다. 난감한 노릇이다. 네, 아니오, 대답조차 부끄럽고 성가셔서 나 몰라라 하니 이걸 어떻게 하나?
아이엄마에게 좀 말을 할까 하다가도 이게 그렇다. 뭐라 말을 건네면 마치 ‘네가 뭔데 우리 애들을 이상하게 취급하느냐?’ 하는 식이다. 그러니 그게 당신 때문이다! 하고 말해줄 수도 없고…. 속상하고 화가 난다. 우리의 고통은 송두리째 죄의 결과다. 그럼에도 한사코 죄가 없다고 부인하며 살려고 하니 몸은 부대끼고 마음은 후패하며 서로의 관계는 상처뿐이다.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요 12:36).” 아이들이 돌아가고 누웠다가 이 말씀을 묵상하였다. 그래 맞다. ‘빛이 있을 동안’이 있다. 이처럼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혹은 안도와 기쁨으로 주의 길이 선명하게 여겨질 때 곧 성령의 인도하심이 선명할 때, ‘빛을 믿으라.’ 실제 그 빛은 묘연하여 정말 이 길이 맞나? 대체 이 아이들을 내가 어찌 감당할까? 주께서 바라시는 게 무얼까? 암담할 때가 오나니, ‘빛을 믿으라.’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어야 빛도 없는 어둠 가운데서 빛을 믿을 수 있다. 그러니까 내게 두시는 이 답답한 마음으로 이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빛을 믿으라.’ 주가 하신다!
뭐라도 하면서 기진하면 어떤 보람이라도 있을 텐데 이건 정말 속수무책으로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욱 주를 간절히 바란다. 비극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비록 저들이 여전하다 해도 저들을 우리 곁으로 밀어붙이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향기라. 누가 언제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어요! 아이의 항변이 떠오른다. 그저 그러려니,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하는 소리에 익숙해져 있던 아이는 나의 발칙한 대안과 제시에 아찔한 것이다.
이러는 게 하나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고통을 통해 그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예수를 전파하려 함이다. 그 길은 명료하여서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 12:28).” 오늘 잠언은 일갈한다.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 그 고통과 수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자기 몫이라. 어쩌겠나? 오전에 쉬고 오후에 술 먹으러 가야 한다는 말이 좀 전까지 불안에 쩔쩔매며 금방 죽을 것처럼 굴던 사람의 말이라니 그게 더 두려웠다.
그리고 나의 말을 농담으로 받는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시 11:1).” 아, 별 수 없다. 갈 데까지 가야 하는 데야 별 수 없다. 이상하고 이상하였다. 죄란 참으로 모질었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되뇐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0) | 2017.02.14 |
---|---|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0) | 2017.02.13 |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0) | 2017.02.11 |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0) | 2017.02.10 |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0) | 2017.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