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17. 2. 14. 07:42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잠언 14:8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길을 안다고 그 길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길이 힘들다고 그 길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인생이란,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본디 우리는 그렇듯 갈등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느라 주의 음성을 외면하기까지 한다. ‘네가 어디 있느냐?’ 찾아오시는 이는 언제나 주님이었다. 내 길이 아닌가봐! 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신자였다.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등은 내 주장이 나를 주관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주저함이란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까 모색하느라 그렇고, 머뭇거림이란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내딛는 발걸음의 엉거주춤함이었다.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이게 복되었다. 왜냐하면 죄 된 우리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적당한 살림이 아니라 핍절된 형편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를 명료하게 정리하신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모처럼 동기 내외가 왔다. 둘째를 낳고 백일을 맞았다. 예쁘게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닐까? 주신 삶에 충실하면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갈등하기.’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 다른 궁리를 해보지만 여의치 않은 것은 내가 좋으면서 하나님도 좋은 걸 찾으려니까 어렵다. 내가 좋으면 하나님과 좀 거리를 둬야겠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거면 내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닌 것이고! 삐악거리는 두 아이와 아내를 보며 가장으로서 남자의 슬픔은 어찌 설명하기 어렵다.

 

이를 잠언은,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10).” 누구에게 말한들 결국 돌아오는 건 내가 못난 탓인 것만 같고, 혼자 앓고 있자니 속만 타들어가고, 그러니 아주 가끔은 ‘하나님이 없는 듯 살기.’ 저들의 삶이 왜 그처럼 부러운지.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다들 잘만 사는데 왜 우리만 이래야 하나, 싶은….

 

뭐라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없었다. 나야말로 실패자가 아니었던가? 애들 때문에도 이 길을 갈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고 먼 길을 자처했던 자가 무슨 말로 위로를 더할 수 있을까? 헌데 거짓말처럼 저들이 돌아가고 우연히 펼친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말씀이, 요한복음 15장 16절이었다. 한 마디로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게 아니다. 이 길을 내가 택한 게 아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문득 이 말씀이 주는 자유함이 컸다.

 

왜냐하면 다음 구절의 결과가 이내 내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즉 책임이 내게 있지 않다는 소리로 들린다. 오히려 하나님의 용기가 놀라울 뿐이다. 대체 뭘 보고 나 같은 사람을 선택하신 것일까? 나를 신뢰하시는 그 의지가 민망할 정도로 난처한 것이다. 뭘 보고 내가 승리할 거라 자신하시는 것일까? 도대체 내게 무슨 선한 것이 있어 열매를 맺게 하고 열매가 항상 있게 하신다는 소린지, 원.

 

그러자 다음 구절이 이를 뒷받침하였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내가 아니었다.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되었다. 그걸 어떻게든 내가 좀 해보려고 아등바등 굴려니까 복받쳐오는 어려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히 내 옷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 맞다. 내 길이 아닌 것이다. 예수의 길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이 땅에서의 승패고 그 결과를 누리며 살자는 것인데, 성경은 한사코 그게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볶이는 건 당연했다.

 

나는 저의 볶임이 갸륵하고 소중했다. 나는 휘저으며 멀리 멀리 도망치던 길이 아닌가? 아이들 때문에도, 먹고 살자고 드는 조바심에도 나의 주저함은 갈등을 무시하고 자기주장에 함몰되었더랬다. 그리고 어울렸던 사람들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얼마나 동경하며 살았던가! 어쩜 그렇게,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곁에 두신 것처럼 나름 성공하고 출세한 자들로 내 곁은 화려했다.

 

의사 내외는 대놓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이었는데 손대는 일마다 대박을 쳤다. 어디 단독주택을 경매로 싸게 구입했는데 이듬해에 세 배로 뛰었다. 죽은 걸로 치고 서로 보지도 않고 살던 아버지가 죽으면서 유산으로 남긴 태백의 땅이 천문학적인 값이었다. 뒤늦게 얻은 아들은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전국을 호령했다. 그뿐인가? 늘 나의 선생으로 지내던 이는 영어교사를 그만두고 국내의 제일가는 모 방송 뉴스기자가 됐다. 어릴 때 잠깐 믿었다는 하나님을 뒤로 하고 있는 저의 삶은 늘 나의 교본이 되었다. 기자로서 그 역할을 강단 있게 소화하는가 싶더니, 제2의 인생 계획을 세워 기자를 그만두고 외국인 관련 국내 콘텐츠 홍보 관련 사업을 추진했다. 어엿한 CEO가 되어 세계를 누비며 그 명망을 드높였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더 잘 돼요. 회교로 개종한 어느 아이의 일갈이었다. 기독교를 믿을 땐 하는 일마다 안 풀리더니 이슬람교도가 되면서는 모든 게 다 승승장구한다는 거였다. 자, 나는 저들을 부러워했다. 저들은 넘어져도 참외밭이고 자빠져도 돈을 줍는 격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개척교회가 빚에 쪼들리며 파선 직전인 항해를 하고 있었고, 형제들은 되도 않는 말씀에 따라 도약을 하려하고 있었다. 나의 서른하나 마흔 반은 그러했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시 73:14).” 그리하여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15).” 부모 형제에게 모진 소릴 해가면서도 나는 저들처럼 되고 싶었다. 한데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6-17).” 아멘.

 

지금에서야 확신하는 것이 나는 이제 저들이 부럽지 않다. 그리고 나의 서른하나 마흔 반을 되돌릴 수 있다면 기꺼이 뭐라도 하겠다. 후회가 아니라 감사다. 내 안에 이는 아쉬움조차 선한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그래서 주의 은혜가 더욱 선명하다. 죄스럽고 송구하여 나는 때로 하나님이 불쌍하다. 그 용기는 대체 무엇일까? 뭘 믿고 나를 선택하신 것일까? 나 같은 자를 어쩌자고 사랑하신 것일까? 내가 주를 택했다면 후회라도 할 것인데, 주가 나를 택하신 것이니 그저 면목이 없을 따름이다.

 

이를 어찌 나의 젊은 동기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까? 살아서 굳이 살아봐야 알겠다는 고집보다 무서운 게 없다. 아이 하나는 공공연히 그걸 되뇌며 여행을 떠났고, 약을 먹으면서도 술에 절어 살고 있으며, 혹시나 다시 엮일까 하여 시선을 다른 데 두고 아는 체도 않는다. 그 모습이 전부 내 것이었다. 나의 서른하나 마흔 반은 그저 송두리째 자비하심이고 긍휼하심이다. 돼먹잖은 인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그 하나님의 구애가 참으로 비참하였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욕되게 굴며 없었으면 좋겠다고 뿌리치고 단념하고, 맹세하여 저주까지 하며 발버둥치고 살았던 것인데…….

 

지금도 보면 의식하고 동의하며 주의 길을 가는 건 아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때론 너무 성의 없이 구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동의하시고 신뢰하시고 오래 참고 또 참으시면서 보폭을 맞추시는 걸 느낄 수 있다. 때론 애매하여 잘 모르겠다고 나자빠져도 주님은 또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면서 점점 나의 생활은 단순해지고 명료해지는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 없이는 단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길이구나! 내가 힘든 건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아집과 꺾을 수 없는 고집 때문인 것이다. 내 주장이 나의 갈등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가, 하는데 관심 있으신 게 아니었다. 내가 행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데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늘 관심을 기울이시는 거였다. 뭘 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사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관계냐 하는 게 뭘 하냐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서 내가 스스로 내 살 궁리를 도모한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말이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하는 고민과 이 옷이 내 옷이 아닌 것 같다, 하는 어려움은 그러므로 당연한 것이었다.

 

죄 된 몸으로 사는 동안 나는 죽을 때까지 내 길이 아닌 것 같은 이물감에 시달리는 게 당연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와 같은 곡성이 찬송으로 드려지는 게 성도의 삶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그와 같은 갈등을 겪고 사는 게 성도의 바른 특권이었다. 이 길이 아무렇지 않다면, 이 옷이 내 몸에 딱 맞는 ‘적성에 맞는 일’처럼 여겨진다면 그는 사기꾼이거나 바리새인이 분명할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이와 같은 악전고투가 보람이 될 줄이야! 누군 타종교로 개종하고 비로소 평안을 누렸다고 하고, 누군 다원주의적인 하나님을 바라면서 참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고, 누군 스스로 무신론자가 되어 하나님 없이 사는 게 비로소 행복이라고 말하지만 우린 주를 사랑함으로 더욱 처절하고 끔찍한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는 주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이었다.

 

슬기로운 자는 좋은 길을 가는 게 아니었다. 자기 길을 아는 것이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드물다 해도,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알 수 없는 기쁨의 근원이 그 길에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