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전봉석 2017. 2. 16. 07:43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잠언 16:26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편 15:1

 

 

 

주께 잘하려고 하는, 그것이 ‘자기 의’일 때 믿는다는 일이 피로하게 여겨진다. 선뜻 아이는 사람을 홀리듯 열심이었다. 성경공부에 자기 묵상에 하루가 멀다 하고 글방을 드나들면서 당장이라도 뭔 일을 낼 사람처럼 굴었다. 나서서 다른 아이들을 챙기고 예배 후에 먼저 말을 걸고 다가가 친근함을 드러냈다. 일순간 모두에게 주목 받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급 피로감에 싸였고 채 일 년도 되지 못하고 ‘다른 교회’로 간다고 떠났다.

 

어제 새로운 아이가 세 명 더 같이 수업을 하게 되었다. 전에 하던 아이들이 주눅 들 정도로 참여가 적극적이었다. 한 시간 반 수업에 얼추 한 시간쯤은 열심이었나 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뒤틀고 다른 소릴 하고 급기야 드러눕기까지 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 엄마 둘이 인사 겸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궁금하다며 들렀다. 그런데 그때, 왜 하필 앞서 저 아이가 문득 생각난 것일까? 그 열심이었던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오늘 잠언의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게 그것이다. ‘고되게 일하는’ 것이 어찌 나쁘다고 할 수 있겠나만 그런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일 때문인지 식욕-성취욕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결국 이것이 선하지 못한 것은 그 열심과 수고가 그의 입이 독촉하는 것이었다. 반짝 열심일 수 있으나 모름지기 지구력의 문제다. ‘인내와 끈기’로 종합되는 절제를 성령의 열매 가운데 맨 마지막에 두신 까닭도 그 때문이다. 가장 어려우면서 가장 모든 것에 소용이 있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앞서 여덟 가지의 열매가 유실되지 않으려면 기어코 절제의 덕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이 절제되지 않으면 집착이 되고, 희락이 절제되지 않으면 쾌락주의자가 되고, 화평이 절제되지 않으면 미지근한 자이고, 오래 참음이 절제되지 않으면 은둔형 경건주의자가 되고, 자비가 절제되지 않으면 헤픈 사람일 뿐이고, 양선이 절제되지 않으면 스스로 결핍에 빠지고, 충성이 절제되지 않으면 무모한 국수주의자가 되고, 온유가 절제되지 않으면 맥없이 끌려 다니거나 싱겁다.

 

이 모든 건 허위로 꾸며 그리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절제는 다르다. 하나님 앞에 서면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가장 쉽지만 약간만 비껴서도 엄청난 수고와 애씀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열심은 무엇보다 악하다. 저는 늘 억울할 따름이다. 할 만큼 했다고 여기는 것에서 하나님의 열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랬던 자의 특징이 ‘낙심과 게으름’으로 돌아온다. 단테의 지옥에서 그 맨 밑에 있는 자들이 낙심하고 게으른 자였다.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자기 아집이 실은 나름의 수고와 애씀에서 온 낙심이기 때문이다.

 

‘쌍둥이 아이’들의 지독한 무력감이 실은 그들 부모로부터 거절당한 횟수와 비례한다. 뭐 하자, 어디 가자, 그리 해줄게, 하였던 것들이 번번이 공수표로 날리고 심지어 이를 요구할 때 저당 잡히는 ‘당돌한 아이’라는 낙인이 오늘 날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이’로 전락하게 만든 것이다. 곁에 앉아 나는 자꾸 아이를 웃기고 싱거운 사람을 자처하는 것은 그래서다. ‘어른들은 다 그래’ 하는 적개심을 풀기 전까지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싸워야 하는 게 시간이다. 오랜 기다림은 그 자체로 절제덩어리다.

 

이때 절제마저 홀가분하게 다가오는 것이 주를 위한 삶이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나대는 세 아이를 두고 짜증이 일었지만 저들 또한 주가 보내신 것이면 굳이 내가 할 게 없었다. 당연히 나는 안정제를 먹었다. 것도 수업 전에 또 사장이 건너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애들 올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감만 더하였다. 왜 그처럼 긴장하는지, 나는 더 이상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슬그머니 약을 한 알 입에 물고 그저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되게 하시는 이가 되어지게 하시는 이일진대 나는 거기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 중요하였다. 주만 바란다는 건 모든 환경을 초월한다는 게 아니라 그 환경을 조성하신 이를 신뢰한다는 것이다. 그럼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소된다는 게 아니라 그 문제와 씨름하되 전에처럼 죽어라 하고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놓아둠으로 벌써 오십 보는 직격을 하는 셈이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게 결과에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전엔 그처럼 앞서 결과를 예단하고 예측하여 대안을 강구하고 나름 그 수고에 수고를 더하는 게 지혜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를 지치게 하는 건 결과가 아니라 수고였다.

 

애쓴다는 말 어쩌면 이것보다 교만한 것도 없다. 누가 수고하고 애써 주의 장막에 머물 권한을 갖는가? 오늘 시편은 이를 되뇐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그리고 나열되는 행위들은 결국 그리 하게 하시는 이의 은총이 아니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정직하게 행해야 하지만 정직을 염두에 두면 정직을 애쓴 자기 수고만 도드라지는 것이다. 공의를 실천하는 것,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않는 것, 악을 행하지 않고 비방하지 않는 것, 망령됨을 멸시하고,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고, 서원을 변개하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고, 뇌물로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는 것,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시 15:3-5).”

 

그럴 수 있다고 여겨 그리 고하는 게 아니다. 가만히 다시 1절을 묵상하면, 그럴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나? 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다. 이렇게 저렇게 행해야 하고 그런 일을 행할 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텐데,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수 없다고 탄회하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를 더욱 선명하게 알게 하시는 게 산상수훈의 말씀이다. 전에는 나도 그런 복을 바랐지만 이제는 내가 결코 그런 자가 될 수 없음을 여실히 느낄 따름이다. 이에 주의 도우심 뿐이다. 은혜밖에는 답이 없다. 은총이 아니고는 도무지 해결이 안 되는 일이다.

 

남보다 더 수고하고 애쓴 자가 완강한 까닭도 그렇다. 대체로 자수성가 한 이가 완고함은 자기 절제가 자기 거여서 그렇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싶은 억울함과 분함의 증거로서 저는 누구보다 자신을 자신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인자가 무엇이기에!’ 오늘 외조카아이와 처음 성경공부를 시작하는 데 있어, 무엇을 교재로 할까 하다 아버지가 전에 주신 단편의 원고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이내 우리 입에서 주를 찬미하는 소리가 드려지기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나를 알 때 비로소 주의 은총을 바란다. 내가 뭘? 하는 동안에는 어림없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늘 거저먹는다. 아이엄마들이 교육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서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글방이 교회인 것과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하여. 글쎄, 알아듣거나 말거나 하나님이 내게 두시는 마음으로 말하였다. 의아해 하는 표정이 조금은 통쾌하기도 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결과는 주의 것이다. 나는 다만 하나님을 행한 나의 진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결국은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바울사도의 진한 고백을 사모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정말 그럴 수 있냐? 누가 물으면 나는 당연히 쭈뼛거리고 빙충맞게 주저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럴 수 없어서 더욱 사모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도 싫고 주를 위해 사는 것도 자신이 없다. 영화 <사일런스>를 다운받아 보다 끄고, 보다 끄고 하면서 결국은 다 보지 못한 게 그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으면서 몇 번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죽었다 깨어나도 난 못한다. 못한다고, 나는 못합니다, 하는 게 나의 기도가 된 것은 그러므로 누구보다 주님이어야 한다. 난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발칙하다. 그래서 주 앞에 엎드린다.

 

때론 낭패감을 더하심으로 나로 하여금 자고하지 않게 하신다. 늘 마주하게 되는 것이 나의 앞선 생각이고 이는 허상을 꿈꾸듯 자꾸 바라는 것들을 구하게 한다. 그것이 오늘을 허방다리 짚게 하는 원인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 미래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은 내일에 있지 않았다. 나중에,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은 닿을  수 없는 것을 몽상하는 까닭은 오늘을 거절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를 부정하는 실재는 없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었다.

 

잠언은 이를 언급하였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28:26).” 지금 처한 오늘이 행함의 장이다.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호 11:10).” 지혜란 무엇이 두려운지 바로 아는 것이다. 가난과 장애가 아니고, 불투명한 미래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 소원해진 우리의 마음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일부러 침묵하시고 더 오랜 시간을 돌아가신다. 이를 두고 누가 하나님을 탓할 수 있을까? 문제는 나였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였다.

 

그저 감사다. 주께서 내게 두시는 은혜 위에 사는 것. 거저먹는 게 은총이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