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전봉석 2017. 2. 18. 07:42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잠언 18:23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6, 15

 

 

 

표면적인 이치가 그런 것 같다. ‘간절한 말’로 구할 때가 있고 ‘엄한 말’로 대답할 때가 있다. 누구에겐 친절한데 누구 앞에선 엄하게 군다. 대체로 빤한 것이지만 자기보다 센 자 앞에서는 간절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엄하다. 눌렸던 감정은 낮은 데로 기운다. 냉소적인 사람일수록 그 안에 상처가 많다는 증거다. 해학이 조소를 머금는 까닭도 높은 데를 향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의 간절한 말도 부자의 엄한 말도 실은 마땅치 않다. 이 모두는 형성된 자아의 그늘이기 때문이다. 조건발생적인 부르짖음에서도 놓여나야 하고 자기만족에 의한 당당함에서도 풀려나야 한다.

 

하나님께도 무얼 바라고 얻는 게 목적이라면, 여느 타종교와 다를 게 뭐 있나? 우린 어떠하든지 그 뜻을 헤아림으로 온전한 관계를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 가정예배로 욥기를 같이 읽으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잃지 않는 균형감각을 배우게 된다. 어려움이란 어떤 결과가 아니다. 행복하고 단란한 삶도 축복의 정도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곧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11).”

 

결국 즐거움과 고통은 당위적인 게 아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4)” 그 때가 언제인지,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5)” 어떤 가치를,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6)” 아울러 모든 것이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7)” 그리하여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8).”

 

바로 그 ‘때’마다 일희일비하는 게 사는 일이겠으나 이를 초월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비결이 주를 경외함이겠다. 주를 신뢰한다는 건 ‘어떠하든지’의 영역이니까 말이다. 이를 지혜자는 한 마디로 정의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10).” 날 때부터 애쓰는 게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사는 이유와 목적이 더욱 선명해진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이는 결코 모두를 위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9).” 이는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 곧 말씀이 귀에 들리고 이를 삶 가운데서 펼쳐 바탕으로 살고자 하는 이의 남다름은 곧 알기 때문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3).”

 

그러므로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게 목적이 아니고, 구원 받으려고 하나님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이는 세상의 관점이고 우린 이미 갈 자이고,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 뿌리를 두는 현실은 모든 것의 결말이 똑같다는 데 놀라지 않는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전 2:22).” 이 땅의 결실이 주목적이라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3).”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 몸을 비틀고 전도서를 묵상하였다. 그 의미가 뚜렷하고 선명하였다. 서성거리며 실내를 배회하는 동안에도, 앉아서 설교문을 작성하는 중에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주관하는 여러 갈래의 생각이 있음을 알았다. 자꾸 어디가 아파 엉덩이를 고쳐 앉아야 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 인도하심이 진하였다. 저절로 그리 되는, 다소 신비적인 느낌은 특히 묵상글을 쓸 때와 설교문을 작성할 때이다. 물론 누구와 성경공부를 할 때도, 할 말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자로서 그 되어지는 것에 놀랄 뿐이다.

 

오후께 쌍둥이 아이가 와서 글을 썼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며’의 소재로 각 단락을 잡아주었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얘들도 똑같구나.’ 하는 데 놀랐다. 왜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공부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새로운 학교에 대한 설렘이 있었다. 아, 어떻게 하면 얘들을 주 앞에 나오게 할 수 있을까? 나는 혼자 생각이 많다. 그러니 겁을 줘서 믿게 할 것인가? 어떤 조건을 달아서 나오게 할 것인가? 하나님도 강제하지 않으시는 일을 내가 윽박지르거나 왜곡되게 부추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 보이는데, ‘왜 저처럼 곤고할까?’ 싶은 게 이젠 다 알겠는데 이를 마땅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답답하다. 답답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누군 교회에 나오면 뭘 어떻게 해줄게, 하는 식으로 권하지만 그건 선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 그럼, 너 어디 두고 봐! 하는 식으로 겁을 주고 위협해서 예수를 알게 할 수도 없다. 가시적으로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지만 ‘주가 아시나니’ 왜 이 아이들을 여기에 오게 하시는지, 왜 나에게 이와 같은 간절함으로 아이들을 대하게 하시는지,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란 고작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지만… 성령이 일하시고 계심을 신뢰하기로 하였다.

 

당장 이번 주일부터 나왔으면 좋겠는데, 뭔가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졌으면 좋겠는데,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때론 내 안의 바람이 나를 좌절하게도 한다. 대체 얘들한테 내가 뭘 하고 있나? 싶다가도, 그럴 때면 주의 간곡하신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내 양을 먹이라.” 이를 위해 나로 하여금 주를 사랑하게 하셨구나! 이로써 생수의 강이 나의 고약한 배에서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욕심과 거짓과 교만이 가득 자리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끝 모를 뱃속 저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슬픔도 상처도 어두운 자아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왜 그러시는지 알겠다.

 

내가 또한 누군가에게 저랬을 걸, 그럼에도 저의 기도와 선한 배려가 오늘 날 나로 하여금 주 앞에서 살게 하는 것이었다. 긴 시간이 흘렀으나, 너무 먼 길을 외면하며 돌았으나, 받은 바 나에게도 오늘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비록 이 아이들이 오늘은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고, 예배에 나오기는커녕 교회와는 상관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가는 것 같다 해도, 어느 가까운 미래에 지금의 나와 같은 심정으로 주 앞에 설 것이다. 그때 저를 위해 친절하였던 주의 이름과 교회의 사랑이 기억될 것이다.

 

아이 앞에서 상냥하게 굴다 문득 떠오른 생각치고는 너무 거창했나? 대체 얘한테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다가, 언제 나에게도 그와 같이 곁을 내주던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양을 먹이라.’ 주의 이름으로 저들을 대하고 사랑으로 품고 씨름한다는 게 결국 주를 향한 나의 마음이어야겠구나, 하는. 그렇다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우리, 여기, 지금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게 말이다.

 

그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고 느끼고 누리는 게 인격적인 관계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수가 없다는 데 안도한다. 주밖에 없음이 다행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오늘 내가 이러고 있는 모든 게 궁극적으로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를. 곧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4).” 이보다 든든한 진리가 또 있나?

 

예수님께 어떤 도움을 바랄 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주가 하신다. 내가 하는 일을 주께서 도우시려는 게 아니라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주께서 대신 하시려는 데 있다. 이 차이를 바로 알면 삶은 더욱 단순해진다.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아이에게 싫증내지 않기. 한심하게 여겨 저를 업신여기지 않기. 그 장래를 예단하지 않기. 걱정하지 않기. 다만 지금 내 곁에 있음으로 더 신중하게 그러므로 간절히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면 되었다. 돌이켜 아이를 교회로 나오게 하는 일이나, 저를 깨닫게 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윗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이것이 믿음이었다. 들으실까? 하고 아뢰는 게 아니었다.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이와 같은 확신이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거였다. 그러므로 아뢴다.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들어주실까? 하는 게 아니라 이미 들으셨음을 전제로 아뢸 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확신하는 것이다. 어떠하든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나의 요구조건에 의한 만족함이 아니었다. ‘깰 때에’ 다만,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이것이 다윗이나 욥이나 솔로몬이나 동일하였던 것은, 이를 특별히 내게 알게 하시려고 오늘을 두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