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전봉석 2017. 2. 17. 07:42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 17:18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4

 

 

 

인사만 드려, 뭘 하라는 건 아냐. 아이엄마는 아이를 달래며 글방으로 데려왔다. 얼결에 나는 말 그대로 인사만 나누는 정도에서 얼굴을 텄다. 있는 집 아이는 있어서 게임에 환장하고 없는 집 아이는 없어서 게임에 빠져 산다. 윽박지르고 야단을 쳐도 별 수 없다. 무슨 전염병처럼 아이들을 잠식하였다. 이제 5학년 올라가는 아이는 책을 읽을 테니 문상(문화상품권)을 주겠느냐? 하고 물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문상은 곧 게임머니가 되고, 현찰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중2 아이에게 문상을 주려다가 짜장면을 사준 게 그래서다.

 

상한 마음은 주변을 상하게 한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7).” 부모는 아이가 그러는 게 다 자신들 탓이라고 한탄했다. 한데 그게 그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짓말처럼 열에 아홉은 향락에 빠져 있다. 인형뽑기가게가 늘어가고 층층마다 PC방이 즐비하다. 하긴 어느 두 아이는 글방이 있는 9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4, 5층에 들러서 게임을 하다 아예 길을 잃었다.

 

위인전집에 무슨 과학 잡지며 할 것 없이 족히 몇 만 권의 책이 있다며 아이가 자랑했다. 두 엄마는 그걸 마치 경쟁하듯이 사주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애들이 책이라면 학을 뗄밖에. 당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왜 자꾸 ‘이런 아이들’을 붙이시는 것일까? 서로에게 잘해주려는 게 마치 앙갚음을 하는 것 같다. 부모에 대한 반감이 눈에 띄는데도 아이엄마는 아이에게 쩔쩔맨다. <다 그래요>가 마치 저들만의 수신호 같다.

 

하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전 1:13).” 이를 모르고 나름 수고하고 애쓰는 게 갸륵하다. 믿음으로 양육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엄마가 ‘우리 교회’ 가야 한다고 가지 말래요. 주일 날 오랬더니 다음 날 아이의 대답이었다. 멀다고 안 가고, 말 안 듣는다고 안 데려가면서도 싫은 것이다. 그러느니 집구석에 있으라는 소린데… 컴퓨터에 스마트폰에 TV에 그야말로 방치다. 애들은 어떻게든 혼자 있으려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보증하는 시대다. 어디가 좋단다, 뭐가 어떻다더라 하면 서로의 말만 믿고 그리 쏠린다. 교회를 다니고 신자가 되는 것도 다 필요에 의해 보증에 따른 것이다(?). 정작 예수를 만나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고 어떤 필요, 마음의 허기짐에서부터 질병과 가난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게 목적이어서였다. 보면 어디 큰 교회, 거기에 무슨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목사에 대한 소개도 그의 이력을 자랑하지 정작 서로가 하나님을 바라는 데는 별로 관심도 없는 듯하다. 그러니 안 믿는 남편의 눈에는 그게 그거처럼 여겨져 ‘적당히’ 다니는 정도에서 뭐라 하지 않는 것을 관용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잡혀 사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음으로 게 큰 족쇄처럼 우리를 제어하는 게 또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요즘 나는 이 말씀을 자주 떠올린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이 한 구절에 지금 나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이 아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다 주께 맡기고, 이 엄마가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토로하나, 싶다가도 주를 바라본다.

 

아이가 오전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였다. 믿고자 하여 또는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잘 살고 있나 보자! 하는 심보였다. 모르는 걸 알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더욱 확증하기 위해서 시작한 애였다. 그러니 회의와 의심과 저돌적인 질문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실 거였다. 아니면 얘가 왜 오나? 답이 없었다. 내내 피곤하고 긴장되는 것이다. 덕분에 나 또한 정신을 빠짝 차려야 했다. 그냥 읽고 설명한다고 될 게 아니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이 한 구절을 놓고 30분은 씨름한 것 같다. 여기서 사람과 인자는 예수시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처음 사람이다. 단순히 오늘 날 우리를 일컫는 ‘사람과 인자’를 되묻는 게 아니었다. 도대체 그, 흠과 티가 없는 사람 곧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돌보시는가? 천국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리시고 다스리시는 바로 그 좋고 좋은 천국에서 함께 살고자 하심으로 지은 바 된 사람이었다. 저는 타락하였고 죄가 들어오면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를 복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아들’을 보내셨다. 우린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그만큼 거룩해야 한다. 의로워야 한다. 본래 사람의 사람처럼 흠과 티가 없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리 생각하셨는가? 그리하여 자신이 직접 사람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까지 주께서 사람을 돌보시는가? 바로 그, 목적의 목적을 설명하는 일은 어려웠다. 한데 놀라운 건 말해주면서 내가 놀라워했다. 오늘의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알았다.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원리와는 다른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모든 유구한 역사를 시작하셨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그 좋고 좋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누림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거셨다.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말이다. 죽기까지 사랑하신 이유였다. 나는 아이에게 ‘사람과 인자’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왜 주님이 ‘내 양을 먹이라’ 하셨는지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왜 ‘이런 아이들’만 보내시는가? 하는 물음에도 답이 분명하였다.

 

우린 얼마나 서로에게 보증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엄마가 알아서 할게, 아빠가 책임질게, 하다가 오늘 날 우리 아이들이 이 모양이 되었다. 친구들 따르고, 어느 직장에 매이고, 무슨 취미를 같이 하면서 서로는 서로에게 보증이 된다. 결국 오늘 잠언의 말씀이 그것이다.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잠 17:18).” 이를 성경은 어림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의 보증은 그리스도뿐이라. 다시 본래의 처음 사람, 그 흠과 티가 없는 새 사람이 되는 데는 예수의 십자가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시 16:4).” 아, 말씀은 말씀으로 말씀을 이끄시고 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운이 좋았고, 길한 날이며, 재수가 없었고, 운세를 따져 ‘다 잘 될 거야!’ 하는 말로 서로는 서로에게 신이 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처방은 명확하다.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그러므로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잠 22:26).” 내가 어찌 누구의 죄를, 그 값을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가 오기 전에 나는 설교 본문을 정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6:1-2).”

 

단어는 항상 사전적인 의미, 지시적인 의미, 함축적인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누구를 돕고 위하는 정도의 담보나 보증의 개념이 아닌 것이다.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초안만 잡은 수준이었는데, 이어지는 아이와의 성경공부와 수업과 아이엄마의 느닷없는 방문에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이 모든 데서 ‘하나님의 의도’를 알 것 같다. ‘이를’ 내게 알게 하시고자 특별히 내게 두시는 그와 같은 섭리를 말이다.

 

‘모두가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최소한 내 주변의 모두는 그러해서 나는 두려움을 갖는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한 발짝도 뗄 수가 없다. 서로 다른 본질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대체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해서 그처럼 오랜 세월을 하나님은 또 참으시고 기다리시며 기어이 인자로 이 땅에 오시기까지 하였는가? 답은 하나다.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악착같이 살아내려고 하는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자녀들이 무기력증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도 다들 설마, 하는 것이다. 기어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7).” 이를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곧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 2:6).” 이를 알 때, 하나님이 왜 그처럼 사람을 생각하시는지, 인자가 무엇이기에 그처럼 귀히 여기시는지 알게 된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