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언 19:2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1-2
곧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16:9).” 하는 이와 같은 말씀이 든든한 보증이 되는 게 아닌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전에 같으면 그게 자랑이었겠으나 이제는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선다.’는 데 안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에 놓인 모든 것으로 순응할 수 있다. 고난도 축복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느라 긍긍하지만 그 또한 주신 삶에 대해 순복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진술한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 3:22).” 주를 신뢰하는 정도는 주신 데 감사하는 정도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 90:14).”
그럴 수 있는 게 주의 품에서였다.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사 66:11).” 늘 그렇지 못한 것으로 시달려 시름에 빠지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사모함이라. 내가 사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하면 된다. 곧 하나님께 뿌리를 두는 현실이면 되는 것이다. 가지가 아무리 흔들려도, 바람에 이는 수많은 잎사귀들로 고달프다 해도, 주신 데 따라 사는 게 복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 2:24).” 평범한 일상 가운데 하나님이시다. 어떤 구호도 관념도 아니라 실제로의 현실이시다. 늘 부대끼는 문제에 계시고, 으르렁거리며 다투는 중에 계시고, 홀로 낙심하여 실의에 빠질 때도 곁에 계시고, 흥에 겨워 다른 일에 휩싸여 있을 때도 계신다. 다만 한사코 주를 외면함으로 당하는 일들이야 어쩌겠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기본 명제는 또렷하였다. 나 혼자 이대로 좋아도 되나? 싶게 좋았다. 현실에 아무 문제도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좋은 거였다. 책을 읽고, 누굴 마주하고, 아이를 대하고, 아내와 티격태격하며, 돈 문제, 건강 문제, 당장 뭐가 어떤 일들이 산적해 있는 것과 달리 좋은 것이다. 아무리 어떠어떠해도, 이를 어떻게 해결해보려고 바동거려보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하는 말씀보다 위로가 큰 게 또 있을까?
결국은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나의 어떤 경우로도 주의 뜻은 중단되지 않는다. 이를 잘 아는 다윗은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1-2).” 저는 아는 것이다. 그런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복된 것을 말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이끌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 뭘 해도 하나님이다. 이를 바로 정리한 게 바울의 고백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모든 것, 그게 비록 불순종의 길이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결과였다 해도, 그것으로 고난이 오고 모든 슬픔과 낙심이 찾아왔다 해도, ‘우리가 알거나와’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러는 동안 고달프고 어려웠던 것들이 주께 향한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모세가 자기 의에 따라 민족을 구원했으면 어땠을까? 저의 광야 40년이 비로소 겸손한 자리에 있게 한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에게 바로 이삭을 주셨다면 어땠을까? 숱한 자녀를 보고 자기 생전에 가시적인 결과를 거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요셉이 요셉일 수 있었던 게 저의 파란만장한 생의 굴곡 때문이 아니었을까? 두신 데 따른 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참으로 값지다. 곧 오늘의 어려움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낙심은 결국 환상을 깨운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 기대하는 환상, 자신이 세운 계획들로 인한 숱한 기대와 다짐들, 경험에서 오는 자기 확신과 신념 등을 깨는 게 낙심이다. 오직 주님은 주님이 그 모두의 중심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아이들이 돌아가고 토요일 오후를 평온하게 지냈다. 햇살은 따뜻하였고 몸은 나른하였으며 마음은 어지럽지 않았다. 여기가 좋사오니! 종종 경험하게 하시는 변화산의 위력은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천국을 사모하게 하는 열쇠다. 그 시간을 잃지 않기 위해 현실에 뛰어든다. 다들 안녕하신가? 궁금해진 마음으로 안부를 묻고 주의 이름으로 저를 생각함으로 아뢴다. 어떤 염려와 근심이 나를 사로잡지만 또한 그것으로 주를 의지한다.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할 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다. 망가지고 뜯겨나가는 데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다. 이내 다 뜯기도 망가져 더는 쓸모없다고 여길 때 주님은 이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우리의 아집이 어지간해야지! 이를 자유의지라고 고집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할밖에. 훗날에 이르러 주의 이름을 부르며 시편 23편을 되뇌는 날이 복될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 그걸 그렇게 고집부리며 나의 부족을 내가 채우려 했던 것에 대하여 후회와 회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정작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2).” 이를 알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철들자 노망인 게 인생이다. 이에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이 땅에서의 천 년 만 년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인가? 주가 인도하신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서도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아, 그런 걸 그렇게 몸서리치며 살았었구나. 기어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 그럴 것이었는데 여태 어쩌자고…. 그러므로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 아멘 아멘. 이보다 더 복되고 축복된 게 있을까?
무엇에 조바심을 치다가도, 무엇 때문에 쩔쩔매다가도 이게 다 헛되다는 데 안도하는 것이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전 3:18).” 뭐 그리 대단하다고 여겨 스스로를 위하려고만 했는지. 이를 공격적으로 들추면 자꾸 남에게 공평을 바라게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질문은 그래서 어리석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굴 믿고 누굴 신뢰하며 누구에게 희망을 둔단 말인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이미 충분한데도 자기 분깃을 찾아 먼 길을 떠나겠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은 일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주의 기쁨이 내 안에 충만하게 하시려고,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6:38).”
가장 현명하고 아름다운 가치는 주의 뜻을 행하려 하는 것이다. 오직 주의 뜻만이 나의 생에 드러나기를. 그리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이 나의 기쁨의 전부였던 것이다. 곧 주의 기쁨이 내 안에 충만하게 하려 하시는 게 목적이었다. 죄로 물든, 더럽고 추한 나의 마음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는 외롭고 쓸쓸히 온 길을 되돌아가거나 도로 물고기 잡으러 가는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오직 주님만, 온전히 주님만,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18:28).” 그러므로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29).”
아이들을 생각하고 처한 상황을 염려하며 우리의 부족함을 아뢰고 어떤 우울감을 호소하며, 자질구레한 나의 모든 일상에서 툴툴거리다가도 이처럼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다행인지!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29).”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어서 기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30).” 곧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31).”
이제 나는 고백한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36).” 고로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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