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전봉석 2017. 3. 9. 07:4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10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편 38:9, 15

 

 

 

잠언은 일깨운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8).” 그래봐야 소용없는 것에 대하여 조금은 단호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것이 화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7).” 뭐라 한들, 그게 욕이 되어 돌아오기 십상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9).” 그러니 이를 어찌 판단하고 강단 있게 처신할 수 있을까?

 

행여 나의 오만함이 사람을 저울질하고 너는 됐다, 너는 그르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도는 막연하여서 당장 설치는 아이 앞에서 나 몰라라, 해 할 도리만 한다고 기도를 하고 마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나는 곁에 두시는 이에게 충실 하는 것이다. 둘은 모든 이를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한 품을 바라야 한다. 나는 자유롭지만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신학기가 되면서 아내가 긴장했다. 학원들이 전술적으로 아이들을 끌어 모으기 때문이다. 학교 앞에서 아이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물론이고, 엄마들을 모아 적당한 불안과 나름의 대책을 홍보한다. 이제 아예 그냥 보내도 되는 줄 알아! 아내가 뿔났다. 몇 달째 교육비를 못내도 다들 그런 형편이겠거니 하고 말았다. 그런데 버젓이 다른 학원을 알아보고 급기야 이것저것 시키면서 하다못해 ‘여긴’ 책값도 제때 안 준다는 것이다.

 

글방은 계속 다닐 건데 공부방은 끊을지 몰라요! 한 애가 말했다. 그리곤 한술 더 떠 글방만 다니면 교육비가 얼마예요? 하고 묻는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과목마다 학습지를 하고 있으면서 이번에 새로 영어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당돌함에 할 말이 없었다. 형편이 어려운 것 같아서 안 올리고, 안 받고, 더 해주었는데 맥이 풀리기도 하겠다. 거칠게 설거지를 하며 아내가 투덜거렸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나름 몇 번이나 관대해야 할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22).” 이게 어찌 가능한가? 우리는 못하겠으니까, 주여 도와주세요! 하는 거야. 아내에게 하는 나의 말이 기운이 없었다. 나도 이런 데 익숙하지 않다. 원래 나는 원칙대로 하던 사람이다. 정확히 받고, 딱 그만큼만 해주고, 애가 성의가 없으면 내가 먼저 끊었다. 이를 대단히 여겼는지, 그래서 글방은 아무나 다니는 데가 아닌 거였다. 알아서 잘하는 애들만 왔었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한다? 너무 얄밉고 돼먹잖고 예의가 없으며 경우가 없다. 역시 못 배우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은 티가 나도 난다. 애 엄마가 그러니 애가 그 모양이지. 욕지기가 올라오고 ‘내가 어떻게 했는데?’ 하는 억울함이 치를 떨게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럼에도 곁에 두시는 아이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왔다. 저들의 예의 없음과 돼먹잖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아쉬우니까 주여 주여 하고, 돌아서서는 조롱하고 욕하고 십자가에 달았다. 그러니 그때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던가?

 

예수님이 푯대다. 그리할 수 없어서 좌절하고 애통해하더라도 그리 붙들고 가야 한다. 분명한 건, 우리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그런 우리에게 일러 말씀하신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

 

사실 너무 얄밉고 화나고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확, 어떻게 보복을 하고 싶은데, 그게 어찌 예수님만 하겠나? 저는 죄가 없으신 데도 그리 당하였다. 그가 당함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은혜는 받은 자가 누린다. 누리는 만큼 더해진다.

 

나 또한 다를 바 없어서 같이 씩씩거리다가도 그게 목회고 그게 사역이겠거니, 하였다. 신경질적으로 설거지를 하는 아내 등에 대고 말했다. 그래서 떡을 물에 던지라고 하잖아!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애들이나 애들 엄마를 보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을 보고 하는 거야. 머쓱하긴 했지만 나는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애들이 교회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내는 헹군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그러게. 것도 그렇다.

 

그렇다고 교회 나오면 교육비를 공짜로 해준다! 하는 것도 여느 상술보다 구차하다. 혹은 교회 나오는 애들만 무료로 한다? 것도 좀 그렇고. 나름 이 문제로 혼자 고민이 많았다. 뭔가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더 속상한 건 이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공짜니까 와도 되고 안 와도 되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런 식이다. 배알아 꼬이고 자존심도 상하는 일이다. 그러니 어쩐다?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정말 쉽지는 않지만, 그래서 우리는 못합니다,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고 갑니다, 하는 것이다.

 

우리의 친절이 혹은 희생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설령 저들에게 우리가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주의 이름으로 했는지 안 했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시니까, 말 그대로 주님만 보고 하는 거지 뭐! 하는 나의 말이 나에게 고마움으로 들렸다. 그렇구나. 오히려 저들에게 인정받고 인사치레까지 얻는다면 그게 무슨 선일까? 의란 오직 주님만 바라는 데서 주만이 나의 구주가 되시는 것. 다들 미쳤다고 해도 이 또한 복음을 위하여서 말이다. 있으면 있어서, 없으면 없어서, 거저 주는 은혜는 모든 죄인에게 낯설다. 서툰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그런 것처럼 말이다. 주의 은혜를 뭔가 보답해야 하는 것으로 받고, 그 일과가 때론 가중하고 버거워 이에 단내 나는 수고만 있을 뿐이면, 숱한 악을 행하는 이들과 다를 게 뭐 있나? 얼마나 더 의롭게 살아야 하나님의 의에 미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일이다. 그런 조건반사적인 신앙 자세가 우리로 병들게 한다. 그럴 바엔 돈돈거리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애들 장사’로 상술을 더하는 게 훨씬 정직할 수 있다.

 

사탄은 그 전략이 뚜렷하였다. 슬쩍 우리 마음에 ‘침투’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서운함으로 또는 억울함까지 더해서,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하는 원망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곤 여태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무력화’한다.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야. 알아줄 사람도 없고 그래봤자 지들 떠날 땐 뒤도 안 돌아보는데! 해서 우리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믿음을 ‘전복’시킨다. 돈을 벌어야지. 그 수입으로 교회도 할 수 있는 거고 먹고 살 수도 있는 거고. 어쨌든 돈이 있어야 주의 일도 하는 세상 아니야? 어느새 우리들로 하여금 정로에서 ‘이탈’하게 한다. 그리곤 자신의 논리와 이치를 따져 하나님의 일을 전면 재수정 하게 한다. 여기서 오는 ‘해방’감이라니! 그동안 억매였던 것으로부터의 자유다.

 

이럴 게 분명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신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말씀을 읽고 기도로 재무장해야 한다. 읽기가 없으면 쓰기(생활)도 없다. 그리고 저들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권해야 한다. 실망과 좌절이 엄습해도 이 또한 지르밟고 가야 한다. 별 수 없다. 속상한 거야 마음이 아직 그 정도인데 어쩌나? 이를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만 보고 가는 일이다.

 

어제그제 요즘 우리는 새삼 주어진 훈련으로 쩔쩔매고 있다. 이 꼴 저 꼴 안 보고 살고 싶다. 남들처럼 말이다. 애들 인성이니 영혼이니, 이 무슨 사치스러운 발상인가? 하물며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자니! 몰지각한 여편네들의 술추렴과 그 뻔뻔한 이기심 앞에 혀를 찰 뿐이다. 하긴 ‘엄마’보다 이기적인 존재가 또 있을까? 몰염치에 몰상식에 몰지각까지 더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욕이 튀어나온다. 애 앞에서 얼마나 돈돈거렸으면 애가 여기만 다니면 얼마예요? 하고 묻게 만드는 것일까?

 

아내를 더 이해하고 공감해야지. 안달복달 그 마음이 들썽거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아내에게 더 잘해줘야지. 나는 날마다 다짐한다. 돌아서면 또 후회와 뉘우침으로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작심을 한다. 그런데 마주하고 무슨 말을 하다보면 화가 나는 것이다. 아, 이게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내 안에 아내 이상으로 쟁쟁거리는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화딱지가 나고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꾹, 참고 있던 것이 아내의 그런 모습에서 적나라하게 나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특별경계태세 천리마훈련인가? 주의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해야지. 무얼 바라는 꿍꿍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주의 이름만이 드러나기를 위해서 감당해야지. 교회 이름으로, 주의 사랑으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지. 백 날 다짐하고 또 각오하고 뉘우쳐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도, 개뿔! 자꾸 화가 나는 것이다. 전날에 그렇게 사정사정하더니 어제는 아래층 아이가 내내 전화를 씹고 급기야 걱정이 돼서 아이엄마에게도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 받질 않더란다. 이러니 몇 번을 용서할까요? 일곱 번에 일흔 번이면 될까요?

 

나는 배알이 꼴려 살 수가 없다. 뭐 좀 그럴듯한 성과라도 있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새로운 애가 하나라도 예배에 좀 나오던가? 이건 뭐 맨땅에 헤딩하는 것도 아니고 아스팔트 같은 저들 마음을 아무리 두드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에 오늘 말씀은 싱겁기까지 하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맨날 그 소리 같은데, 아! 저들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이다. 저들에게 서운한 게 아니라 주님께 서러운 것이다. 이 정도면 될까요? 하고 고개를 내미는 내 안의 자가당착이 문제였다. 이 누추한 마음을 섬멸할 수 있는 것은, 주를 경외함 뿐이었다!

 

저들이 우리에게 잘하는 걸 기대하며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 살림이 좀 펴졌으면 하는 바람의 정도가 아니었다. 여기서도 지혜는 주를 경외함이다. 그렇지 않은,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18).” 그 결국의 결과를 아는 자만이 주를 온전히 경외한다. 나는 아닐 수 있는 것이 나의 수고와 공로로 인한 게 아니라 주를 사모하는, 명철에 있었다.

 

이에 다윗의 기도를 읊조릴 수 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9, 15).” 비록 아무런 변화도 어떤 보람도 성과도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라! 아래층 아이엄마가 아니고, 그 아이가 자라서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게 아니고, 이 나라가 인류가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이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