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잠언 5:21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편 65:4, 10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다.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에서 큰 위로를 얻는다. 곧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소망의 인내로 만들어지는 성품은 내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강력한 사랑이다. 강권하신다는 말은 단련하신다는 말과 연관 있고, 연단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또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어떡하지? 싶다가도 이 모든 게 주의 눈앞에 있다는 데 안도하는 것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것,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곧 순수한 보상이 따른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모두가 악악거릴 때 우리는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게 복되었다. 결국 그 끝에서 우리가 붙들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전서를 큰소리로 읽다 위로를 받았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3-14).” 그래 맞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5:19).” 그니까. 그럴 거면,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32).”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삶이 허망하였다.
소리 내어 성경을 읽는 유익에 대하여는 여러 번 감탄하고 있다. 오감을 열어 육감으로 말씀을 받는 일이다. 모든 감각이 일제히 일어나 소리와 맛과 생생함과 또렷함과 은은함을 느끼면서 저절로 고정되는 시간이다. 그러라고 다들 늦게 나오게 하시나, 건물 전체가 텅 빈 것처럼 조용하여서 오전에는 가히 성령이 충만함을 느낀다. 이리 두시든 저리 두시든 그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데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게 은총이었다.
이번 달까지만 하기로 했어요. 주말에 바에서 일한다는 아이가 그리 알려왔다. 당장이라도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새로 사람 구할 때까지는 해줘야 하지 않겠냐며, 어쨌든 마음을 그리 정한 게 고마웠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못 왔다는 게 연락을 한 이유였다. 하긴 이태원에서 새벽 다섯 시에 끝나고 군포 집에 들러 씻고 다시 인천으로 오려니까 그게 어디 쉽겠나! 돌아오는 주일부터는 내가 더 일찍 교회에 나가 있을 테니 끝나고 바로 교회로 오라하였다. 아무튼 알았다고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전에 한 아이는 늘 주말에 엠티를 떠나는 바람에 강원도고 어디에서 주일 아침에 일찍 서둘러 예배에 왔던 게 생각났다. 차라리 교회 와서 졸더라도 나는 그 마음이 값지다고 여겼다. 어쨌든 그랬던 열심이 훗날 저들의 믿음을 붙드는 데도 큰 기억이 되어줄 거라 확신한다. 영성이란 몸을 다루는 데서 출발한다. 뭐 그리 고상을 떨고 번드르르하게 말을 잘한다 해도 참으로 영적인 삶이란 몸을 주도할 수 있는 거여야 하는 것이다.
사실 소리 내어 성경을 읽는 것은 자꾸 딴짓을 하려드는 몸을 다잡기 위한 데서였다.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라 몸을 쳐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 거 보면 백 마디 말보다 한 걸음 실천이 더 귀하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으면서는 그런 생각에 젖을 수 있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1-3).”
얼마나 멋진 일인가! 천사의 말을 하고 설교에 능력이 있고 성경에 뛰어난 학식과 산을 옮길 수 있을 믿음이 굳건하여 나를 불사르게도 내어줄 정도인데… 그게 소소한 일상과 무관하고 삶 가운데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억지로라도’를 사랑한다. 성령이 하실 일이지만 성령이 하실 수 있게 하는 일은 내 몫이다. 성령은 그래서 내 안에 열매를 틔우고 삶 가운데 수확하게 하신다. 육체의 일은 엄연하여서 이를 제어하지 않으면 거룩은 한낱 꿈같은 이야기다.
그런 거보면 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그래서 아침이면 나를 들고 깨워, 이처럼 말씀을 가져다 나의 하루를 써내려 가게 하시는지 알겠다. 정해진 시간을 따라 동선이 그어지고, 그 시간이면 마주치는 사람들과 안면이 트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저를 위해 기도하게도 하신다.
때론 억지로라도, 나는 우리의 육신을 불러 세워 흉내라도 내야 하는 게 도움이 크다고 본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전부가 되기 위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곤욕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내가 더 일찍 가 있겠다고 말해주었다. 더구나 이번 달엔 부활주일도 있고 성찬예식도 거행을 해야 하는데… 아이에게 부담이 되라고 일렀다. 그래도 괜찮을 아이였다.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해서 인성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의 성품을 뚝딱 성스러운 것으로 바꿔주시는 건 아니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6).”
나는 저 말씀을 그렇게 읽었다. 마치 믿기만 하면 모든 게 뚝딱 이루어지는, 자판기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믿는다는 그 믿음이 온전하다면 우릴 결코 가만두지 않는다. 날마다 내 안은 전쟁이다. 싫은 것과 좋은 게 싸우고, 바라는 것과 포기하기 싫은 게 싸운다. 한데 뒤엉켜 때론 뭐가 선이고 뭐가 의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내가 이러려고 성도가 됐나? 목사가 됐나? 저 애를 품었나? 소위 말해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이러려고 예수를 믿었나? 싶은 것이다.
신앙을 무슨 유랑하듯 여기는 경우가 있다. 교회를 마치 디너쇼에 가는 걸로 알고 무슨 사교모임도 아니고, 같이 몰려다니면서 희희낙락할 게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한다는 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는 일인데 그게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래서 나는 이제 ‘너나 잘해!’라는 이 말을 사랑한다. 내가 잘 해야 말씀이 선다. 설교만 잘 하면 뭔 소용인가? 묵상글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삶이 따라주지 않으면 모두 헛것이다. 누구더러 뭐라 하기 전에 내가 잘해야 한다. 그게 제일 어렵다. 가만 보면 내가 가장 골치다. 그래서 몸을 쳐 복종케 하는 것이겠다.
그래서 먼저가 신령함이 아니라 육신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15:46).” 온화한 얼굴에 거룩한 마음이 깃든다. 상냥한 말에서 예수의 참 사랑이 배어난다. 꾸며내어 위선을 떨라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기 위해서도 나는 나를 쳐 복종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너나 잘해.’ 하던 자격지심이 이제는 바르게 성경을 마주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오후께는 괜히 꿀꿀하여 마음도 몸이 까부라지고 있었는데 다 저녁에 아이와 통화를 하면서 나의 한 날이 싱거워졌다. 아이가 새로 오고 그럼 뭔가 확 달라지려나? 그리 여겼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아이의 미온적인 태도에 기운이 빠졌다. 누구에게 전화가 오려나? 하고 기다리다 지쳤고, 그러는 내 마음이 안달인지 아니면 주님의 마음인지 알 수 없어 우울하였다. 그러던 게 뜬금없는 녀석의 전화 한 통화에 씨익, 웃음을 지으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주가 하신다. 백 날 되뇌어도 이게 그렇게 멀기만 하다. 자꾸 내가 뭘 어쩌지 못해 안달을 부리는 사람처럼 속을 끓인다. 그러려니 하고 말면 될 일인데도 혼자 끙, 하고 용을 쓰는 것이다. 그러라고 주가 두시는지, 내 못난 성품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래서 더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면 이게 또 복이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할 수 없어서 나는 손을 든다. 주가 하신다는 걸 알면서도, 내게 도고로 간구로 그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려고 나를 또 그 자리에 두시는 거라 짐작도 된다.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고달프다고 하면 안 되지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하는 오늘의 기도가 큰 기쁨이 된다. 주가 택하시고 주가 오게 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이를 매순간 호흡하듯 느끼며 살 수 있는 게 복되었다(시 65:4, 10).
고로 나에게서 하나님이 보여야 한다. 내 말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한다. 성도란 주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하여진다는 건 마음이 먼저가 아니라 말투가 눈매가 인상이 손에 든 일들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3-14).”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그런 거였다. 내가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만 억지로라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이가 따로 계셨다. 그래서 그런 거였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아!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2-3).” 그리하여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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