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잠언 3:2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시편 63:6-7
너드(nerd)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이가 ‘얼간이, 바보’라는 뜻을 가졌다며 웃었다. ‘좁고 깊게 한 분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성도의 삶을 닮지 않았나?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약하심’에 대해 읽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고 천한, 얼간이가 되셨다. 오로지 우리에 대한 사랑밖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이 오지 못해 속상하였다. 하지만 이젠 실망만 하지는 않는다. 약속하신 이의 약속을 붙드는 게 믿음이었다. 나의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온전하게 하시려는, 주의 관심은 오직 그것 하나이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아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힘들어했어? 나는 뭔 소린가 했다.
예배 시간이 다가오고, 찬양을 부르는데 자꾸 울컥하였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저들의 어쩔 수 없음을 생각하다 주께서 우리에게 두신 은혜가 참으로 크고 크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말씀을 전하는데도 그 의미를 먼저 전하였다. 한 영혼이 교회로 나오고 뿌리를 내리기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구주로 영접하기까지, 참으로 그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가 하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기까지, 사람으로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시기까지, 우리의 불순종의 죄를 무찔러 이기셨으나 그 악착같은 죄의 속성은 여전한 것이다.
안 믿는 부모와 가정에서 자라 안 믿는 자리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게 그처럼 눈물겨워서 힘에 겨운 거였다. 그러므로 더욱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를, 이 자리에 있지 못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주의 이름을 부르기를, 한바탕 시원하게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거보면 내가 너드(nerd)가 된 건 마땅하였다. 오직 주님에게만 관심을 두게 하심을, 내가 저 아이를 품고 때론 고달프다. ‘믿음의 삶은 믿음의 삶 외에 모든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번거로울 거 없다. 자원하여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 결국 믿음으로써,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당장 여기가 끝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다. 저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믿음으로 믿음의 삶을 걸어갔다. 이에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 13:10).” 그럴 수 있는 게 어찌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14:12).” 그럴 수 있는 게 또한 믿음뿐이었다. 하나님이 괜히 이러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새로 올(?) 아이를 위해 기도하였다. 어찌 인도하시려는가, 기대하였다. 이런 기대가 나를 다시 주 앞에 서게 하였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그러므로 나의 소망은 나의 속성을 개조한다. 뜯어고쳐 새롭게 한다. 전혀 별개의 나로 만든다. 믿음에 의한 것이 성령에 의한 것이지만 성령에 의한 것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게 한다.
예배를 마치고, 큰애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오지 못했다고 다음 주일에 뵙겠다고 문자를 주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어려웠던 마음이 풀렸다. 그러게, 이 모든 걸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나의 마음이 그럴진대 하물며 아이의 마음에 대하여는 ‘반드시 변화될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밖에 다른 더 좋은 마음이 있을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나 좋을 대로 믿고 기대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꿈이 아니라 주가 이루시는 실제를 무던히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주셔야 한다. 우리가 주를 닮는다는 건, 오직 주 안에서 주님만을 바라고 그 뜻에 합하는 삶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은 그러하셨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50).”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 뜻대로 하는 자로서 나는 주의 가족이다. 내가 아이들을 품고 씨름하는 것도 그리 하게 하시는 이의 뜻을 마다하지 않는, 주어진 마음 때문인 것이다. 이를 증명할 수 있다. 내가 왜 저 아이 때문에 불편한가? 생각하면 답이 없다. 고로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인 것이다. 솔직히 걔가 오든 안 오든 대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마음이다.
그래서 예배 전이면 더욱 싸해서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시무룩해지는 거였다. 나도 내가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와 같은 나의 약함이 주님을 더욱 바라고 구하게 하는 건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나의 결연한 의지나 다짐이 아니고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바울이 배운 배움의 질감이 느껴졌다. 애가 오든 안 오든, 교회가 부흥하든 안 하든, 가시적인 성과가 있든 없든,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이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
결국은 내가 하는 게 아닌 것이다. 말씀이 내게 주시는 위로는 오직 한 가지, 주님의 인내도 거기서 나왔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뜻으로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오늘 나를 여기에 두신 까닭은 나의 적성이나 취향에 따른 소신과 기질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 모든 게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하려 하심이라.
나는 오늘 잠언의 말씀을 그리 받는다. “대저 여호와는 네가 의지할 이시니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잠 3:26).” 내가 아이를 의지하는 게 아니요 어떤 성과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내가 의지할 이는 하나님이시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6-7).” 되실 게 아니라, 되셨음이다. 나의 도움이시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
눈물을 글썽거리고 앉아 이 글을 쓰면서도, 이보다 큰 감격이 또 있겠나?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사회사업을 하라고 나를 부르신 것도 아니고 ‘아픈 아이들’을 건사하고 잘 치유해서 힐링이 되게 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주님의 한 가지 관심은 우리의 영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간단명료한 진리 때문이다. 역사를 운운하고 나라와 민족을 들먹이며 뭔가 정의를 부르짖는 데 한 눈 팔 게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이러할 때,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 비록 내보일 거 없고 자랑할 게 아무 것도 없어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거였다. 곧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17).”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꿀꿀하다가도 그런 나의 연약함으로 주의 위로가 더욱 크신 데 놀라곤 한다. 시무룩하니 누워서 책을 읽고, 건성으로 성경구절을 메모하였을 뿐인데 오늘 아침 또 이렇게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 앞에서 싱글벙글 한다. 주가 하신다. 하나님은 그러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또 비워져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사랑이 저 아이를 포기하실 리 없다. 우리 교회를 방기하실 리 없다. 주가 돌보신다. 주가 이루신다. 그 증거는 내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이와 같은 고백을 내 것으로 삼아 오래 머금고 앉았다. 내가 사는 것보다 주의 인자하심이 더 크다. 내가 죽는다고 해도 주는 인자하시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생명보다 낫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입술로 주를 찬송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그것이 드러난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6).”
다윗이 광야에서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주를 마주할 수 있는 자리가 복되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 하여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4).” 설마 오늘이, 여기가 광야라 해도 내가 주를 앙모함이라. 내 남은 생이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손을 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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