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전봉석 2017. 4. 2. 07:14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잠언 2:8-9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62:1-2

 

 

 

새들의 자랑은 혈혈단신 무일푼의 날갯짓이다. 먹을 것을 예비하지 않고 짐 보따리도 없이 어디로든 날아다니면서, 버리고 떠남으로 언제든 찾아와 머물 수 있는 둥지와 일부러 길을 내지 않아도 되는 넉넉한 허공의 품을 신뢰한다. 바람의 길을 거스르지 않고 꽃과 나무의 자리를 탐내지 않음으로 심지어는 아름다움과 안락함으로부터도 자유하다. 특히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을 지나 대륙 간의 원양을 이착륙 없이 날아드는 새의 눈은 바람의 저항에도 버틸 수 있는, 각막을 보호하는 비늘이 있어서 안구는 좁은 구멍을 통해 다가올 시공만을 예의주시한다.

 

나는 김훈의 <바다>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었다. 왜 주님은 새들의 자유로움을 성도의 삶과 비교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들풀의 홀가분함에 대하여도 그리 묵상할 수 있었다. 오전에 아내가 글방으로 올라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였다. 성경공부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놓고 두런두런 하나님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 삶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 어디서 우리가 놓치곤 하는지, 왜 주와 함께 한다면서도 자유하지 못한 것인지.

 

새로 하게 된 중2 여자아이 엄마가 와서 상담을 했던 모양이다. 자신들은 무교지만 아이가 교회에 가고 글방에 가서 ‘우리’와 함께 어울리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천 연수동에서 여덟 살 난 여아의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되고 그 범인이 열일곱 살 여자아이였다는 보도에서 우리는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니 조심한다는 것이겠으나 교회로 오게 하는 일조차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런저런 우리의 일상은 몇 구절 말씀에 비추어져 위로를 받거나 수정 보완을 거듭하듯, 아내와의 성경공부는 토요일 오전 특별히 시간을 내어 말씀을 펼쳐들고 수다를 떠는 시간인 셈이다.

 

늘 허덕이며 숨 돌릴 틈 없이 뒤미처 닥치는 결제 일에 간신히, 간신히 곡예를 하듯 메우고 있는 가난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세밀한 주의 손길을 간직하게 한다. 풍요롭고 여유로웠다면 결코 누리지 못했을, 내 수고와 애씀의 결과였다면 결코 감사하지 않았을, 들꽃의 화려함은 무심한 듯 강인하고 초라한 듯 넉넉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데도 토요일은 내게 소풍 날 같다. 아이들이 와서 일기를 쓰고, 어제는 처음으로 글방 카페에 가입도 하고 시를 한 편씩 지어서 올렸다. 그러는 동안 건물은 빈 것처럼 고즈넉하여서 통째로 우리 것 같았다. 아내도 집으로 몇몇 아이를 불러 한 주간 동안 미진하였던 수업을 보충해주었다. 오후 네 시, 어스름 한가한 햇살을 받으며 산책을 했다. 실은 주일 날 먹을 장을 보러 가는 길이다. 아내는 쉴 새 없이 이 말 저 말을 들려주었다. 길가의 참새들은 양버즘나무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나는 이제 어느 구절의 말씀이나 그게 다 나 때문에 들려주시는 말씀인 걸 안다. ‘그러므로’는 앞에 있는 내용이 원인이 되어 근거가 될 때 사용하는 접속부사다. 곧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15).”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냥 아시는 게 아니라 직접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안다. 저의 동정은 막연한 게 아니라 실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는다.

 

또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맛보았다. 아내와의 성경공부가 미주알고주알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로우신지 수다를 떠는 것이면, 이를 더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주저하지 않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는 이 말씀에 기껍다. 마음으로 은근히 기쁜 것이다. 아이 하나가 새로 시작을 하고 그것이 우리의 가난한 생활에 여간 보탬이 되는 게 아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 전에는 그게 우선이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그 가정을 주께 나오게 할까, 고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은혜가 우리에게 크고 놀랍기 때문이다. 뭐 그리 대단한 사역이라 할 수 없지만, 우리가 몇 개월째 공들이고 있는 사내아이들과 달리 잘하면 곧 이 새로운 아이가 교회에 나올 것 같고, 그렇게 되면 뺀질거리듯 꽁무니를 빼던 저 두 녀석들도 나오게 될 것 같다는… 예배를 마친 뒤에 마침 딸애가 몇 주 전부터 남아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으니까, 도서관처럼 다른 애들도 서로 공부를 하면 어떨까? 나 혼자 생각이 많았다.

 

그런 거 보면 우리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게 모자람이지 넉넉함이 아니다. 아쉬움이지 만족함이 아니다. 승리의 삶에 입문하는 첫 관문은 언제나 고통일 거였다. 그리하여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우리의 고난은 장차 들어갈 본향에 대해 더욱 사모하게 함이라. 진리에 대한 이해는 지식이 아니라 직감이고, 사랑에 대한 이해는 설명이 아니라 느낌이며, 감사에 대한 이해는 말이 아니라 생활이고, 고마움에 대한 이해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지나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는 나는 항상 난감하다. 말씀은 항상 내가 의식할 수 없는 힘에 의하여 나의 삶에 깊숙이 실현된다. 이것이겠구나? 하고 주의할 때면 언제나 앞서는 게 나의 판단과 기준이니까 말이다. 이러시겠지, 저러실 거야, 하는 따위의 나의 기대는 종잡을 수 없는 주의 손길 앞에서 번번이 무색하다. 투덜거리고 있을 때,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뭔가 우울하여 송구함을 느낄 때, 힘들고 지칠 때 주의 긍휼하심은 더욱 선명하였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나는 이 농밀한 비밀을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문제는 내가 받은 은혜의 척도가 되었다. 이 정도면 됐지 뭐? 할 때에 느끼는 은혜와 도저히 감당이 안 됩니다! 할 때에 느끼는 은혜는 결코 같지 않았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6:1).” 바울이 반문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럴 수 없는 이가 그럴 수 없게 하시는 이를 더욱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그러므로 치를 떤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나 자신으로 인해 주 앞에 선다.

 

그렇듯 주는 우리의 길을 보호하신다.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왜냐하면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잠 2:8-9).” 죄라면 치가 떨리는 것이다. 미워하지 않기를, 조급하여 말씀보다 앞서지 않기를, 내 생각이 우선하여 주의 뜻을 외면하지 않기를,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의 마음을 왜곡하지 않기를. 그런데 그럼 그럴수록 내 힘으로는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어서, 다스릴 수 없어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1-2).” 내가 나를 주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은 잠잠히 주만 바란다. 저 먼 원양을 건너다니는 새의 요령은 저의 탁월한 날갯짓이 아니라 바람을 타는 것이었다. 기류에 몸을 의지한 채 잠잠하여서 더 멀리 아득하게 비행할 수 있는 거였다. 오로지 저의 눈은 맞닿은 수평의 저 심원을 따라 고정되었고 곧 당도할 그 까마득한 ‘곧’을 기어이 사모함이었다.

 

그러므로 내게 허락하시는 고통은 유익하다. 곧 당도하게 될 저 까마득한 ‘곧’을 나도 사랑한다.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당장일 수도 있는, 알 수 없는 수평의 극점은 언제나 눈앞에서 또렷하였다. 새들은 바람에 순응함으로 끝도 없는 원양의 바다를 건넌다. 성도는 성령에 순응함으로 끝 모를 인생을 넉넉히 지난다. 들풀은 자신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사랑함으로 하루 햇살이면 일용하다. 그리하여서 뿌려진 곳에 뿌리를 내리고 설 뿐이다. 한 곳에서 생을 다하는 저의 아름다움은 눈이 부시게 화려하였다.

 

가난으로 허덕이다가도 그리하여서 돌아보게 되는 아이의 사정과 저들 영혼의 피폐함을 두고 주 앞에서 간절하였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 하나님이 어찌 나를 오늘에까지 두셨는가 생각하여본다. 감사는 내가 수고하고 애쓸 때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주가 더해주시는 풍요함 때였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하물며 내게 두시는 자유로움이 저 새들만 못할까?

 

인내는 훈련이다. 훈련된 자만이 인내할 수 있다. 그 정의는 뚜렷하여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곧 쥐뿔도 없으면서 나는 먼 바다를 건너고, 열악한 나뭇가지를 자유롭게 날아들며, 돌 틈 낭떠러지 척박한 흙 한 줌 위에서도 피어난다. 그럴 수 있는 비밀에 대하여는 나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힘이 나를 주도하신다. 그 힘은 기류를 타고 먼 바다를 건너온 새의 품에 있다. 보도블록 한 치 흙도 안 되는 사이에서 피어난 들꽃의 푸르른 잎새에 있다. 있는 듯 없는 나의 하루 어느 순간 순간마다에 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