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잠언 6:27-29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편 66:10-12, 8-9
다들 어쩌나, 싶게 마음이 어려웠다. 아래층 아이엄마는 기어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아이는 울산으로 보내져 늙으신 조부모와 살게 되었다. 이혼한 아빠에게는 새 식구들이 있어 아이를 맡을 수 없었다. 아이는 정을 주고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것으로 알았다. 다들 여의치 않아 누구에게 준 것 같다. 아내는 아이 이모와 통화를 하고, 아이와 카톡을 한 후에 울먹거리며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는 씩씩하게, 대수롭지 않은 듯 굴었다.
비몽사몽간에 아이가 집전화로 전화를 하였다. 첫 마디가 전날 새벽에 한 달 치 수면제를 털어먹고 잤는데 죽지 않았다고 하였다. 순간 헉, 하고 숨을 토했다. 야단을 치고 뭐라 바른 말을 한들 아이는 졸린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병원에 입원을 해야겠는데 부모가 허락을 안 한다고 했다. 입원이 능사가 아니라 네 마음이 우선이라고 말해주었다. 감기몸살 같은 것이다. 아파 죽겠다고 하면서 여전히 몸을 돌보지 않는 미련한 짓 같았다. 엄마와 대신 통화를 해줄 수 없냐고 물었다.
건 그렇고 나는 전화 저편의 아이를 붙들고 기도를 하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주의 도우심만을 바랐다. 아이엄마와 전화를 하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또 아이의 심정을 전해주었다. 애가 해도 너무 했다. 상식적인 눈으로는 막 사는 꼴밖에 아니었다. 그러니, 그래도 상식적인 눈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기엔 어쨌든 아이가 아픈 것이다. 어떻게 정신 차리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우리 모두 마찬가지였다. 다시 입원시켜봐야 뭐하나, 싶은 거였다.
약물치료보다 상담치료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게 또 가격이 만만치 않고 갈만한 곳이 몇 곳 없어, 내가 차라리 상담사자격증을 딸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약사애와 통화를 하는데 그 애 조카도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뜬금없이 미용기술을 배우고 있다나? 약물치료를 하고 있다지만 그게 늘 되풀이 되는 모양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한 날에 같은 사연이 물밀 듯 밀려와 나는 휘청거렸다. 신대원을 하면서 두 학기 심리상담학을 듣긴 했지만, 나는 늘 내가 너무 이입이 돼서 자신이 없었다.
다 늦어 비가 꽤 내리는데 장모와 손위처남이 기르는 개를 데리고 왔다. 장모 팔순잔치도 못해드렸고, 큰애 입사준비로 두어 해를 그냥 건너뛰곤 다 같이 괌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데 기르던 개를 어찌할 수 없어 열흘 간 우리 집에 맡기게 된 것이다. 어찌나 수선을 떨고 좋아하는지 정신이 없더니만, 다들 돌아가고 혼자 남겨지자 앓는 소리를 하며 시무룩하였다. 문가 쪽에 앉아 늙은 노모를 찾는지 녀석은 밭은 숨만 색색거렸다. 안됐고 측은하여 안방으로 아이를 옮겨 재웠다.
나 원. 오늘 말씀 앞에서 나는 이 모든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묵상한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나름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데야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자기가 위로를 찾아 그것으로 낙을 삼으려고 하는 데야. 이는 마치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것과 같아서 그런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불을 품고 있으니 옷이 타는 것이고 숯불을 밟고 있으니 발이 데는 것이어서 결국 ‘그를 만지는 자마다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사는 게 지옥인 셈이다.
참 신기한 건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싫은 것이다. 나는 아이와 기도하면서 그러는 우리의 아집과 고집을 꺾어달라고 하였다. 주밖에 도우심이 없음을 알게 해달라고 빌었다. 믿음은 어떤 작용이 아니라 인격이다.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함께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가능하였다. 이를 인정하는 게 믿음이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자기 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그러니 저들을 어찌할까?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어떤 처치로 치유가 되며 위로가 될까? 그럴까 하여 일에 매진하고 힐링을 운운하며 여행을 떠나고 사람을 찾고 알아서 위로를 삼으려 하는 다음에야 별 수 없는 일이다. 불을 품고서야, 숯불을 밟고서야, 그렇듯 ‘남의 아내’와 통간하며 하나님 없는 삶으로 어찌 해보려고 하는 다음에야….
기질이 바뀌고 성향이 달라져야 하는데 그 바탕이 뒤집어지지 않고는 어찌 방도가 없다. 부모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7-8).” 이를 받아들여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게 은혜였다.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구속을 더하시지만 어떤 이는 받고 어떤 이는 물린다. 끝내 거절하느냐 응낙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았다.
이와 같은 진리는 논리가 아니다. 납득이나 설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지식이 아니어서 이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진리는 결국 인격이다.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데, 어떤 직감이 또는 느낌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주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감정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믿음이란 전적으로 주를 의지하려는 결단이다. 다른 속셈이 없다. 주님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내는 아래층아이와 카톡을 주고받으며 안타까움이 절절하였다. 기도하자. 기도밖에는 답이 없다. 어찌 우리가 나서서 될 일도 아니고 나선들 저들 영혼을 좌지우지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저들이 순순히 말을 듣는 것도 아니어서, 주의 긍휼하심을 바랄 뿐. 주의 자비와 인자하심이 아이엄마에게 임하시기를, 상처로 점점 영악해지는 아이와 함께 하시기를, 속수무책 감당할 수 없어하는 부모에게 나타나시기를, 반목과 반항으로 멋대로 구는 아이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자. 기도밖에 답이 없다.
오늘 시편의 말씀을 읊조린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한심하게 여기지만 정작 자신들은 불 가운데 놓여 가슴이 타들어가고 날마다 불에 데는 형국인데,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우리는 이제 안다. 하나님밖에 답이 없다.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되었다(시 66:10-12, 8-9).
이를 알게 하였으면, 저들로 주 앞에 돌아와 우리로 실족함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총을 알게 할 수만 있다면…. 주를 송축할지라. 우리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 아무리 뭐라 해도 소용없는 아이를 붙들고 나는 기도하였다. 억지로라도 아멘, 하게 하였다. 너나 나나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3).” 우리의 수고와 애씀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하실 것이다. 저들을 자꾸 이 부족한 사람 곁으로 드미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였다. 기도하게 하신다. 나의 도고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주가 하신다. 주가 하심을 알게 하시려고 오늘 내게 두시는 거였다.
나는 다만 증인이라, 내게 행하신 주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나는 신뢰한다. 나야말로 안하무인에 가당치도 않던 이가 아니었나? 막무가내였던 나를 돌이켜 오늘에 두신 이가 나를 위해 기도한 이들의 도고에 응답하신 거였다. 오늘의 나는 누구의 기도 응답인 것이다. 어느 날, 어느 훗날에 저 아이가 그리고 아이의 부모가 주 앞에 나아와 나와 같이 증인이 될 수 있기를, 그럴 수 있는 지름길은 나의 기도였다. 주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시 17:6).” 울산 조부모 밑으로 옮겨 간 아이를 위해 아내가 기도한다. 그 아이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아이 때문에 살다 정신병원에 들어간 아이엄마를 위해 기도한다.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울분으로 막 살 듯 하는 아이를 위해 나는 기도한다. 저를 어쩌지 못해 속수무책인 그 부모를 위해 기도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38:15).” 반드시 주의 긍휼하심이 저들과 함께 하실 것을.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1-23).”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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