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날마다,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전봉석 2017. 4. 8. 07:4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잠언 8:34-35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편 68:19

 

 

 

백일장에 나가는 아이에게, 먼저 주어진 글감을 놓고 자기 생활로 가져와 연관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 그냥 덮어놓고 쓰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였다. 쓸거리가 떠올랐다면 이를 풀어 글의 구성을 개략적으로나마 잡고, 그 안에 담고 싶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한 뒤에 글쓰기를 하라고 일렀다. 글감- 자유연상- 참주제- 제목- 각 단락의 소주제- 작성. 성격 좋게 아이는 참가번호가 적힌 쪽지를 보내왔다. 전날에도 보니까 뭘 쓸까? 하다 떠오르는 것을 바로 작성하여서 다시 이른 말이었다.

 

말씀을 묵상하고 이를 삶에 가져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말씀이 혹은 어느 단어나 느낌이 주는 것을 묵상할 때, 자유연상과 같이 시선을 고정되고 생각은 자유롭다. 이때 ‘누구 이야기’로 흘러가는 경우도 있고 ‘자기 이야기’로 흘러오는 경우도 있다. 이 둘을 모두 자기 이야기로 가져오는 게 묵상이고, 하나님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게 증거다. 여기서 참주제와 같은 역할은 내 생각이 어떠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뭐라 하시냐에 집중하는 것이고, 제목은 곧 삶에 따른 정돈된 명제가 된다. 각 구성은 실제의 생활에서 면면을 이루는 실체가 되고, 작성은 곧 사는 일이다.

 

말씀을 읽는다는 건 성령이 개입하실 여지를 두는 것이고, 저가 기억나게 하시는 일들을 말씀에 비춰 삶에 적응하는 것이 순종이 된다. 성령의 개입은 전적으로 느낌에 의한 것이겠으나 뚜렷한 삶의 방식으로 읽혀지고 이해된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오늘 잠언의 가닥은 ‘듣다’와 ‘기다리다’이다. 듣기 위해서는 멈춰야 한다. 하던 걸 중단하지 않을 때 잘못 듣는다.

 

초등학교 5학년 아이에게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 카페에 가입시켰다. 이제 종이글로 썼던 것을 온라인에 모아 서로가 같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내어놓게 하려는 거였다. 한데 이 단순한 걸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 것도 간신히 할 수 있었던 건 도무지 듣질 않는다. 기다릴 수 없는 것이다. 알아요! 하곤 멋대로 하다 인터넷이 다운되기까지 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두 아이는 벌써 가입을 했고, 시를 한 편씩 써서 자신들의 글을 올렸다. 그냥 내버려두자니 아인 결국 자기 분에 겨워 씩씩거렸다. 다들 신기해하며 다음 걸 하는데 저 혼자 끙끙거리며 골을 부리는 꼴이라니!

 

하나님 앞에서 고집을 떠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그래놓고는 골이 나서 씩씩거려대는 게 낯설지 않다.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복되다. 기다림은 연마가 필요하다. 자기를 죽이지 않는 이상 못 기다리겠는 것이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말씀 앞에 앉는 일, 이를 듣고 삶에 적용하여 실제가 되게 하는 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말씀에 삶이 있었고 삶에 말씀이 있었다.

 

이를 아는 자가 다윗의 기도에 아멘 할 수 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시 68:19).” 들으면 그처럼 간단한 걸, ‘나도 알아요!’ 하면서 멋대로 굴 때 그 길이 참 고단해진다. 아인 여러 게임을 해봤고, 그러느라 신규 아이디를 생성하는 데 익숙하였다. 그런데 잘 안 되자, 왜 카페를 다음에 만들었어요? 구글에 만들지! 네이버가 더 좋은데? 하며 쓸데없는 소릴 해대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이나….

 

‘우리’라고 하는 이 공통된 구역의 삶이란 게 참 똑같다. 그래서 믿음을 체험에 두는 건 위험한 일이다. 믿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 체험한 것을 믿는 게 아니다. 체험은 그저 말씀에 따른 증거일 뿐이다. 체험을 통해 말씀을 찾으려 하면 소위 이단이 되거나 나 홀로 신앙이 되기 십상이다. 때론 체험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처럼 요란하게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아니고, 신앙도 그저 밍밍하니 내 것만 심심한 것 같기도 하다. 굳이 특별한 것이 체험은 아니다.

 

가령 일기를 쓸 때 쓸 얘기가 없다는 호소를 한다. 그날이 그날 같다는 것인데, 체험은 바로 그 소소한 것에 스며있는 것이다. 어제 먹은 밥은 어제 한 날에 족하였다. 같은 길을 지나다니고 늘 같은 일에 별 거 아닌 또 하루를 산 것 같지만, 그건 체험이 없는 게 아니라 그 가운데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순간이 다른 그 면면의 소소한 일상에서 지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저가 부르는 소리에 일일이 응답하며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는 걸 내 삶 가운데서 누리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와 같은 고백이 어찌 저만의 것일까? 하나님은 무수한 우연을 동원하시면서 우리의 면면에 스며드신다. 우연처럼 아이가 오고, 될까? 싶던 아이가 마음을 열거나, 얜 될 거야! 했던 아이는 소용이 없거나. 같이 글을 쓰고 얘길 나누고, 나는 그러는 동안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다채로운가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하여 우리에게 두시는 소망이 무엇인지를. 은연중에 또는 의도적으로 증명한다.

 

사는 게 곧 무기다. 의의 병기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말씀을 사랑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오늘을 사는 여정이 ‘하나님의 영으로 쓰신 편지’가 되어 누군가에게 읽혀진다는 건 참으로 고결한 일이다. 나에게서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 이를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으로 이해하든,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바울이 증거하는 칭의로 이해되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성결은 재련 과정이 보여지는 것이다.

 

곧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6).” 나로 주의 거룩하심을 나타나게 하시려고,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때론 성도의 한 날이 고단한 것은 당연하였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대단한 득도의 경지에 올랐거나 전혀 아무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아이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나 또한 어이가 없어하다 그게 나였구나, 하는 체험을 떠올리면 송구하여서라도 참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느새 면면에 투영이 되어 생각이 되고,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지면서 행동 행동은 습관이 되고 성품이 되고 인격이 되어 운명을 바꿔놓는다. 그럴 수 있는 게 소망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피차가 어찌 될 지는 누가 알겠나? 이에 누군 소망을 붙들고 씨름하고, 누군 막연하여서 방기한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깨끗하게 하느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어떤 기준을 잃어버리면 우왕좌왕하게 돼 있다.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산다는 일은, 때로 그 기준에서 멀어져 막연할지라도 곧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겠으나 말씀을 경히 여길 때는 어떤 대책이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5).”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또는 아이들에게 묵상을 쓸 것을 종종 권한다. 쓴다는 행위는 보다 구체적인 행위여서 단어를 고르고 한 날을 떠올리며 말씀으로 가져오는 일에서 가히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라는 다소 막연한 소리가 실제가 된다. 가끔씩 놀라는 건,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 하는 것인데 실은 그게 내 생각이 아니라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을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읽어내다 실체도 없는 줄 알았던 그 역사가 나의 하루 도처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데서 놀란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일기 쓸 게 없다고 할 때면 그 보잘것없는 일상의 소소한 경이로움을 일깨워주느라 말이 많아진다. 네가 아침에 또 눈을 떴어? 놀랍지 않니? 혼자서 옷을 입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학교를 가고 친구들을 만나고 수업을 했어? 대단하지 않아? 그러는 동안 새가 날고 바람이 불고 봄기운에 나무들이 새 싹을 틔우고 있었어? 늘 지나치는 문방구 아줌마는 새로 파마를 했고, 골목 안쪽에 새로 핸드폰 매장이 생겼네? 하면서 이어지는 나의 호들갑에 새삼 아이는 일상의 그 소소함에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다시 소리 내어 읽어보자.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 8:34-35).” 다시 한 날을 허락하신, 이보다 더 큰 기적이 또 있을까? 그리하여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시 68:19).” 절로 찬송이 되어지는 삶이 복이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