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잠언 10:24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시편 70:3
내 안에 어떤 소망을 두고 이를 행하게 하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그럼 뭔가 그 일이 순탄하거나 어떤 성과가 뚜렷하거나 내 안에 만족함을 두시든가 해야 하지 않나? 기대했던 것은 번번이 엇나가고, 혼자 뭐하나? 싶게 마음이 어렵게 하시니! 그래서 다음 말씀이 받치고 있던 거였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4).”
결국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지는 않는다. 어떤 보람을 더하시기 위해 환경을 조성하시는 것도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염두에 두지 않는 모든 수고와 애씀은 결과적으로 그것에 노예가 될 뿐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그리 쉽게 아이들이 올 거라 짐작하고 있던 내가 또 순진하였다. 거기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고, 자리 배치도 늘리고,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다놓고, 혹시 몰라 과자도 몇 봉, 심지어 설교원고도 읽기 쉽게 나열형으로 정리하고, 그런데 그게 다 싱겁게 됐다.
내 안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말씀이 정곡을 찌르신다. 성령을 따라 행했는지 돌아보게 하신다. 늘 보면 목회란 김칫국부터 마시는 경향이 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성과를 먼저 기대하고 출발하기 때문이겠다. 그러다 번번이 미끄러지면서도 그게 참 고쳐지지가 않는다. 앞서가지 말아야 할 텐데, 마음은 늘 저만치 기대가 컸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는 시무룩하여 개를 데리고 나왔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게 사람 못지않다. 그래서 눈칠 보고 곁을 내주고 그러다 실망하면 시무룩하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아!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그리스도도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심이었구나. 나는 참 변변치 못하여서 한껏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 아무도 오지 않고 예배를 시작해야 할 때, 설교를 하면서 순간 싸하게 올라오는 통에 멈추고 약을 먹어야 하나? 잠시 나갔다 와야 하나? 그만하자 그럴까? 별의 별 생각을 다하면서 간신히 설교를 이어갈 수 있었다.
언제쯤 되면 좀 의연해질 수 있을까? 배가 아픈 것 같고 금세라도 토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싶은? 아니 숨고 싶은? 어찌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설교를 이어가느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은 삐쭉거리고 얼굴은 붉어져 혼자 수습하며 설교를 해야 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갑자기 머리가 멍하니 왜 이 말을 하고 있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당황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가끔은 내가 너무 찌질하여서 송구스럽고 민망하다. 광고시간에 날 위해 기도를 부탁하다 울컥하였다.
그러니 이게 그냥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반응으로 나타나니까 더 어렵다. 왜 그래? 하고 물으면 난들 아나? 몸은 저 혼자 예민하여서 싸한 기운이 두려움으로 바뀌기까지 하는 데야 별 수 있나? 그래도 설교 중에 약을 먹지는 않았다. 신기한 건 그래서 그냥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인데 오히려 여느 주일보다 설교가 더 길어졌다. 정말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시는 것일까? 것도 뭐 하나 제대로 잘 하는 게 없는 사람인데….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 10:24).” 이 아침 이 말씀을 입에 머금고 앉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고 원하는 게 무엇일까? 의당 내가 원하는 걸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내가 하려고 하는 게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성령이 하실 수 있게, 그 성령은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신다. 결국 아이들이 안 오고 저 애가 또 비켜섰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이 어려운 거였다.
하나님의 문제,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인하여 자신이 결국 사람의 죄가 되실 수밖에 없었던, 보기 좋게 시작하셨다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실패로 끝나는 자리를 자처하실 수밖에 없었던,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 여태 아무렇지 않던 의존과 답습과 죄의 전가로부터 끊어지게 하시려고, 곧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이에 나를 증인으로 삼으신 거였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그리하여 내 안에 두시는 소망을 좇아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나아가는 거였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그러기 위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 어쩌면 실망도 하나님의 마음일 테고, 서운함과 답답함도 주의 마음이었다.
정말이지 한 영혼을 주 앞에 인도하기가 이처럼 어려운 거였다. 가뜩이나 안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여태 안 믿는 자로 살아오는 동안에 길들여진 모든 것들로부터 헤어난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는 어림없는 일이겠다. 주가 하셔야하지 내가 어찌 추슬러볼 게 아닌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의 사소한 마음과 막연한 기대와 공연한 바람과 싸워야 한다. 성령이 아니시면 나도 너도 감당할 수 없는 거였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러므로 뭘 어떻게, 얼마나 많이 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 뭘 주지 않으려고 했느냐의 문제다. 내가 이만큼 수고했는데, 저만큼 애썼는데,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것만은 주지 않으려고 하던 게 무엇일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그렇구나. 늘 나는 거저 받았으면서 거저 주는 데 익숙하지가 않은 거였구나!
‘이만큼 했는데’ 싶은 마음이 늘 우선하였던 것도,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9-10).” 주께 맡기지 못함으로 번번이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면할수록 나는 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느낄 따름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주눅이 들고 실의에 빠져 시무룩하니 마음을 졸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또한 교만이겠구나!
그저 다만, 사는 일이다. 살면서 드러나는 게 의다. 하나님의 의는 나의 약하고 쓸모없음에 있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롬 4:6)” 나는 살면서 삶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드려지는 게 되어야 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입을 삐쭉거리고 있을 때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의 음성이 놀랍다. 그리하여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나의 약한 것들이 자랑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그러므로 내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신다는 것. 나로 하여금 이처럼 말씀에 간절하게 하시는 까닭은 말씀밖에는 의지할 게 없다는 거였다.
어디 휘익, 바람이라도 쐬고 싶고 누구라도 좀 만나고 싶고 뭐라도 해야겠는데, 그런들! 모든 게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그래서 그 긴 시간을 그처럼 수고하고 애쓰게 하신 것이다. 사람 좋기로 유명하여 누굴 만나든 허허 잘 지내는 것 같던 사람이 실은 고역이었다. 마치 돈이 그러했고, 어떤 위로가 즐거움이 만족이 그러했다. 그런들, 다 헛되었다. 선생도 친구도 별 거 아니었다.
나의 약함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시는 거였다. 그래서 말씀 붙들고, 입을 삐쭉거리다가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거였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 3:7).” 우리의 기준은 말씀이시다. 이래서 저런가? 싶으면 안달이 난다. 그래서 이런가? 싶으면 조바심에 견딜 수가 없다. 이 모두는 내가 가진 전대와 손에 든 지팡이를 의지하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사랑은 결코 난지도 같은 게 아니다. 쓰레기더미에 흰 눈이 쌓여 순식간에 세상이 하얗게 바뀌는 따위의 기적이 아닌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결국은 하나님이시다!
곧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성향의 문제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의 문제가 아니었다. 행동과 말투가 거룩한데 그 속은 문드러진 위인들도 많다. 비록 누추하고 보잘것없으나 성향은 그 내밀한 성품의 것이어서 주를 향한 나의 마음이 가장 우선이었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리하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8).”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하나님이여!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시 70:3).” 심지어 내 안에서 나를 쏘는 자를 물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 유난을 떠는 게 아니라 유별난 것이 되어서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잠 10:9).” 부디 언제까지나 나의 걸음이 되어주시기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시 7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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