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전봉석 2017. 4. 9. 07:31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잠언 9:18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시편 69:16

 

 

 

주일 전날, 이러저러해서 주일 날 못 오겠다는 문자를 받는 일보다 우울한 건 없는 것 같다. 한 영혼을 품고 씨름한다는 게 얼마나 세찬 바람을 견뎌야 하는 일인지를, 엄살을 떨 듯 되새겨본다. 내가 얘 땜에 왜? 싶은 억울함마저 드는 일이다. 그럼 그러고 말면 그만인데 그게 또 안 되니까, 나로서는 그게 신기한 것이다. 아무튼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사람처럼 시무룩해졌다.

 

여느 토요일과 같이 한가롭고 여유로웠다. 아내와 성경공부를 하고 같이 점심을 먹었다. 두 아이만이 와서 기행문을 쓰고 탁구를 쳤다. 한 녀석은 두어 번 길거리에서 마주쳤는데, 왜 안 왔는지 묻지 않았다. 털고 쓸고 닦고 청소를 마치니까 그야말로 한 주간이 다 끝난 것 같았다. 내가 자청하여 짊어지고 이를 의로 여기는 마음도 악하다. 어떤 의로움에 겨워 뭐라도 해줄 것처럼 굴다 제풀에 식는 마음도 선하지 못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주가 행하게 하실 때 주와 함께 하는 게 선하다. 주가 행하심으로 되어지는 일 외에는 내가 우쭐하여 나설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그릇됨을 향한 진노로 나타난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고후 5:11).” 왜 저들을 설득하고 저에게 주의 사랑을 나타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짚어주는 것 같다. 하지만 이에 반하는 게 어리석음이다. 오늘 잠언은 이를 말하고 있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잠 9:18).”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해줘야 할 책임이 우리에겐 있다. 하지만 말을 해주었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시하면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린 주의 사랑을 안다. 이는 두렵기도 하다. 주가 사랑하신다는 건 불의를 참지 못하신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 두려움을 알기에 우린 사람에게 권하고 저들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근데 그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란 걸 내가 행할 땐 몰랐는데 내가 알리는 자리에 있으니까 답답하기만 하다. 전에도 누가 나를 두고 그처럼 답답함을 느꼈을 테지? 그 고집과 아집을 보고 눈물지었을 테니까!

 

아이가 밤새 일하고 새벽에 그냥 교회로 오는 게 피곤할 것 같아서, 그냥 알아서 오후에 가까운 교횔 나가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문자에 뭐라 답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라, 하면 동조하는 셈이고 다시 뭐라 말한들 것도 뭐가 문제냐? 할 테니까. 나는 여전히 마음이 좋지 않아, ‘주님’ 하고 긴 호흡을 되풀이할 뿐이다. 어떨 땐 너무 싫다. 그러든가 말든가, 아주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밉다. 귀찮고 얄밉다. 마음은 저 혼자 끙끙거리다 결국엔 저주와 원망과 무관심으로 돌아선다. 그러니 주여,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내 속이 끓는 것이다.

 

대체 왜 얘 때문에 이처럼 마음이 어려워야 하나? 억울하기까지 하지만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을, 그 마음을 주께서 붙드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이런 게 기도나 될까? 동기 전도사 내외가 이래저래, 이사를 마치고 내게 고맙다고 전화를 했는데 그게 또 송구할 따름이었다. 요는 ‘기도해주셔서’ 그걸 느낀다는 것인데, 나야말로 내가 이러는 게 기도이기나 할까? 싶은데도 말이다. 그저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님, 하고 멈추는 일이 고작이니까 공연히 유난을 떠나 싶은 것이다.

 

커피를 내리면서, 그 이름과 사연을 적어둔 것은 ‘기도할게.’ 하고 말한 데 따른 책임이기도 하였다. 그래놓고는 까먹고 있기 일쑤니까 말이다. 달력에도 적어두고 창가에 서서 책을 읽을 때도 혹시 몰라 메모지를 붙여두는 정도여서, 뭐 그렇게 대단히 기승전결 주께 아뢰는 게 아니어서 부끄러웠다. 그런 내가 아이 문자를 받고 내내 끙끙 앓듯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래서 그냥 ‘주님!’ 하고 긴 날숨을 혹은 들숨을 내뱉고 삼키는 게 고작이다. 이를 좀 확대해석하면, 이런 걸 주가 주시는 근심으로 여겨도 되는 걸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

 

모르겠다. 이 미천한 자의 보잘것없는 아룀도 기도라고 할 수 있다면, 내 안에 두시는 근심으로 나는 볶여서 주의 이름을 부를 따름이다. 그러다 힘에 겨우면 ‘쟤 땜에 내가 왜 이 골탕을 먹어야 해?’ 하는 분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것 같고, 그런들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도 않고. 한데도 내가 아뢰지 않으면 내가 죽겠으니까,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와 함께 해주세요. 단순하여서 민망하고 처량하여서 애통한다.

 

보자. 그와 같은 나의 근심이 얼마나 나를, 얼마나 간절하게 하는가? 내 안에 쉼 없이 변증하게 하는가? 때론 우리의 어리석음과 고집불통인 죄로 인해 얼마나 분해하는가?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주를 사모하게도 하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열심을 내게 하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벌하게도 하는지! 일체 ‘그 일에 대하여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낸다’는 말씀은 그러므로 내가 저들로 시달리는 줄 알았는데 실은 내 안에 여전하였던 의심과 갈등과 원망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저를 위해 기도하는 줄 알았는데 날 위한 것이 되었다.

 

간절함으로 변증하고 분해하고 두려워하며 사모함으로 열심을 다해 죄에 맞서 벌하게 하신다. 마치 와주듯 하는 아이들의 태도에 괘씸해하다가도 엄밀하게 그 태도가 틀린 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소와 양이 없으면 우리는 깨끗하겠지만 그 힘으로 얻는 게 더 많은 법이다. 나아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비로소 난 다만 주로 즐거워할 줄 알게 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8).”

 

정작 아이들이 오고 안 오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위로가 되게 하신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6-7).” 애들이 온대? 주일 점심거리를 준비하다 아내가 물었다. 그랬다니까! 나는 그래서 좀 더 넉넉하게 하자고 말하였다. 늘 그랬다가 남은 음식으로 일주일을 먹게 되는 셈이지만 어쩌겠나.

 

주를 향한 우리의 마음은 주로 인하여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늘 아내와 서로 다짐하는 것은 아이들을 사랑하되 의지하지는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자. 그래놓고 실망하는 거야 우리 몫이지만 것도 훈장으로 삼자.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16).” 나는 고린도후서 7장에서 바울의 그 심정이 내 것과 같은가? 생각하였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저가 아니라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신뢰하는 것도 저가 아니라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말은 로마서 5장으로 성경공부를 하다 아내에게 곁들인 설명이기도 하였다. 주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건 우리로 인한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 때문이다. 이는 곧 사람을 창조하실 때 불어놓으셨던 생기로 인해 생령이 된 까닭이다. 복음을 듣고 주를 믿는다고 하는 일은 이를 입증하는 게 된다. 어려워하는 아내를 위해 이렇게 설명해보았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건 그 애들이 다른 애들과 달리 그만한 자격이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 핏줄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고 내 새끼니까 말이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우릴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까닭은 내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게서 주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아이들을 사랑하는 까닭도 저 아이들이 뭔가 대단히 그만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주가 주시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좀 뻔뻔스럽고 염치없지만 그래도 되는 게 나는 주의 자녀인 것이다.

 

우리 집에 와 있는 개도 그게 형님네 개고 늙으신 장모가 애지중지 기르던 개니까 우리가 애정을 갖고 맡아두었다. 추상적으로 동물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너니까’이다. 너니까, 나니까, 그게 우리가 되어 너와 나는 별개의 것일 수 없는 게 된다. 하물며 우리 교회, 우리 아이들을 향한 이 마음이 어찌 사사로울 수 있나? 주가 사랑하심으로 특별히 오늘 우리 곁에 보내시고 맡기신 게 된다면, 그래서 자꾸 마음이 가고 정성을 쏟게 되는 일이라면 기꺼움으로 할 필요가 있다. 감사함으로 어려워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으며 오늘에 이르러 소소한 감사와 감사가 도우심과 도우심의 손길로 빚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시 69:16).” 그러니 나는 얼마나 우매한가?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얼마나 고집불통인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5).” 그런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손길과 기도로 나와 함께 하시오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9).”


이제는 오직 주만을 바라오니,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