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전봉석 2017. 4. 11. 07:47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잠언 11:30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

시편 71:7-8

 

 

 

누가 왔다. 슬그머니 안정제를 먹어야 했다. 불안은 두통 같아서 느닷없었다. 엊그제 동기 전도사 내외가 가까운 안산으로 이사를 마치고, 심방 예배를 드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저 마음으로 기도로 대신하였다. 그러게. 같은 층 목사 내외는 뭘 좀 같이 했으면 하는데, 저들이 와서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도 나는 벅차했다. 빙충맞아 면목이 없어 그게 또 마음을 어렵게도 하였다.

 

아직도 가끔은 기도한다. ‘사탄의 가시’를 내게 두신 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는,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이와 같은 말씀을 내게 직접 가져오는 게 송구할 따름이지만, 겨우 같이 앉아서 얘기하는 일조차 조심하게 하시려는 데는 공감한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내가 건강하였다면 아주 기고만장했을 건 불을 본 듯 뻔하다.

 

조금은 서글프고 때론 뭐라 설명을 덧붙이기 뭐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기도 하지만 것도 별 수 없다. 주는 내 안에서 강하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13:3).” 그러므로 덕을 세우게 하시려는 데 주목한다.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12:19).”

 

누가 와서, 저는 미주알고주알 말이 많았다. 그러다가도 문득 ‘이러고 있는’ 내가 신기한 듯 근황을 묻곤 하였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나이다.’ 어제도 하루 종일 혼자 들어앉아 있는 내가 신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뭔 일을 특별히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자신들의 분주함에 비춰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치다. 그래서 신기해하다가도 그것 때문에 우습게도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고린도전후서를 읽는 동안 나의 약함이 자랑이 되는 줄을 확신하였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그것으로 친구들은 멀리하고 운신의 폭은 좁아졌으며 맨날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으나, ‘주는 내 안에서 강하시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서도 약한 것 외에 자랑할 게 없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12:5).” 말씀 앞에 위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크게 쓰시는 사람도 있고 작게 쓰시는 사람도 있겠으나 중요한 건 하나님이 필요한 데 우리를 두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섬김이 내가 추구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무색하여진다. 섬김과 헌신이라는 구실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다면 이는 결코 선할 수 없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뒤집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또 저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따랐을 것 아닌가? 한데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아찔하다. 언제든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나?

 

수시로 드는 ‘주의 이름으로’ 뭔가 행한다는 그 자체가 가장 위험한 거였다. 정작 그게 정말로 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고 드려지는 일이라면 그런 소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생색을 내듯 주 앞에서도 내세우지 않을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취하여 사용하실 때면 정작 나는 그 쓰임을 의식하고 의도하여 꾸며낼 수도 없다. 모르고 지나갔는데 후에 보니까 주가 나를 사용하시는 거였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25:37).”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할 때면 새삼 내가 취해야 할 자세를 바로하게 한다. 그런데도 본의 아니게 내가 마치 선반 위에 오른 것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고 도드라져 먼저 눈에 띄는 경우에 있다면, 하나님이 지금 나를 만들어가고 계시는구나! 알 수 있다. 또한 옴짝달싹 못하게 묶인 듯 할 수 있는 게 없고 하는 것도 없이 극히 제한된 처지에 놓여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들어 사용하고 계시는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지나지 않아 왜 그러셨는지 말씀해주신다.

 

그러므로 ‘섬김’을 의도하면서 섬기려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의식된다는 건 그만큼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소리가 되니까 말이다. ‘내가 이만큼 하는 게, 이렇게 하는 게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일 거야!’라든가, ‘이렇게 하는 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될 거야!’ 하는 식의 의식적인 행위가 자칫 자기만족을 부추기는 게 된다. 그런 이들이 어느 훗날 주 앞에서 억울하기만 하다. 우리가 주를 위해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했지 않습니까? 내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하는….

 

정작 두려운 일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게 아니라 안다고 여기며 사는 일이다. 당최 모르는 사람은 굳이 억울할 것도 없다. 모르고 살다 모르는 곳으로 갈 뿐이다. 문제는 안다고 하면서 그 앎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로 사는 것이었다.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삼키는 경우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고 의식하는 경우를 주의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직 쓰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쓰임 받는다고, 쓰임 받으려고 의식하면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일을 자처하는지도 모른다.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주를 사랑한다는 일은 주를 사랑하는 일 따로, 내 생활하는 일 따로, 교회에 헌신하는 일 따로, 내 일 하는 것 따로, 십일조 따로, 생활비 따로 엄밀히 구분하려 드는 일이 문제였다. 기독신문을 보면 종종 십일조에 대한 저명한 이의 명확한 설명이 실려 있다.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하는 일과 지역사회에 기부하는 일에 대해, 십일조에서 얼마는 선교헌금으로 얼마는 감사헌금으로 나눠서 내는 일에 대해 논하곤 한다. 다들 그럼 성경을 근거로 말씀을 뒷받침 삼아 자신의 주장을 운운하는 것이다.

 

그만큼 의식된다는 건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런 자들의 억울함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했는데!’ 하는 억울함으로 이어지게 돼 있다. 선별하여 주의 것을 구분하려는 선한 의도도 자칫 의식됨으로 이미 그 맛을 잃는 게 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위해 뭘 하면 될까?’ 하는 생각 자체가 이미 나머지로 뭘 안 해도 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늘 내 안에 이는,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식에 따른 이해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실 거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그 쓰임에 온당하지 못한 증거가 되는 것이겠다. 혼자 들어앉아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자기변명으로 이리 생각하는가, 싶어 송구하기까지 하다. 이사 심방을 와주었으면 하던 동기 전도사는 쭈뼛거리는 내게, 언제든 오실 수 있는 그 날이 이사 감사예배죠, 뭐! 하고 말을 이어주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뭘 나서서 할 수 있겠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무엇이었다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뭘’, ‘어떻게’가 따로 구분될 수 없다. 이미 충분하였다. 문득 어느 가난한 무드장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저는 찢어질 듯 가난한 살림에도 아이를 열씩이나 둔 가장이었다. 어느 날 득도한 듯 근엄한 수도자가 샌들을 고치러 왔다가 그와 같은 살림살이와 저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자 무드장이는 말했다. 그걸 왜 걱정하십니까? 주신 분이 따로 있는데요!

 

그런 거 보면 그리스도인이란 저마다 ‘생활의 달인’이 돼야 옳다. 남들은 그게 신기하고 뭘 꼭 그렇게까지 하나? 싶겠지만 저에겐 그게 새삼스러울 게 없는 생활이었다. 숙련된 삶이란 습관 된 거룩과도 같다. 거룩을 의식하며 이루는 건 거룩이 될 수 없다. 묵묵히 주신 분을 신뢰하며 주신 삶을 사는 거였다. “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잠 11:30).” 저가 의롭게 살아서 의인이 되는 게 아니라 저를 통해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의인이었다. 이와 같은 말씀을 오래 음미하고 있다 보면 내 안에 있는 안달이 복달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운지 모른다.

 

사탄도 광명한 빛으로 다가온다. 보다 의롭게 보다 헌신하며 보다 섬김을 주목하게 함으로써 정작 하나님의 의는 소진하고 자신의 의만 기억되게 하려는 것이다. 가끔은 그런 점에서 나의 비루함이 큰 축복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싸하게 올라와 누구와 얘길 하면서도 말을 조심하게 되고, 어딜 함부로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고, 그리하여 오직 주만을 바라게(바랄 수밖에 없게) 하시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 시편의 기도가 내 것을 절절하다. “나는 무리에게 이상한 징조 같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 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시 71:7-8).”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나였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5).” 이는 내가 수고하여 이루어가는 게 아니라,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으며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6).”

 

그래서 ‘불구의 삶’이 필요하였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그래야 온전한 삶이 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그리하여서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시 71:15).” 하면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