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전봉석 2017. 4. 17. 07:05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잠언 17:16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시편 77:1

 

 

 

이래저래 생각 같지 않다. 늘 당하는 일인데도 익숙하지 않다. 오려니 기다렸던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그렇지 뭐, 하다가도 늘 같은 곳만 맴도는 것 같아 싱거웠다. 개를 데리러 오면서 같이들 저녁이나 먹을까 했는데, 여행 중에 장모가 넘어지신 모양이다. 병원에 모시고 갔다 올 것처럼 하다 이내 처남댁만 와서 개를 데려갔다. 그럴 거면 아내라도 다녀올 걸, 이래저래 일이 꼬였다. 것도 정이라고 발치께서 늘 잠들던 개가 없어 이상하였다. 보내기 전에 잠깐 산책을 하였다. 가는 걸 아는지 더 붙임성 있게 굴었다.

 

공연히 시무룩해지고 할 말이 없었다. 오후께 옆 교회 젊은 목사 내외가 부활절 잘 지내셨냐며 삶을 달걀을 가져왔다. 차라도 대접할 걸 보내고 난 뒤 미안했다. 난 항상 지나고 난 뒤 어줍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잠 14:10).” 그렇듯 혼자 앓고 마는 게 느는 것 같다. 여느 날 보다 일찍 일어나 앉아 나는 그저 주님, 하고 한참씩 가만히 있는다. 비가 오려는지 여기저기가 아프다.

 

아버지는 ‘회개’에 대해 말씀을 증거하셨다. 회개는 한 번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방향을 전환한다. 더 이상 우리는 회개할 게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다만 육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죄 된 것을 행하게 됨으로 이를 자백함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9).”

 

전인적인 회개가 이루어진 자의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가치관의 변화가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리고 죄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느낌으로 통회한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9-10).”

 

함께 결단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의지적인 변화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그러므로 지‧정‧의 우리의 전인적인 회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새삼 이 말씀이 귀하고 귀했다. 그런 우리는 주 앞에 설 때면 자신의 죄를 알고 느끼고 다스리려 주 앞에 자백한다.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11).”

 

큰아이 옆에 앉아 같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슬금슬금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밍밍한 표정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는 동안의 오랜 기다림은 내 몫이기도 하겠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 느껴지기까지 숱한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삶 가운데 실천으로 나타내기까지도 말이다. 예배를 마치고 아이는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점심도 같이 못 먹고 돌아갔다. 그렇게라도 하는 게 기특하면서 서운하였다.

 

아이들을 사랑하되 아이를 바라보지 않게 해달라고 늘 기도한다. 가장 좋은 기도는 그리 믿고 얼른 잊고 마는 것 같다. 그걸 보채듯 쟁쟁거리며 채근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내 성향이 그래서 그런가, 나는 몸살이 난다. 가만있다가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공연히 서럽고 답답하고 어떤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전화라도 해볼까? 언제쯤 먼저 문자라도 할까? 안달복달 저 혼자 끙끙거리는 통에 살 수가 없다. 그러다 문득 큰아이 곁에서 아이와 함께 말씀을 듣다말고 그게 곧 신비롭다, 생각하였다. 얘가 여기까지 온 게 말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그럼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나는 다만 안달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때론 모든 게 여의치 않아 이게 무슨 주제넘은 짓인가, 싶다가도 그러라고 나를 오늘 여기에 두시는 것이구나, 생각함으로 주님께 아뢴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내가 한 게 아니다.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오늘 곁에 두시는 아이를 주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일,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는 돌아오지 않는 안타까움과 같이 무던히 기다리고 또 바라는 수밖에. 억장이 무너져 천 근 만 근 몸과 마음은 짓눌리지만 것도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일이어서 복되고 소중하였다. 내가 슬퍼하는 게 행여 주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면 용서하여 주시기를, 보다 담대함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와 상관없는 존재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볶여 안달이 나서 주께 아뢰고 자복하는 일이었다. 곧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일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오늘 잠언의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나의 미련함에 대하여 고백한다.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는 게 어찌 가당키나 할까? 나의 열심으로 헌신과 애씀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잠 17:12).”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자기 수고를 우상화하는 경우에는 답이 없다. 어쩌면 아이가 문자도 없이 그러는 게 자기는 기도모임도 하고 저들과 성경공부도 하고 나름 열심히 한다고 여겨 굳이 예배를 자원하지 않는가? 그게 어찌 아이만 그럴까! 행여 내 마음도 그와 같아서 주일마다 모두가 돌아가면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시달리는 건 아닐까?

 

아, 이 무섭고 서러운 미련함이여!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16).” 이에 부대끼고 볶여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놓아두시는 게 은혜였다. 일꾼으로서 해야 하는 수고는 기도였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8).” 내가 누굴 좀 보내주세요, 할 때 실은 내가 의지하려는 마음이 너무 커서 주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거였다.

 

오롯이 주님과 나의 문제다. 마치 뭔가 대단히 누굴 위하고 무얼 두고 애쓰는 것 같지만, 나 때문이다. 내 문제였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다. 누굴 위해 희생을 운운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결국은 나 혼자 들어가야 할 문이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다. 같이 갈 수도 없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왜 기독도는 혼자서 그 길을 갔을까?

 

동행은 주가 허락하시는 교회였다. 싫다고 마다하는 데는 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를 서러워 주춤거리거나 되돌아가는 일은 미련하였다. 하나님과 나, 내 일이었던 것이다. 문득 나무 아래 앉아 생각하였다. 시달리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러니 나는 어쩔 것인가?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일은 온 가족이 같은 길을 걷는 거였다. 거기서 위로를 얻는다. 나는 내 입을 열어 주를 찬송하였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시 77:1).”

 

남들이 아무리 좋다, 좋다 하면 무슨 소용인가?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2).”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35:22).” 또한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