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전봉석 2017. 4. 19. 07:36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잠언 19:21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시편 79:13

 

 

 

신앙이란 하나님의 영이 나의 일상에 거하시는 것이다. 나의 종교적 성향이 스스로를 의롭게 하려는 강박이 아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그럴 수 있는 건 나의 어떤 피곤한 노력이 아니라,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 쉼이다. 그리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신 말씀에 거하는 생활이다.

 

요란하게 봄비가 내렸다. 덕분에 눅지근한 하루였다. 다들 바쁜지 곁을 같이 한 사무실들은 종일토록 비어 있었다. 폴 트루니에의 <인간이란 무엇인가>(포이에마)를 주문했다. 말틴 밥간 부부의 <영혼치료상담>을 읽다가 문득 저의 원론적인 연구를 보고 싶었다. 성경적인 접근이 아니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이러한 접근이 나를 유도하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을 대할수록 정상적인(?) 가정을 보기 힘들다.

 

중2 남자아이와 수업을 하였다. 두 여자아이는 다음 주 중간고사가 끝나고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국어요점정리를 시키고 같이 탁구를 쳤다. 아이는 지나치게 면피용으로 행동했다. 시킨 것만 하고 하자는 것만 했다. 것도 마지못해 했다. 그래도 전에 같으면 끝나기 무섭게 돌아가지 못해 안달이었을 텐데, 탁구대를 들여놓기 잘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아직 성급한 바람이다. 아이는 다만 묻는 말에만 경계하듯 대답을 한다. 뭐라 나무라듯 말을 하면 입을 꾹, 닫아버린다. 그러니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더 좋은 수가 없다.

 

새로 오는 초등학교 아이가 있는데 그게 또 심상치가 않은 모양이다. 말이 없는 건 둘째 치고 말을 해야 할 때도 울먹거린다는 것이다. 부모가 같이 살지 않는 것 같아, 밤에는 옆 동 이모네 가서 잔대. 아내는 소소한 이야기를 흘렸다. 가정예배를 드리기에 앞서 그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섣불리 말로 옮기기 뭐한 짐작도 있었다. 다들 왜 그래? 딸애의 안타까운 표현이 적절하였다. 다들 왜 그런 걸까? 온전한 가정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마치 ‘그런 아이들’만 보내신 것인지. 그렇다는 건 상대하기 어려운 아이엄마가 뒤에 있다는 소리다.

 

한 애가 토요일만 글방에 오게 됐다고 시큰둥해했다. 줄줄이 시키는 게 너무 많아서 결국 여느 학원 시간과 겹쳐 그리 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노래방도우미로 일하는 것 같은데(전적으로 나의 짐작이다.) 간신히 벌어서 죽어라 하고 아이 학원비로 쓰는 것 같다. 어찌 더는 다가갈 수 없는 선에서 우리는 그저 안타까움으로 저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정예배 때 기도를 한다. 그러게,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중2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도하다 그만두고 같이 컵라면이나 먹었다. 것도 간신히, 아이는 좋다 싫다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병에 걸려있는 것 같았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19:24).” 어쩌면 그게 나는 아닐까? 말씀 앞에 앉는다. 그러저러하게 아이를 곁에 두셨다. 혹시 나는 손을 올리기를 괴로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자 다음 말씀이 힘을 보태주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17).” 주를 보고 하는 일이다. 우리 마음에 두신 주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얘 엄마가 이상해, 상식이 없어. 격앙된 목소리로 아이엄마의 ‘어떤 점’을 아내는 안타까워했다. 듣다보면 어찌 그럴 수 있나? 싶다. 부모의 반목은 고스란히 아이의 몫이다. 신랑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아이에게 앙갚음으로 이어지고, 무질서한 엄마의 참견은 아이의 영혼을 피폐하게 한다. 유난히 영악스럽거나 수줍음이 많은 경우는 대체로 시끄러운 부모를 둔 까닭이다. 본능적으로 아이는 사랑 받기 위해 자신을 방치한다. 꾸지람과 모진 간섭도 애정이라고 갈구한다. 말끝마다 ‘엄마가요’ 하는 아이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같이 소리 내어 책을 읽히고 그 의미를 설명하게 하는 게 좋다. 같은 내용도 다르게 읽는 걸 알 수 있다. ‘문해력저하’가 ‘난독증’보다 심각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대학생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가 그렇다니 가슴이 철렁한다. 읽긴 읽는데 그 뜻을 모르는 게 난독증이라면 기껏 읽은 내용을 자기 식으로 풀이해버리는 게 문해력저하다.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소린데, 이는 요즘 정치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상대의 앞뒤 말은 이해를 못하고 자기 귀에 거슬리는 것만 트집을 잡는 꼴이다.

 

문맹률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편으로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지만 읽어내는 능력이 없고, 기껏 읽은 내용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없다는 소리다. 내가 보기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보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하고 우려하다가도 통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앓고 있는 병을 우리 아이들도 무관하지 않다는 데 그 심각성을 느낀다. 이는 영적인 문제지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러니 우린 얼마나 감사해. 딸애의 말에 크게 동의하였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어찌 할 방도가 없다. 이것은 소득 불균형의 문제도 아니고 빈부격차나 학력불균등의 이유도 아니다. 보면 있는 집 아이들은 또 그만큼 있어서 문제고, 그 부모는 있는 것을 간수하느라 약삭빠르다. 그러니 아이들은 되바라졌고 누가 뭐래도 안하무인이다. 이를 부모에게 말해준다는 건 너 죽고 나 죽자는 것과 같다. 뭐라 해도 자신의 가진 걸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자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근본적인 문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따른 성경적인 관점에서 심리학적인 접근을 해보고 싶었다. 몇 권을 앞서 접했던 폴 트루니에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행여 나의 관점이 머리로만 접근할까 하여 하나님은 가장 적당하게 아이를 맡기셨다. 꼭 그래서는 아닐 텐데, 아이와 컵라면을 먹은 게 안 좋았나? 밤새 위경련이 일어 혼났다. 하나님은 내가 머리로만 또는 몸으로만 알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직접 저 아이들과 부대끼고 씨름하면서 나의 어줍고 빙충맞은 삶으로 고심하길 바라신다.

 

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 아침에 메모해둔 말씀이 내게 들려주시는 것임을 안다. 그리할 때,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2:7).” 주가 주시는 이해와 상식이어야 한다. 왜들 저럴까? 실망할 게 아니다.


말세의 때에 그 특징은 뚜렷하였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3:1-5).”

 

어느 것도 아닌 게 없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이에 교만하고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한다. 감사를 모르고 거룩을 싫어하고 무정하다. 원통함을 풀지 않고 서로는 모함한다. 절제하면 바보가 되고, 그러니 사납다. 선한 걸 좋아하지 않고 늘 배신하고 조급하다. 자만하여 쾌락을 즐기는 걸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 믿는다는 이가 경건의 모양만 남아 그 능력은 무시한다.

 

오늘 우리 곁에서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경우를 보면 그 가정이, 환경이 모두가 저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이에 우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복되었다. 주님의 관심은 멋진 인생이 아니었다. 성공적인 삶을 행복한 날을 기대하신 게 아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눅 2:49-50).” 예수님의 생각과 그 부모의 마음도 달랐다.

 

성경은 이를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그러므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2).” 내가 저 아이들을 어찌 잘 해줘서, 저들로 행복했으면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 심리학적인 관점으로는 그게 한계였다.

 

그럼 나는, 어떻게든 아이에게 주의 사랑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 저를 주 앞에 인도한다는 건, 그럼에도 주가 너를 사랑하신다는 걸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이에 우리가 같이 우리에게 맡기신 이 한 생의 참 값진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어느 때 다가가야 하는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또 참아야 하는지… 나는 늘 그 점이 궁금해서 주 앞에 선다. 내가 조바심을 낼 때는 대체로 아직 때가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책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누가 오면 마주하면 될 일이었다.

 

보니까 하나님이 다 하신다. 느닷없이 아이를 보내시고, 우리 마음에 두게 하시고, 이에 볶여 안달을 내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었다. 도고는 자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다. 우리가 죽겠으니까 대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마치 기도 생활을 자원해서 근사하게 수행하는 것 같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체로 보면 기도 없이는 못 견디겠는 환경에 처하게 하신다. 얘 때문이 아니라 얘로 인해서 우리가 더 주의 이름을 사모하는 것이다.

 

곧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이 요즘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나는 빌빌하고 보잘것없지만 궁극의 선은 주의 뜻만이 완전하게 나타날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저 한 영혼을 내가 책임지는 게 아니라 그 책임을 나는 주께 맡기는 게 나의 책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시 79:13).”

 

그리하여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그러니 나의 무지함과 미련함과 약해빠진 상태가 얼마나 큰 복이었나? 이로써 나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게 없어 오롯이 주만 증거 되시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6-17).”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