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잠언 18:4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편 78:72
종종 유원지에서 볼 수 있는 ‘거울의 방’에 갇힌 것 같다.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바로 길을 잃는 것은 거울에 비친 수많은 자신 때문이다. 자신을 잘 안다고 여기지만 실제 자신을 아는 것은 ‘보여지는 자신’일 뿐이다. 얼굴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얼굴은 자신만 보지 못한다. 남을 볼 때 가장 먼저 얼굴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누구와 있느냐가 중요하다. 은연중에 그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나야 늘 한가로운 사람이라, 지난 주에 적어둔 메모지를 들추며 주제별로 정돈하고 있을 때 사장이 건너왔다. 커피에 넣어 먹는 시럽을 건네며, 마트에 갔다가 일부러 샀다는 말에 고맙기도 하였다. 둘째 아이 이야기를 꺼내 ‘아이의 문제’를 거론하려고 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로 두서없이 말의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저를 보며 거울의 방이 생각났다. 말을 하다보면 모든 이야기는 자기 이야기로 흘렀다. 그게 아니라, 아이가… 하며 말머리를 돌려보려 해도 잠깐 듣다 다시 또 그렇게 된다.
그게 어디 저만 그렇겠나! 우린 저마다 자기 이야기에 목말라 하고 산다. 재잘거리는 아이들로부터 시시콜콜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래서 우리에겐 ‘성령의 균형감’이 필요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렇지 않으면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26:22).” 즐겨하는 맛이 있다. 거기엔 결국 자기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언은 수시로 말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18:3).” 듣기가 말하기보다 어려운 건 그래서다. 결국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20).”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 성도의 말에 대하여 아름다운 진술을 하고 있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4).”
곧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 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고 의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사모함으로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하다. 일관된 사람은 그 동선이 한결같다. 분주하다는 것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잃는 게 더 많다. 바쁘다는 걸 자랑삼아 말하는 이는 자신도 놓치고 사는 게 많다는 걸 알면서 은폐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모두는 내 의지로 되지 않는다. 보면 늘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걸 하고 있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시편은 늘 기도할 줄기를 제시한다. 주의 지도하심을 바라야 한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25:5).”
비가 와서 몸은 눅진하였다. 어디가 아프고 힘들다는 건 고달픈 일이지만 그것으로 얻는 유익함도 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그래서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4).” 출구를 잃는 일은 자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온통 자신만 보이기 때문이다. ‘거울의 방’에 갇힌 까닭이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에 물든다. 곧 우리의 믿음은 자의적인 숭배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자신을 ‘억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지혜’로 억압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 2:18, 23).” 그러므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3:2).” 왜냐하면 땅에 속한 것은 진노가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3:5-6).”
말씀을 읽다보면 어느 것도 나를 향하지 않은 게 없다. 누가 저렇구나, 하고 바라보다 보면 그게 나였다. 저에게 비친 내 모습이었다. 누구의 이런저런 자기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은 안타까웠던 것도 실은 그게 나였다. 자기애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본래 사람의 바탕이기도 하였다. 그 땅의 흙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지 않을 때 이는 속수무책이 된다.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앎이 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바로 이 앎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내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다. 내 시간, 내 장소, 내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저를 탐색함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을 앎으로 저를 알 수는 있다. 새삼스럽게 심리학 관련 도서목록을 짜서 책 읽기를 하고 있는데 전에 가졌던 관심과는 다른 것 같다. 전에는 나를 알고 싶었고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면 이제는 더욱 하나님을 알고 싶다. 하나님을 앎으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저를 이해하려고 수고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기 위해서다.
안경사와 안과의사의 차이랄까? 물리치료사는 수술을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저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수를 살펴 사물을 바로 볼 수 있게 도울 수는 있으나 내가 저의 근시안적인 사고를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면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무얼까? 내가 저의 ‘거울의 방’에 한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저가 내 얼굴을 보면서 자신의 얼굴에 어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말이다.
그러기 위해 오늘 잠언은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 18:4).” 그저, ‘아 네에.’ 하는 정도의 말과 고개를 주억거림으로 들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해도,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마주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시 78:72).” 나는 말씀을 그리 이해하였다.
그럴 땐, 내가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게 심리학적인 관점이라면 ‘범사에 주를 인정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기르시고 지도하실 것을 믿는 게 성경적인 관점이 되겠다. 그러다보면 내가 무얼 하려던 걸 서둘지 않게 하신다. 그리고는 때가 되면 주께서 하실 것을 확신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마음에 두고 그때의 자세를 염려하는 일, 우리에게 두시는 근심이란 그런 거였다. 얼마나 우린 자신에게 속곤 하는지, 죄악 된 세상이란 거울의 방과 같았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솔직히 자기고집이 가장 큰 적이었다. 아는 데 동의하고 같이 하는 데 결의를 하지만 한사코 주님께 가는 것만은 미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내게 오라’ 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를 위하여 “온유한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온유함이란 자신의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늘 그 ‘땅의 흙으로’ 신음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신과 시간과 사람을 기업으로 받는 일이다. 이 막중한 사명을 온유함으로, 오직 주만 바라는 자세로 가능하였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 3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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