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전봉석 2017. 4. 16. 07:49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잠언 16:20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시편 76:7

 

 

 

경외함은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고, 두려워한다는 건 공경하고 어려워할 줄 아는 일이다. 삼가,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말씀에 주의하는 자’로 사는 일이 복되다. 곧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로 ‘좋은 것을 얻는다.’ 여기서 좋다는 건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가늠할 수 없어 세상의 것과 견준다. 혼자 실의에 빠지곤 하는 경우가 그래서이겠다. 자신이 견주는 것으로 말씀이 주는 좋은 것을 대신하려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주 앞에 나아간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내가 견주던 것을 놓아두고 새 생명을 취하는 것이겠다.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와 같이 말씀에 주의하는 자, 마음에 새겨 조심히 집중하고 온 맘을 기울이는 것이 경외다.

 

이와 같이 말씀을 따라 깊이 되뇌며 그 의미를 묵상하는 일은 복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에 감사한다. 모든 표현은 언어화 돼 정돈된다. 우리의 마음을 곡조에 싣거나 물감을 입혀 도화지에 입히거나 몸을 뒤채 무용으로 나타낸다 하여도 이 모두는 언어를 가져야 설명이 된다. 그저 느낌은 없다. 그래서 흔히 유행가를 따라 부르는 것도 기도다. 저들의 바람을 대중화시켜 모두의 공감을 얻어내는 게 유행가다. 이를 상업화하여 사람의 감성만 얻어내다 마는 기도다.

 

어떤 일을 이루고 꾐으로 우리 능력 밖의 것을 생각하여 빌고 또 구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더하신 성경은 그 자체가 기도덩어리다. 말씀을 음미한다는 건 참 기도를 익히는 일로 하나님과의 내밀한 관계를 맺는 일이겠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구별된다. 나는 오늘 잠언의 말씀을 그리 이해한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16:20).”

 

그리고 토요일 오후, 북적대는 거리에서 요란하게 울려대는 유행가를 들으며 이를 흥얼거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기도 하였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기도를 하는 존재들이다. 무엇을 바라고 구하는 데 있어 단지 그 감정만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 같이 공감하는 만큼 삶으로 자신을 드려 제물로 삼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얼거리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춤은 점점 농밀하여서 성적으로 어필함으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흔히 걸 그룹의 끈적거리는 몸짓이 우리 안의 ‘죄샘’을 자극한다.

 

이에 우리를 바로 붙들 수 있는 게 경외다. 주는 경외 받으실 이시다. 우리가 공경하여 바라 맞이할 이시다. 따뜻해진 날씨에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무리지어 오가는 사람들의 귀에 혹은 거리에 흔히 울려 퍼지는 노래마다 자극적이었다. 문득 저들의 기도가 저들끼리의 위로와 용서와 화해를 도모하고 있다는 데서 새삼 놀라웠다. 우리의 기도와 같을 수 없는 거였다. 유행가는 기도의 대중화다. 서로를 빌고 바란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단일하다.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 76:7).” 참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복이었구나. 토요일 오후, 아내와 천천히 걷다 생각하였다.

 

날씨만큼이나 싱숭생숭하여 아이들은 놀러 나갔고 글방 안은 고즈넉하였다. 쓸고 닦고 청소를 마치니까 다섯 시였다. 거리로 나가자 문득 드는 느낌은, 여기가 어디지? 싶은 낯설음이었다. 말 그대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 전념하지 않을 수 있으니 게 복되다. 뭐 그렇게 대단한 게 있어서 다들 저처럼 연연해하며 사는 게 아니었다. 실은 대단함이 없어서 늘 가볍다. 쓸려 다니는 안개처럼 유행에 휩쓸리다 금세 시들해진다.

 

거듭남이란 전혀 새로워진 생을 말한다. 이는 내 안에서 생겨난 게 아니라 내 밖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 활동은 뚜렷하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9).” 더는 옛 생활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이게 두려워서 우리는 종종 양 발을 하나씩 따로 걸치고 사는지도 모른다. 답이 없는 아이의 이름을 대표기도로 적어두었다. 누구누구가 올 것이라 여겨 주일 날 식사 준비를 넉넉하게 하였다.

 

우리는 늘 기대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오고 안 오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내게 두시는 일을 준행하는 게 충성이었다. 사장이 건너와 차를 한 잔 마시고 갔다. 월세가 밀려 마음이 무거웠다. 한 정거장 앞쪽에 또 다른 건물을 분양받아 소사무실로 꾸미고 임대를 할 계획이라고 말해주었다. 저의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다. 그러기 위해 ‘골프친구’의 여윳돈을 끌어오기로 했고, 빠르면 내달에 시작할 거 같다고 하였다. 나는 둘째 아이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럴 기회가 없었다.

 

뭐랄까,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그러고 살아! 한다지만 그러지 않은 삶도 있었다. 그 수가 미미하다 해도 나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것을 감사하였다. 여유가 있다는 건 틀림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참으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출마하여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려 하는 이들이 표본이다. 어찌 저의 입에서 서민 정책을 운운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저마다 가늠좌가 다르다. 겨누고 있는 방향은 같아 보이지만 조준하려는 게 다른 것이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로 사는 일이 왜 좋은지 알겠다. 우리가 얻을 ‘좋은 것’은 따로 있었다. 곧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로 사는 게 ‘복이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자신을 달음박질 하는 운동선수로 비유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무릇 삼가, 말씀을 의지하며 산다는 일은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는,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 25:13).” 고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느냐 하는 게 중요하였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로 사는 게 복이었다. 거듭남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의 통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사람의 통치를 받고, 돈에 통치를 받고, 자기 욕망에 통치를 받고, 그저 막연하여서 우연에 통치를 받는 일은 고달프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에 시달린다. 내가 저에게 건네는 첫 인사는 ‘바쁘시죠?’이다. 그럼 저는 자신이 바쁜 걸 마땅하다고 여겨 이를 과장한다. ‘돈도 안 되는데, 죽겠습니다.’ 그러니 죽겠는 삶을 사는 거기와 살겠는 삶을 사는 여기가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이어지는 저의 새로운 사업구상에 나는 그저 ‘아, 네에.’ 하는 안쓰러움만 토로하였다. 어떤 동의를 구하거나 이해를 바라는 대화가 아니었다. 굳이 할 말이 없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 주가 아니시면 한눈팔고 있는 삶에 대하여 누가 무슨 수로 설득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을까? 아내는 중학교 아이들 시험공부를 시키며 있었던 일을 재잘거렸고, 나는 특별한 생각 없이 눈부신 거리를 걸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을 누가 믿겠나! 이 숱한 우연과 우연이 실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필연들로 여기에 있다는 걸 누가 믿겠나.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2).”

 

주님의 모습이 오늘 우리 성도의 모습이지 않나.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3).” 그럼에도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 우리의 외면과 능멸과 조소를 참고 견디시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은혜였다. 주가 당하신 찔림과 상함과 채찍에 맞음으로 값 주고 산 평화이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6).” 부활주일 아침, 나의 평온함에 대하여 감사한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부디 우리가 함께 모여 주 앞에 찬송이 되길 기도한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곧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날이다. 때론 당혹스럽고 불안에 떨지만,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 28:10).” 주가 내게 두신 사역이었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 가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우리의 참 두려움은 경외를 잃는 일이다. 이에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 76:7).”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