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전봉석 2017. 4. 22. 07:38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6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시편 82:3-4

 

 

 

도대체 이런 소릴 얘한테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자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란다. 하나님 앞에 도와주세요, 하지 않은 이상 끊임없이 되풀이될 뿐이야! 하고 말하자 아이는 싱겁다는 듯 더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니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을 하면서도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는 관용의 문제였다. 그런 소리가 아니면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지 않은가!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

 

다음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알 일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이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저 애가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말하게 하신 이가 또한 들려진 말씀으로 인해 쟤 안에서, 그 환경 가운데서 일하실 것이다.

 

아이가 퇴원을 했다. 어떤가 묻고, 나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반짝 좋아진 것 같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걸 알렸다. 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이것이 영적전쟁인 것을,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냥 그렇게 오냐오냐 하듯 들어주고 ‘다 잘 될 거야’ 하는 식으로 헛된 말을 할 개제가 아니었다. 두 번째 격리 시설에 수용되어 입원치료까지 했다면 본인도 그 심각성을 인식해야 한다. 자기 의지로는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내가 말로써 혹은 마음으로나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말을 하면서 보다 진득함과 인내가 필요한 것은 ‘그런 말’에는 별로 반응을 하지 않는 거였다. 그러니 어쩌나? 이제 내가 줄 것이 없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통화가 끝나고 다시 또 설교원고에 집중하려는데 도무지 마음이 어려웠다. 가만히 빈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때 여자아이가 전화를 주었다. 중간고사를 다 끝내고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나. 주말이면 아이는 사귀는 애 자취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주일에 오라 한들, 주를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들, 그 애 품에 있는 게 더 큰 위로가 되고 보다 직접적인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성령의 강권하심이 아니고는 도대체 상대가 안 되는 일이다. 알긴 알겠는데,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노아의 때 그 암울했던 시기는 노아와 그의 가족뿐이었다. 다들 멀쩡히 잘만 사는데 왜 저리 궁상을 떨고 사서 고생을 할까? 광신적인, 너무 푹 빠진, 저마다 그런 저를 외면하고 다만 여전하였을 시절을 풍미하였다. 말을 해봐야 그 말이 먹힐 리 없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구나.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우리는 다만 자처하여 한심하고 처량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두려워할 걸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설교원고를 마치고 주보까지 만들어 놓자 한 주가 다 끝났다. 오후께 초등학교 아이들이 수업을 왔다. 글을 한 편 쓰게 하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아이엄마가 닭을 시켜주어, 아이들은 게걸스러웠고 돌아간 뒤 벌창이 된 것을 쓸고 닦고 물걸레질까지 하면서 그 의미를 되물었다. 대체 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애들’을 뭐하자고 지금 나는 이러고 있는 것일까? 쇠귀에 경 읽기 같기만 한데. 어떤 의미를 묻다 지쳐 그만두었다. 뭔가 뚜렷한, 그래서 가시적인, 어떤, 뭔가를 자꾸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투덜거리고 있던 내게 오늘 말씀은 새삼스럽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내가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 가르침이, 그 말이 아이의 영혼을 다스리실 것이다. 듣지도 않고 아무 소용도 없는 일 같지만, ‘노아처럼’ 미련곰탱이 같이 그 화창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태평하고 화사하기만 한 날들에서 방주를 짓는 일은, 주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하여 이것을 오늘 특별히 네게 알게 하였노니 내가 모략과 지식의 아름다운 것을 너를 위해 기록하여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19-21).” 우선은 나로 하여금 주만 더욱 의뢰하게 하려 ‘이것을’, 내 안의 갈등과 환멸과 짙은 의심까지도 놓아두신다. 그러므로 매순간은 ‘오늘 특별히’다. 아이와의 통화, 그로 인한 나의 내적갈등, 어린아이들의 돼먹잖은 태도, 그로 인한 나의 신경질적인 반응, 막연함, 심지어는 우울감까지.

 

주께서 날 위해 기록하시는 하루였다. 나로 하여금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려고. 저들을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오늘 말씀은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오신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저들은 바른 분별력이 없는 영적인 고갈 상태이고, 우리의 영혼은 아버지를 잃은 고아들이 아닌가? 이를 판단하여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하나님이 하셨을 법한 실천을 하는 것으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시 82:3-4).”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이다. 나의 일에 있어 의미 없음에 대하여 내가 운운할 일이 아니었다. 그 의미는 의미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에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를 짓는 일만큼이나 덧없는 게 또 있을까? 저의 삶이 성도의 삶이었구나. 묵묵히 주의 말씀에 준행하는 것. 의미가 있고 없고는 저 먼 데서 끌어오는 가설이 아니었다. ‘~을 하면, ~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는 따위의 추정이 아니다. 확신이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두시는 말씀이다. 그대로 미치자.

 

미치기 위해 미쳐야 하는 일이고 미쳐서야 도달할 수 있는 미침이었다. 그 거리는 나의 수긍을 강요하지 않았다. 싹수가 없다느니, 쇠귀에 경 읽기라느니, 대놓고 의미 없는 일이라느니 하는 모든 갈등은 또 다른 이의 꾐이었다. 정녕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그렇지 않다.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안의 논리와 바람과 추정은 남들의 시선보다 끈질기다. 그러니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 아니고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신경질적으로 걸레를 빨아서 화풀이 하듯 바닥을 박박 문질러 닦고 난 뒤에야 알았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시 82:5).” 그러니 우리의 사명은 기도였구나. 저 애를 위해, 그 안 믿는 부모를 위해, 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담판을 짓듯 아뢰고 또 구하는 게 일이었다. 의인 십 명만 있어도…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32).”

 

고독한 경주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리는 두려움의 자리였다. 이를 아는 이가 주께 고한다. 아뢰고 또 바라는 것이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민 12:13).” 저들이 알지 못함을 우리가 통회하는 게 사역이었다. 청소를 하는 동안 입을 삐쭉거리던 것이 소파에 누워 허리를 비틀다말고 깨달았다.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잠 22:17-18).”

 

이를 나로 하여금 알게 하시려고, 오늘 특별히 이 모든 상황과 여건을 조성하시는 이시었다. 저가 저 애들을 사랑하신다. 그 가정을, 장래를 구원하시기 위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러니 이런저런 일로 속은 볶이고 마음은 들썩이는데, 이로써 하나님과 나는 화평하였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그렇구나. 그래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내 안의 소망을 더욱 공고히 하시려는 거였다. 이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그건 나 역시 다를 바 없어서 내가 염치없을 때, 죽어 마땅하던 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죽으시었던 그 사랑이다.

 

나로 하여금 늘 하나님만 생각하게 하시려고, 나를 경험하신 주가 나의 격려가 되어주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내가 주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저 아이에 대한 기도를 들고서다. 그 가정을 위해 애통해하는 마음으로였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2).” 왜냐하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13:3).”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6: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