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잠언 21:4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
시편 81:6-7
아이가 일찍 왔다. ‘믿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걸 잘 안다. 입을 열어 기도를 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미 없는 거부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솔직하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액면 그대로의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드러내는 게 솔직한 게 아니라, 이를 두고 거짓과 숨김을 없애는 일이다. 거짓은 진실 가운데 잘 숨고, 숨김은 드러냄 가운데서 위장한다. 자신이 솔직하다고 해서 그것을 마음대로 표출하는 게 솔직한 게 아니다. 그럼 세상은 무질서할 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의 막힌 담을 생각하였다. 아이는 모르지만 성령이 저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멀리 걸어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러는 동안 ‘철학도’다운 말에 말이 이어졌다. 한편으론 피곤하고 한편으론 흐뭇하였다. 덧없는 말들이 판을 치고 한없는 가벼움이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이 시대에 진지함이란 값진 자신이었다. 이것으로 본인은 주를 거부하는 데 섰는 줄 알지만 그 마음에 주를 더욱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감추어져 있다는 걸 잘 안다. 저 아이의 열심이 아니라 성령의 열심을 말이다.
그러므로 오후 4시가 다 될 때까지 이어지는 논쟁을 나는 즐겼다. 은연중에 하나님을, 그 사랑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말해줄 수 있었다. 아이가 돌아가고 이어서 중2 아이와 수업을 했고 탁구도 쳤다. 이번 주일에는, 와라. 11시죠? 하는 아이의 반응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런 반응조차 귀하였다. 의도적으로 ‘성경적인 기독교 상담 방법론’을 찾아 읽고 있어서 그런가, 아이들과 그렇게 어울리고 말하고, 듣고 답하는 일이 ‘영혼을 상대하는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이 장성한다는 건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음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른 아침, 아이가 오기 전에 읽었던 히브리서의 말씀이 나에게는 확신이 되었다. 쓸데없는 논쟁으로 소모적인 시간 같지만 그렇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돕는 은혜’을 신뢰할 수 있었다. 말에 바른 지도를 기도하며 아이의 말을 받았다. 곧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6:5).” 떠도는 이들이 많았다.
영화 <다인>과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과 폴 트루니에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권하였다. 같이 읽고, 보고, 느낀 것을 말해보고 싶었다. 오두막은 최근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소 신비적인 서술로 그려놓아 위험요소가 없진 않지만 충분히 검토하고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이에 우리의 자세를 오늘 잠언은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것 같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아이의 기도에 대한 자기 견해가 눈이 높은 까닭일 수 있겠다. 믿어지지 않는 대상을 향해 기도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아이의 물음이 당돌하여서 아찔하였다. 나는 기도의 의미를 새삼 다루어볼 수 있었다. 우린 누구나 무의식적으로도 기도를 하고 산다. 흔히 읊조리는 유행가들도 엄밀하게는 기도를 다룬다. 열심히 했으니까 좋은 성적이 있을 거야! 행운이 따를 거야! 잘 될 거야! 하는 이 모두의 마음은 기도다. 노력한 만큼만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 그 날의 컨디션부터 날씨, 주위 여건, 상황들이 도와야 한다.
우리가 더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의 것은 기도다. 그러므로 기도는 의식하고든 무의식적으로든 드려진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 말이다. 이때 우리가 의식하고 그 대상을 분명히 하는 게 지각이다. 기도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아뢰는 일이다.
아이의 거부감은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알고 그 납득함으로 믿고 싶은 것이다. 이를 교만이라 다그쳐 물을 수 없었다. 다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그 수고와 애씀이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 (셀라)(시 81:6-7).”
이를 어찌 알려줄 수 있을까? ‘므리바 물 가’는 단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한 곳이다(출 17:1-7).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2).” 아이의 그러한 마음이 실은 우리 모두의 사사로움 안에서 드러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수시로 드나드는 의심과 초조함이 그것이다. 이것으로 자기 기준과 판단을 유발한다. 그리하여 믿어지지 않는 부분을 대신해서 열심을 다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하나님 자리에 대신 두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보다 자기 수고를 의뢰하는 게 더 쉽다. 안 보이는 진리보다 확신에 찬 자기의 솔직함이 더 신뢰가 간다. “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시 106:32).” 왜 하나님이 역경을 주시는지 간단해진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신 32:51).”
아이의 고집스러운 주장에서 나의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나름의 신념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눈이 높은 건 죄다. 자신이 뭔가 대단한 줄 아는, 그 담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말씀의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수고와 애씀이 또 얼마나 고달픈지 모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단순명료한 부르심을 도무지 듣지 못하는 까닭은 담이 너무 높아서다. 눈이 높은 것이다.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우리를 부르신다. 아이의 증상은 ‘글루텐 불내증’으로 나타난다. 쉽게 말해 밀가루에 대한 체내의 분해요소가 약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다소 희귀한 증상이라 할 수 있는데, 찾아보니 또 생각보다 흔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서 감정 기복이 심하고, 속이 늘 더부룩하며, 부종이 생기기도 하고, 닭살이 돋거나 피로감이 잦고, 편두통이 생기고 살이 빠진다. 근육통이 있을 수도 있다. 아이는 한사코 우리 몸의 일로 치부하였으나 나는 정신적인 문제를 언급하며 신경정신과적인 요인으로 보았다. 이를 볼 때 누구나 한두 가지씩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앓고 산다. 나는 이제 이와 같은 고통으로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알 수 있다는, 지름길로 여긴다. 문제가 없다는 주장보다 문제를 직면하는 쪽이 유리하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나의 기도가 막연하게 흘러가게 두는 것보다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나의 의지적인 기도가 드려지는 게 복되다.
부정하고 부인함으로 그 모호함은 숱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설왕설래하는 까닭도 그래서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이 많아지는 건 다 이유가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자는 긴 말이 필요 없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날마다 죽노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바울의 이와 같은 증언의 출처를 알겠다. 내가 살았으므로 나는 죽는다. ‘어느 날 나는 죽었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그러므로 요란하지 않다. 거창하지 않으며 뭐 그리 부산스러울 것도 없다. 되레 밍밍하여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하다. 일상으로 스며드는 말씀은 삶의 언어로 쓰여진다.
너는, 그게 죄다. 아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는 죄라는 말에 진저리쳤다. 나는 죄인이다, 하는 말에 과민한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를 직면하기 싫을 때 한사코 도리질을 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명목상 죄를 운운하는 게 아니라 수시로, 너무 막무가내로 드나드는 죄 때문에 통회하는 자들은 평안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를 자복함으로 주 앞에 선다. 주로 죽고 주로 산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 6:3).” 그리하여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 죄가 드러날 때 은혜도 크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말씀에서 말씀으로 이어지는 삶은 복되다.
가장 피곤한 목요일이 되었지만 가장 기다려지는 목요일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위로가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자신의 죄를 직면할 수 있다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간다. 해결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시 8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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