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전봉석 2017. 4. 24. 07:42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잠언 24:5-6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시편 84:9

 

 

 

마음 같지 않다. 늘 보면 내 마음에 내가 걸린다. 마음도 짐스러워 무겁기만 한 것을. 잠을 잘못자서 그런지 목덜미를 중심으로 등짝이 아파 고생이다. 가슴도 결려 숨이 가빴다. 몸이란 마음보다 짐스러워서, 자꾸 울고 싶었다. 날씨는 흐드러지게 좋았다. 아이들로 일희일비하지 않기를 날마다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게 마음은 또 저 혼자 들쑤셔대며 요동을 쳤다.

 

전략이 필요하다. 오늘 말씀은 내가 모르는, 나의 강함을 인식시킨다.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그럴 수 있는 게 말씀을 붙들기 때문이다. 가끔은 무모할 정도로 말씀만 붙들 뿐이다. 그리고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일찍이 예수님도 일러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전략을 주셨다.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지략은 말씀에 있고, 하여 어떤 일에서 명석함은 이를 파악하여 해결할 능력을 주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시 84:9).” 말씀은 말씀으로 이끌어 나를 다독이신다. 나 어디 가리까!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139:7).” 마음은 무거워 혼자 꾸물거리다가도 그럼 그럴수록 주를 더욱 바라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겠거니, 왔으면 하고 빌다 제풀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넘어지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넘어졌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있다. 내가 우울해하는 걸 아내는 알고, 함께 먼 길을 돌아 산책을 하였다. 전날에 딸애는 울면서 퇴근을 하였다. 너무 멀어 고생스러운데, 다들 나이든 사람들만 있어 저마다 어른행세를 하니, 이래저래 것도 훈련이려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나는 이제 이 말씀을 사랑한다. 나의 날이 남루하고 비천하다 해도 주를 바라며 의지할 수 있어 가치 있다. 곧 “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저가 계심으로 나는 안전하다.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11).”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12).”

 

한심하고 처량하다가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와 같은 역할을 허락하신 이에게 감사한다. 비록 내 안엔 늘 불안과 초조와 갈등과 성급함과 조바심이 들끓지만 이젠 그것으로 더욱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하여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잠 24:11).”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저의 이름을 적고 당면한 저들의 삶을 주께 아뢰는 것이다.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다.

 

몸은 천 근이고 마음은 만 근인데,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2).” 시편의 말씀을 당겨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6:1).” 내가 이제 어디로 가나?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38:21).”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57:7).”

 

목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몸이 어렵다. 눕지도 못하고 앉기도 어려워서 나는 쩔쩔맨다. 아이들로 마음이 시무룩하였다가 몸의 통증으로 금세 마음의 일을 잊었다. 그런 것이다. 곧 신앙은 실제여서, 막연한 느낌이나 공연한 바람이 아니다. 실전을 뛰는 용사처럼 언제 지뢰를 밟고 멈춰야 할지 모른다. 한껏 고상을 떨다가도 사사로운 몸의 고통으로 모든 마음이 평정된다. 죽겠으니까 곡소리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71:12).”

 

하긴 막연한 불안보다 구체적인 통증이 어렵다. 아픈 몸은 사치스러운 나의 감상을 일깨운다. 주 앞에 고할 수 있는 가장 절박한 언어는 고통에 따른 호소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나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신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시 84:8).”

 

가만히 주 앞에 서는 일, 몸은 이를 알고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