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잠언 23:26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시편 83:18
갈 바를 알지 못 할 땐 앞선 자의 발걸음을 따르는 게 좋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나에게 믿음의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나의 걸음이 온전하여야 하는 까닭은 은연중에 나의 걸음도 누군가의 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규칙적인 생활이 유익하다. 할 일이 없어도 또는 할 게 많아도, 하던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금세 시들해졌다. 연락을 할까 하다 그냥 두었다. 애나 어른이나 꾸준할 수 있다는 건 타고난 복이다. 오든 안 오든 나는 이제 기다리는 사람이라, 그게 어디 얘들뿐인가. 덕분에 한가한 오후였다. 폴 트루니에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원론적인 질문의 책을 읽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아침에 읽은 말씀을 눈에 잘 띄는 데 메모해두었다. 하긴 내가 누구를 이해한다는 건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하는 게 아니었다. 흔히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해보다 전인적인 관계는 없는 것 같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의 연약함에 휩싸이신 게 아닐까?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2).” 아이는 통화할 때마다, 선생님도 못하잖아요! 항변하듯 말한다. 그것을 밑천으로 자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덴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데 연약과는 무관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자기도 연약에 휩싸이셨다!
소리 내어 본문을 읽다 한참을 머물며, 이해당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주가 나를 이해하신다. 우리를 이해하실 수 있는 건 막연한 동조가 아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삼위일체 하나님은 친히 우리를 이해하신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 성부 하나님이 친히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친히 나를 위해 증언하시고,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성자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머리가 되어 으뜸을 보이신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이와 같이 내가 누구를 이해한다는 건, ‘친히’ 나에게 더하신 앞선 자의 걸음에서였다. 그러므로 이해는 노력하고 참고, 견딤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의 느낌을 보고, 직접 말하게 하여 듣고, 그를 둘러싼 사람과 환경과 여건의 조화를 느껴야 한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진실하려고 몸부림치는 결과가 이해다.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는다’보다 ‘당한다’는 표현이 더 명확할 것 같다. 이해를 받는 입장보다 하는 입장의 수고가 더 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얼마나 삿된가! 바르지 못하고 나쁜 행동이 덕지덕지하다. 자존심도 강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조금 그러저러하면 금세 마음이 상한다. 내가 나서서 누굴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해하게 하신다. 나는 이런 마음을 불가항력적이라 이해한다. 성도에게 두시는 공통된 마음이다. 그래서 누구는 거리로 나와 전도지를 돌리고 먼저 다가가 예수를 전한다. 저는 심판과 구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제 코가 석 자면서도 남을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당한 자의 이해다.
히브리서를 읽다 ‘주님의 이해’를 알 것 같았다. 그러하시기까지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3).” 그러하는 게 우리의 사명인 것이다. 내 안에 기억을 두시는 이가 생각하게 하시고 생각하게 하신 이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게도 하신다. ‘그런 거였구나!’ 어떤 깨달음 같은 아니 새삼 놀라운 듯 나는 나도 모르는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님이셨다.
주님이 두시는 마음이어서 나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자꾸 신경이 쓰이고, 되뇐 기억은 그리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는 거였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골 2:2).” 이에,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전심으로, 온 맘 다해… 이해한다는 건 전인적인 관계다. 저의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게 나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산다. 오늘 잠언의 말씀을 그리 읽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내 마음을 주는 게 이해다. 그리하여 내 눈으로 너를 즐거워한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였다. 이를 이해할 때, 주의 마음으로 저들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못한다. 나는 내가 봐도 삿되어 끌탕이 끊이지 않는다. 주가 내 마음을 연단하시는 것이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17:3).”
그렇게 당부해도 연락조차 주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속을 끓이다가도 그게 어디 애만 그런가? 사람이란 본디 좋을 때나 좋은 것이어서 일관되다, 한결같다, 꾸준하다는 건 모두 불가사의한 일이다. 무질서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이가 충만한 것으로, 다스리고 정복하라. 명령이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아이고, 토요일엔 좀 쉬시지… 하는 청소부 아주머니의 인사가 괜한 용기를 더해주기도 하였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게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는 걸 나는 이제 잘 안다. 뭘 하지? 하고 고심하느라 헛된 걸 좇기 일쑤다. 다만 어제 하던 걸 하면 복되다. 그래서 습관이란 무서운 일이다. 스페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습관은 거미줄 한 가닥처럼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밧줄이 된다.’
오늘 하루, 지금 이 시간, 내가 성경 한 줄 보는 게 무슨 대순가? 저를 위해서 기도 한 번 하는 게 무슨 능사라고!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는 모든 낯섦은 어느새 습관이 되고 습관은 쌓여 인격이 되며 인격은 후에 운명이 된다. 예수님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행위로써 주를 바랐다(단 6:10).
질서가 무시되고 원칙이 사사로이 여겨지는 덴 다 죄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 주가 주되심을 알게 해야 한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 이를 위한 날갯짓 하나가 나의 동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억지로 꾸며 그리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찍 일어나 말씀을 당기고 주 앞에 앉은 일에서 일이 있건 없건, 토요일이건 노는 날이건, 늘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귀하다. 다만 이와 같은 평안을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이를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이 없다. ‘아픈 아이’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악용한다. 슬픈 아이는 자신이 슬픈 걸 즐기고, 괴로운 아이는 자신이 괴롭다는 걸 교묘히 자랑한다. 그래서 더욱 무질서를 사랑하는 것이다. 병적이라 하면 그 병의 근원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면서도 그런다는 것이다. 싫은 것이다. 자신을 주관하는 게 자신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에 “미련한 자의 귀에 말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네 지혜로운 말을 업신여길 것임이니라(잠 23:9).” 별 수 없는 노릇이다.
모순된 게 오래 지속되면서 자연스러운 걸 억제하려 든다. 에덴에서 쫓겨난 뒤 사람은 일부러 더 질서를 바라지 않는 성향이 되었다. 무질서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늘어져도 되는, 게으름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 한 마디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아이 땐 현실과 허구가 분별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어디 아이 때만 그런가 말이다. 보면 어른이 더한다. 교묘하게 이를 정당화시켜 아이를 윽박지르고 자신은 놓아둔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선생님도 그러잖아요! 아이의 볼멘소리에 나는 주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나도 어김없이 그러하다. 그러하여서 몸부림칠 수 있는, 삿되고 공연히 자존심만 센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더는 주 없이 살 수가 없다. 주가 아니시면 감당이 안 된다. 주밖에 다른 수가 없다. 날마다 매순간 ‘주님 도와주세요’를 마음에 달고 산다. 그래서 널 이해할 수 있는 거야! 하고 말해주다 울컥하였다. 내가 그처럼 뻗대고 막무가내였는데 그런 나를, 주께서 이해하셨다. 삼위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실 못하실 분이 아니시다.
성실과 근면은 하나님의 질서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온전함이란 주가 알아주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온전한 자의 날을 아시나니 그들의 기업은 영원하리로다(시 37:18).” 그러므로 “그들은 환난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할 것이나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19-20).”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광이 우리 땅에 머무르리이다 (0) | 2017.04.25 |
---|---|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0) | 2017.04.24 |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0) | 2017.04.22 |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0) | 2017.04.21 |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0) | 2017.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