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전봉석 2017. 4. 26. 07:28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잠언 26: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시편 86:11

 

 

 

관심의 정도가 아니라 그 향방의 문제였다. ‘무엇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과제였다.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사람으로 사는 동안 나는 여느 사람과 다른 것처럼 구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이었다. 나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나의 판단과 기준이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규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 야고보서를 소리 내어 읽는 동안 여러 생각이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결국 우리가 다른 점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1:3).” 그러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 이는 소망이다. 그리하여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딸애 친구가 결혼을 하는 모양이다. 상견례를 하고 상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직업이 뭐고, 연봉이 얼마고, 집안은 어떻고, 하는 이야기들 앞에 공연히 부럽기도 하고 기가 죽은 건 사실이다. 그렇겠네, 하고 설거지를 하며 아내의 말을 거드는데 아내가 불쑥 말했다. 그럼 안 되지! 우린 저들과 다른데. 엄연히 가지고 있는 기준이 서로 다른 거 아냐? 아내의 퉁명스런 결말이 뜻밖이었다.

 

옆 사무실 사장이 건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요는 다른 곳으로 사무실을 옮겨야겠다는 둥 지금 벌이고 있는 다단계사업을 본격적으로 해볼 계획인 것 같았다. 그러려니 강의실도 필요할 것 같고, 사람들의 왕래가 좀 더 용이한 곳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저의 생각이 너무 확고하여서 내가 뭐라 말을 거들 게 없었다. 북에서 내려와 자본주의의 맛을 본 것이다.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도 하는 사회입니다. 하는 저의 말에 그냥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새로운 상호가 걸리고, 주인이 바뀌고, 사람들은 쓸려 다니듯이 부산하게 산다. 우린 저들과 다르다는 아내의 단호한 태도가 새삼 크게 들렸던 건 그래서이다. 똑같이 돈돈거리며 살고 아웅다웅 사느라 진이 빠져 지칠 대로 지치곤 하지만, 우리는 저들과 같지 않다. 관심의 정도가 아니라 향방의 문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이루는 삶이 우리의 사명이다. 날마다 더욱 새로워지는 것으로 우리의 자아는 독립된 자아가 아니라 새로운 자아다.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는 삶의 의지다. 나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의지로 바뀌는 것이다. 해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한 눈에 보이는 전망이다. 주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우리가 저들과 다른 점은 별개의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다. 초연하게 돈 없이도, 물질의 저항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5-7).”

 

묵묵히 나는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다만 속으로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죽기 살기로 탈북을 하여 남한까지 와서 더욱 죽기 살기로 살아야만 하는 저의 고달픈 여정이 안타까웠다. 마치 탈북 때 조건처럼 교회를 잠깐 다닌 것으로 저는 더 이상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너는 다른 사람이니까’ 하는 태도로 나를 대하였다. 은연중에,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벌써 나를 ‘다른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얼마나 ‘같은 짓’을 반복하며 사는지 모른다. 더 나은 한 방을 노리면서 자신의 미련함에 대하여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느라 자신의 정당성을 위해 남을 헐뜯고 저를 탓하는 것으로 자기를 부추기는 것이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늘 직접적이다. 맞다, 내가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절로 인다. 마치 난 아닌 것처럼 굴 수가 없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우리의 씨름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보는 것과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충돌한다. 부러워하다 미끄러지기도 한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그러니 내 안에 이는 갈등과 다투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럼에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저들에게 있어 ‘다른 사람’으로 비쳐져야 한다. 우리가 그리 경계하는 게 아니라 저들이 먼저 아는 기준이다.

 

그리하여 다윗의 기도를 따라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하여금 진리로 행하게 하시고 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일심으로, 우리의 한결같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바라기 때문이다.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누구를 부러워하다 부러움에 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에 어떤 서러움이 아니라 의연함이 생겨난다. 주만 바란다는 건 내가 어찌 취할 수 있는 행동의 것이 아니었다. 흉내도 낼 수 없는, 그러나 이미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시 86:12-13).”

 

아래층 아이엄마가 퇴원을 하고 술에 취해 찾아왔다. 여전하여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헛것이 보인다고 하고 그래서 술을 먹는다고 하면서, 뭐라 이르는 말씀에 대하여는 귀를 닫는 것이다. 참 듣지 않는다. 신기할 정도로 귀를 닫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저에겐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푸념을 하고 두려움을 호소하면서도 도로 그 타령이다. 퇴원을 하고, 아이는 또 어찌 지낼까? 정신을 못 차리는 게 어디 저만의 탓이겠나! 저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저러는 것을.

 

한 아이엄마는 다른 데 보내는 학원이 많아서, 돈이 없어서 그만 보내야겠다고 했단다. 아내는 그 속보이는 빤한 짓을 알면서도 그냥 보내시라, 했단다. 애 때문이지 뭐! 아내의 대답은 간결하였다. 나는 솔직히 화가 났다.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그 속셈이 빤한데… 호의를 권리로 아는 인간들이 참 싫다. 부글부글 속이 끓고, 꼴도 보기 싫어서 욕이나 퍼붓고 싶은데, 누구에게 부르짖을 것인가?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시 86:3).”

 

시쳇말로 호구 잡힌 꼴이다. 그러니 어쩐다? 화딱지가 나지만, 아내는 이를 명료하게 정리하였다. 애가 좋다잖아! 싫어서 안 오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 부모는 여력이 없다는 소리고, 그러니 그냥 보내시라 할밖에. 결제는 하나님께.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그러니까 말이다. 목회는 아내가 다 하는구나, 생각하였다.

 

다들 참, 개가 그 토한 걸 도로 먹고 사는 꼴인데 거듭 행하는 저들이나 거듭 마음 상해하는 나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니 내가 무엇으로 기쁨을 얻을까?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시 86:4).” 당장 내 코가 석 자고 지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인데, 이는 도량도 아량도 아니라 주께서 그리 바라시는 것이어서 주를 보고 산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1).”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