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잠언 28:26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시편 88:8
사무치는 그리움이 있다. 못내 서러움이 되는 기억도 있다. 아무 연고도 없이 떠도는 마음도 있다. 저 혼자 휘청거리는 생각도 있는 것이다. 기껏 아이와 성경공부를 마치고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을 때, 출처도 없는 쓸쓸함에 몸서리쳐야 했다. 중학교 아이들이 시험이라 이번 주간은 글방에 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고른 말틴 밥간의 <영혼치료상담>은 굳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유익하였다.
남겨진 시간, 오늘 시편의 고백처럼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18).” 예전에 의지하였던 나의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셨다. 불쑥 외로움은 불청객처럼 밀고 들어와 마치 나를 다 아는 것처럼 내 마음을 휘젓고 있었다. 봄날 오후의 햇살은 부서지고 바람은 심통스러웠다. 창문을 열자 한껏 기다렸던 소음이 몰려들었다. 어디 동떨어진 세상에 놓인 것 같았다.
외로움이란 가끔 당황스러운 것이어서 이처럼 열띤(?) 성경공부 후에 또는 주일예배 후에 밀려든다.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쓸쓸함에 대하여는 어찌 짐작 가는 게 없어 속수무책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은. 메모지를 펼치자 아침에 적어둔 성경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이게 맞나? 싶어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싶은.
동생과의 통화 때문이었을까? 어떻게 무슨 일을 새로 하게 되었다는 것, 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이고, 무얼 하는 것인지, 설명을 길게 하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는, 목사잖아! 이야기 중간에 틈을 봐서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해라 마라 할 수 없어 서러웠다. 나는 딸애에게 억지를 부리듯 엄포를 놓았었다. 곧 5월 중에 사귀는 아이와 같이 오겠다고 해서였다. 목회만 할 거면 생각해볼게. 사역만 할 거면 데려와. 지금처럼 다른 데 기웃거릴 거면 됐다. 난 걔한테 그것만 볼 거다.
그래, 조심히 다녀라. 내가 동생에게 해준 말이라고는 고작 그게 다였다. 통화를 끓고 난 뒤, 나는 어떤 서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다 그만두고 싶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알다가도 모르겠는 감정이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베드로의 당부가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다.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하나 이런저런 여건과 생활에 밀려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우리의 목젖을 쥐고 묻는 것 같다. 이래도 계속 할래?
행여 롯의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겠구나. 베드로 사도가 저를 의인이라 표현하니까 저가 의인인가보다 하지, 아브라함의 조카라는 것 말고는 뭐 뚜렷한 게 있나?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7-8).” 응당 부르심에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을 때, 믿는 자의 민망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카드결제일이라 아내는 똥줄이 탔다. 여기저기서 박박 긁어 간신히 해결을 한 모양이다. 더 열심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교육비들을 안 낸다. 아내의 호의는 저들에게 권리가 되었다. 이번 주간에 모 기관에서 공모하는 포스터를 그려주느라 며칠 밤을 샜다. 돌아서면 아들애 등록금과 생활비를 걱정한다. 이래도 계속 할래? 내 안에서 검은 목소리가 음흉하게 물었다. 왜 하나님은 더 야박하게 구시는 걸까? 어떤 서러움이 또 화가 마음을 어렵게 했다. 등짝이 아파 고개를 가누기도 힘들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러저러하게 롯의 심정도 그랬겠지. 결국 그래서 아브라함과 갈라서기로 한 것일까? 좀 더 나은 땅을 찾아서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까지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겠다. 어찌 생활에 쫓겨 살다보니, 정신 차리니까 ‘불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 가운데 놓여 있던 것이었겠지! 저도 그 지경까지 될 줄 알았나? 나는 딸애에게 말했다. 하나님으로 죽을 각오면 오라해라. 이것저것 운운하느라 정신 팔려 있을 거면 오지마라.
그들의 특징은,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10).” 당돌하다. 저 멀리 초원이 보이는 쪽으로 옮겨가자고 하는 롯의 선택을 누가 말릴 수 있었을까? 자긍하는 것이다. 괜찮아, 난 목사잖아. 우리 가족이 다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떨지 않는다. 오히려 말씀으로 다가가면 비방한다. 너만 잘났냐? 너나 잘해라!
내 안에 이는 말들이 너무 거칠다. 다그쳐 묻기를, 이 길이 맞기는 한 거야? 제대로 가고 있는 거냐고! 그럼 나는 잠시 정신을 잃고 불안해한다. 맞나? 잠깐만. 맞을 거야. 여기 말씀에도 그렇게 나왔잖아.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그러자 검은 목소리는 언성을 높인다. 근데 왜 너만 그러냐! 그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염치도 없게! 나는 창밖을 내다보다 주의 이름을 불렀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아, 먹고 사는 문제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에서 나만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거였다. 행여 나는 입만 살아서 정작 나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와의 성경공부란 것도 대체 이걸 왜 하나? 싶게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 같은데, 아이들을 주의 사랑으로 대한다고 하지만 저들은 마치 사람을 우롱하듯 교육비도 몇 개월씩 밀리면서 요구하는 건 많다. 덩달아 애들은 철딱서니가 없고,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는데….
내가 감히 딸애가 사귀는 아이에게, 할 거면 목숨 걸고 하자. 주의 이름으로 죽자.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나에 대하여 주 앞에 고한다. 언제 나 또한 롯과 같이 더 나은 땅을 찾아 떠날지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이가 무슨 횡포도 아니고, 사역만 할 거면 오라니! 정작 본인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만두고 싶은 사람이면서 말이다.
어떤 그리움은 사무쳐 나를 옥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시 88:8).” 때로는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6-7).” 그럼 어김없이 검은 목소리가 묻는다. 그래도 계속 할래?
주여 나와 동행하여 주세요. 곧 나의 만족이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여 가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말씀만 믿고 전하는 자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8-29).” 소망을 붙들고 사랑하는 자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하여 이 땅에서 주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지기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그러므로 사랑의 줄로,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주님만 노래하며,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시 21:13).”
꿀꿀한 마음 그대로 책상에 앉아서 말씀을 펼쳤을 때, 주는 언제나처럼 말씀하셨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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