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전봉석 2017. 4. 27. 07:30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잠언 27:17, 19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시편 87:1

 

 

 

말씀은 항상 나를 주목하신다. 이게 뭔가? 싶다가도 말씀은 단번에 그 대답을 이끌어내신다. 이는 그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신 것이어서, 성령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질투할 정도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 그 사랑은 마귀를 대적하게 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 이게 방식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5:16).” 하신 대목에서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생각을 적어두고 있을 때, 전화가 들어왔다. 거리가 멀어 올 수 없고, 아이 때문에도 왔다가 긴요한 대화를 나눌 수 없어 안타까워하던 이였다. 그래서 ‘전화상담’을 제안하였고,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남짓 통화를 하는 것으로 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 하면 치대는 성향 때문이기도 하고, 기도를 더하며 할 말을 아껴두게 하려는 거였다.

 

서로 고백하고 서로 기도하라. 우리의 제 일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감히 정돈해보자면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늘 그러려니 할 뿐 온전한 인간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어 막연하였다. 둘째, 그래서 다른 사람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한다고 애쓰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다. 셋째, 이를 누리는 데 있어 언제 또 그만두게 될지, 거절당할지,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다.

 

물론 누구도 누구를 강제로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도 그리 하지 않으신다. 놓아두심으로 그 상황과 여건에서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런저런 상황에서 어쩌면 결혼을 도피처로 생각하였다. 무심하고 변덕스러운 신랑과 병치레가 잦은 아이는 그녀 몫이 되었다. 전날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 울음이 터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비난이 쏟아졌다. 말 그대로 비난은 상처 받은 자의 피난처다. 상처는 엄밀하게 말해서 상처 입은 자의 의지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누구로 인한 것이지만 자신이 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혼란스럽다. 좋을 땐 한없이 인자하시고 자비하시다가 금세 토라져 심통을 부리시는 것 같다. 그 변덕을 맞추느라, 신앙은 기진하여 예민해졌거나 둔하여져 무감각하다. 그래서 취하는 게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하나님이다. ‘그래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춰, ‘그러실 것이다’는 데 희망을 건다. ‘자신만의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세워가는 것이다. 그녀의 형편과 사정을 기술하려는 게 아니라, 그 사정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하나님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기록하고 싶었다.

 

첫 걸음이자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이기도 한,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런저런 문제를 들어 상대를 비난하고, 비난하는 자신을 괴로워하였지만 정작 그 내밀한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었다. 어떻게 나에게 그러실 수 있냐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인색하고 야박한 하나님이시다. 냉정하고 가혹하신 분이다. 어릴 때 이런저런 환경 때문인가? 넘겨짚기도 하였다.

 

심리학은 과거를 토대로 우리 안에 형성된 무의식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우리의 대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토대로 두고 있어야 한다. 인정하기 어렵다 해도, 납득이 안 된다 해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게 전제조건이다. ‘그 사랑’으로 모든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나는 먼저 어떤 식으로든 가정예배를 시작할 것을 제안하였다. 아이와 혹은 신랑과 같이 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면 좋겠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혼자서라도 말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 앉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다음은 억지로라도 혼자서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랐다. 한 장이든 한 절이든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으로도 충분할 거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하여 본인이 참여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내가 훈계할 일도 아니고, 뭐라 이르는 걸 모르거나 새삼 들려주는 것도 아닐 테고! 문제는 모르는 게 아니라 나름 잘 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일부러 시간을 지켜 한 시간쯤 대화를 마무리 하고, 기도로 마쳤다.

 

이는 결코 누가 누구를 위해 수고하는 일이 아니다. 일방적일 수 없다. 상담사 자격증을 딸까? 그래서 정식으로(!) 상담치료를 업으로 할까? 생각하다 그만둔 이유였다. 천만금을 준대도 나는 책임질 수 없다.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것으로 돈을 벌 생각도 없다. 다만 이처럼 주가 더하실 때, 나는 그저 주의 이름으로 할 뿐이어서 전적으로 그 책임을 주께 전가한다. 내 책임은 다만 그 책임을 주께 맡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건 나 역시 치유의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오늘 잠언의 말씀이 맞춤하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우리는 동행한다. 하나님 나라 가는 그날까지, 어느 일정기간을 같이 하게 두신 사이다. 나도 저도 서로의 얼굴을 빛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다. 서로 방문하는 것도, 저의 마음을 거드는 것도, “물에 비치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치느니라.” 저만 그런 게 아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였다. 그 문제가 내 거였다.

 

우리는 각각 어떤 지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터전이 어디냐는 거였다. 오늘 시편은 이를 들려주신다. “그의 터전이 성산에 있음이여.” 다른 말은 모두 군더더기가 된다. 없어도 되는 말들이 구구절절 우리를 주도하려고 한다. 저가 신랑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그 구구한 사연이 실은 내가 더했다. 내가 그 신랑을 뺨친다. 나 같은 놈이다. 내가 더하다. 늘 대화를 하다보면 느끼지만, 나는 의사인 것보다 환자인 게 감사하다. 내가 당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김없이 왜? 왜 그러는데? 하는 질문을 여전히 무기처럼 들고 설쳤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마음에 숨은 사람에게 말을 거신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 아! 말씀보다 더 좋은 상담책은 없다. 무심히 적어두었던 메모가 어김없이 표지가 된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밑줄을 그었던 것뿐인데, 정확히 우리의 환부에 붙이는 치료제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에 숨은 사람이 소중하였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9).” 이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는 말씀이 한 목소리로 들릴 때가 복되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 이를 생생한 목소리로 들은 베드로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감당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는 게 복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이 그의 터전이시다. 그 나라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곧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시 87:2).”

 

죄는 지나간 것으로 족하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그러므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롬 13:13).” 자꾸 남 탓을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그런들? 그랬더니 결국은 내가 더 죽겠는 거 아닌가? 내가 바뀌지 않는 한 결코 저는 바뀌지 않는다. 저를 비난하는 건 기어이 나는 바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들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그리하여 나에게 주시는 오늘의 태도가 귀하였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그리하여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