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언 29:25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
시편 89:24
몸이 힘들면 마음이 겸손해진다. 마음이 어려우면 행동거지가 달라지고, 돈이 없으니까 신중해진다. 자식들 일로 주를 찾고, 안 믿는 아이들을 대하면서는 어김없이 주의 도우심을 바라게 된다. 나는 아직 못 느낄지라도 기도 중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바로 그 담대함이 절실함이었다.
치대는 이를 우리가 다 건사할 수는 없다. 아래층 아이엄마는 어찌 지내는지, 아내는 자꾸 마음이 쓰여 자주 전화를 해보았다. 인위적으로 격리수용까지 하고 치료를 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었다. 반짝 호전됐던 상태는 도로 술을 찾고 약물에 의존하면서, 헛소리를 하고 헛것이 보인다고 쩔쩔맸다. 누군 같이 가고 누군 삐대고 외곬으로 간다. 우리가 어찌 더 감당할 수 없다. 곁에 두시고 마주하는 이를 대할 뿐이다. 서로가 감정적으로 다가가면 끝도 없다.
공연히 전이된 마음은 혼란만 가중시킨다. 같이 동조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성령으로 하자. 저의 인도하심만이 살 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나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그와 같이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몸 하나 감당하지 못하겠으니까 말이다. 아침에 일찍 서둘러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눕기도 힘든 상태여서 혼쭐이 났다. 기도해야 할 일과 이름들을 정돈하였다.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일은 무던함밖에 없었다. 묵묵히 준행하는 것, 사랑하기 싫은 사람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한다는 건 오래 참음으로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대대거리며 맞상대한들 저는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 왜 저런 이를 내 곁에 두시는 걸까? 하나님에 의한 훈련이다.
그리하여 나의 연약함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결코 나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내가 의지하는 것들로부터 나를 떨어뜨리신다. 그리고 기어이 이 보배가 나의 연약함에 담겼음을 알게 하신다. ‘있는 집 아이들’ 수업을 할 때면 어떤 허탈함이 든다. 많고 풍족하여서 아쉬울 게 없다. 삼백만원이 넘는 자전거를 반값에 싸게 샀다며 자랑하는 아이에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어떤 자괴감까지 등에 업고 서야 할 때면 뭐랄까? 내 안에 이는 욕지기를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 아! 속 떠지는 주님의 심정을 알게 하려 하시는구나. 이는 어쩔 수 없음의 문제였다. 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과 같은 나이 때 아이는 주께 기도하였다. 의사가 돼서 많은 사람을 치료하며 주의 사랑을 실천하겠다.
그런데 십대 후반, 그녀는 쓰러졌고 병명도 희귀한 골근육 무슨 질환을 앓게 되었다. 몸은 굳어져가고 심한 통증으로 나날이 고통 가운데 휩싸였다. 늘 주께 낫기만을 기도하며 십여 년을 넘게 치료에만 전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이 삼십이 되던 어느 날 오후, 그녀는 체념하였다. 자신에게 두시는 이유 모를 고통을 수용하였다. 아무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서, 그 자체로 순종하기로 한 것이다.
할 수 있는 걸 하자. 아픔 중에, 누워서라도, 고통 가운데서도 주께서 그리 두신다면 그 상태로 말이다. 늘 낫기만을 바라던 때와 달리 비로소 곁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에 지친 간호사와 바쁘기만 한 의사와 기계적으로 병실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와 볼 때마다 안타까움에 절은 가족들이 있었다. 그녀는 새삼 눈에 들어온 저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상냥하게 굴었으며, 누워서 혹은 앉아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그와 같은 실천이 옆 사람에게 전해지고 다른 병실에도 소문이 나고 온 병원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앉았으면 누워 있는 사람을 위해, 서서 걸을 수 있을 때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을, 간호사를 청소부 아주머니를, 먼저 상냥하게 대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였다.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그녀의 움직임은 옆 사람의 동조를 끌어냈고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가져왔다. 병원 전체가 그녀 이름을 따서 ‘할 수 있는 걸 해’ 하는 환자들의 자발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수십 개의 병원에서 그와 같은 실천이 있게 됐다.
그녀는 훗날 고백하기를 자신이 의사가 되어 돌볼 수 있던 환자 수보다 더 많은 환자와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이먼 비치> 짧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무엇을 느꼈을지 나는 모른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하나님이 오늘도 내게 하루를 허락하시는 이유가 아닐까? 어디가 아프고, 뭐가 모자라고, 어찌 답답하고, 그래서 고달프기까지 하다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기 원하신다. 가만히 누구 때문에 속 끓이다가도 그게 결국 날 위한 것이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얘들을 왜 보내실까? 이 일을 왜 겪게 하실까? 왜 이런 처지에 두시는 걸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왜’보다 그래서 난 지금 무얼 미루고 있는지, 혹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면서 공연히 사람을 의식하지만,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 29:26).” 모든 일의 작정이 주의 것임을 알 때 더는 올무에 걸리지 않는다.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25).” 이때 주의 음성을 시편이 노래하였다.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시 89:24).” 주가 함께 하실 때 복이 있다.
주가 아신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1).” 그러므로 사람 볼 거 없다. 나를 의식하는 것도 별 거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행여 누구의 칭찬을 기대하기보다 주만 바라며 나아가기를.
누가 내게 하나님을 어찌 느끼는가? 물으면 가장 선명할 때가 말씀을 읽을 때다. 뿐만 아니라 무심히 선택하여 읽은 책 같은데, 믿음의 사람들이 겪었던 그 모든 일이 오늘의 내 것과 다르지 않다는 데서 큰 위로를 얻기도 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저마다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일에 있어 공통된 무엇, 고통은 각각 달랐어도 그것을 통해 주를 바라는 마음은 하나였다는 것을 말이다. 이에 내가 할 일은 누구도 나에게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9-12).”
내가 바라고 구하는 기도가 되었다. 그리하여서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그와 함께 하리니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뿔이 높아지리로다(시 89:24).” 하시면,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5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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