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전봉석 2017. 5. 13. 07:21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

잠언 13:19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13-14

 

 

 

이것만, 하고 고집을 부려서 한껏 미루고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그만두고 마는 게 있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면 다시 되돌려 마땅히 했어야 하는 일을 마무리 짓는 경우가 드물다. 그랬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피로 모면하려든다. 시치미 떼는 것이다. 소원을 성취하기까지 나름 그토록 애달파하며 미루어두던 것을 더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새 나의 소원에 길들여진 마음은 이제 그것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 아, 그래서 더는 교회를,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는 거였다.

 

말씀을 음미하는 동안 누구의 경우가 떠오르다 자못 이해가 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되새기다 내가 그러고 살았던 것에 대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잠 13:19).” 소원이 악은 아니겠으나 그것에 붙들려 있는 마음은 악이 되었다. 주신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게 악일 수는 없겠으나 그것으로 주를 바라는 마음을 잃어버린 데는 악하였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그래서 지혜자는 경계하였다.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한참 좋을 때, 바쁘고 정신이 없을 때, 나름 보람을 느끼고 감사가 처벌처벌 넘쳐날 때, 왠지 뿌듯하여 제멋에 겨워할 때, ‘창조주를 기억하라.’

 

설교원고를 정리하고, 베이커의 <희망소식>을 읽었다. 그리고 누구를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아이를 떠올리고 전화라도 할까, 말까, 갈등하였다. 그래야 할 거 같은데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기도 해서, 그러느라 드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주의 도우심을 바랐다. 그러다 문득, 더는 마음이 기울지 않는 어느 이의 이름 앞에서 아찔하였다. 그의 이름을 새로 적어 붙여도 별로 마음이 쓰이지 않아 놀랐다. 언제는 그렇게 사람 애간장을 녹이더니, 순간 어떤 슬픈 감정이 일었다. 마음을 쓰고 기도를 하는 일에도 다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어찌할 방도가 없겠다. 부질없다는 말이 새삼 와 닿았다. 영원할 것 같던 모든 게 변하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 가장 덧없는 듯하였다. 한참 그의 이름에 시선을 두다 창가에 붙인 메모를 떼어 냈다. 형언하기 힘든 어떤 슬픔이 스치는 것 같았다. 아련하여 차마 떠올리기 힘든 기억도 있었다. 더는 아무렇지 않다는 게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아찔함에 대해서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주님의 말씀이 정곡을 찌르는 듯 기억났다.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었다. 그럴 수 있을 때 그러는 게 복이었다. 더는 어쩔 수 없는 때가 오나니, 그리하여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2).” 이 말씀은 삶의 지혜를 함축하여준다. 내가 노인의 얼굴을 사랑하는 이유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바쁜 걸음으로 오가는 노모들을 마주친다. 어떤 때는 순수한 소녀 같다가 어떤 때는 조바심치는 아가씨 같고, 어떤 때는 새침한 새댁 같다가 어떤 때는 관록이 묻어난 지긋한 본연의 노인 같다.

 

센 머리 앞에 일어서라.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 16:31).” 그렇게 잘 늙었으면 좋겠는데, 자라지 못한 아이가 내 안에 있다. 금세 마음이 상하고 또 퉁명스럽게 굴 때면 정말이지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언제쯤 나는 의연할 수 있을까?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4).” 곧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3-14).”

 

말씀 앞에 가만히 있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누구보다 사람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오늘의 내가 사뭇 이상할 때도 있다. 그처럼 좋아라하던 사람인데 더는 그에게 쏟는 마음으로 휘둘리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누구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 하다 그만두는 경우도 그래서다. 그런들? 새삼스러워 전에 같지 않은 마음에서 부질없음을 배운다. 마치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던 시절이 있었는데… 단지 먼지뿐임을.

 

서글픈 것 같기도 하다, 더 나은 본향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걸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데, 내가 이러고 있는 게 가끔은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나 자신이니까 말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7-8).” 창가에 서서 누구를 생각하다 이내 오늘의 나로 감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외롭고 고달프다 싶었는데, 잃고 싶지 않은 값진 게 되었다. 어디로 피하리이까!

 

오후께 초등학교 아이들 수업에 강영우 박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학교 때 축구공에 맞아 시력을 잃고 또래 아이들보다 거반 6년의 세월을 뒤처진 것 같았지만, 저의 더디고 먼 걸음은 도태함도 낙오됨도 아닌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였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미국 부시 행정부에서 한국인 최초 자문위원으로 지낸 그는 ‘이 모든 게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였다. 한참 때, 모든 게 그저 우스워 보일 때,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전 4:13).” 지금의 소중함을 명심하기를.

 

출근길에 딸애가 빈혈을 호소하여, 저녁에 같이 만나 나주 국밥을 먹고 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같이 둘러앉아 시편 120편부터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를 묵상하였다. 세상은 비록 우리와 싸우자고 들지라도,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시 120:7).” 우리의 도움은 하나님이심을,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2).”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122:9).” 더는 기억이 흐릿하고 더는 마음이 전 같지 않다 해도, 나는 너를 위하여 구하리라. 이는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한 거였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123:1-2).” 하면,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124:8).” 그러므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125:1).” 아멘.